연옥과 면벌부(Indulgence)
안상혁 교수(합신, 역사신학)
마르틴 루터에 따르면 중세 교황주의자들은 천국과 지옥 이외에 적어도 세 개의 사후 장소를 만들어 성경에 덧붙였다. 첫째, 선조들이 머무는 ‘림보’이다. 그리스도께서 하강하셔서 이들을 해방시키셨다고 주장한다. 이곳에는 형벌이 없으나 선조들은 그리스도를 인내하여 기다리는 어려움을 당했다고 말한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죽은 자들도 약속의 말씀 안에서 구원을 받았으며 죽음을 맞이했을 때, 곧바로 생명 혹은 ‘아브라함의 품’(눅 16:22)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씨 곧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둘째, ‘세례받지 못한 영아들의 지옥’이다. 이곳에 있는 영아들은 정죄받으나 불이나 벌레로 인한 고통을 받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빛을 상실할 뿐이라고 로마 교회는 가르쳤다. 루터는 세례받지 않은 영아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은 없으며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 자체가 지옥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받아 주실지의 여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루터는 강조한다. 셋째 연옥이다. 보속(satisfaction)을 완수하지 못한 신자들이 사후에 머무는 장소이다. 중세사가 자크 르 고프에 따르면 연옥 교리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망자를 위한 “대도(代禱)”와 구원의 과정에 포함되는 “사후 정화(postmortem purification),” 그리고 특정한 “장소로서의 연옥”이다. 이러한 연옥 교리는 12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고 르 고프는 주장한다. 루터는 연옥이야말로 가장 큰 거짓이라고 말한다. 연옥이 존재한다면 사실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속’이 구원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라고 비판한다.
중세 연옥 교리의 폐해는 특히 면벌부(indulgence)와 관련되었다. 연옥이라는 장소에서 “쓰레기 같은 면벌부와 교황주의 종교가 기원한다”라고 루터는 말한다. 면벌부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해성사와 관련하여 등장했다. 고해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사면선언(absolution)을 받은 신자는 보속을 수행해야 했는데, 이는 자선이나 기도 혹은 금식 등과 같은 종교적인 행위로 구성되었다. 이는 죄를 용서받은 신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반성하며 일종의 현세적으로 벌을 받는 절차에 해당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면벌부는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죄사함을 받고 죄책이 제거된 신자가 현세에서 행해야 할 보속의 일부 혹은 전부를 면제시킬 수 있는 것이 면벌부의 제한적 기능이었다. 중세 성기에 이르러 면벌부는 교회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교리적 타락과 체계적으로 연결되며 더욱 오용되었다. 교황은 교회가 선동하는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이나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헌금하는 신자들에게 베푸는 특별한 혜택으로 면벌부를 남용했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는 십자군 사면부를 발행하며 이는 교회가 부과한 모든 벌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기한적 형벌을 면제한다고 선언했다. 중세 후기에는 사면부가 현세를 넘어 연옥에 있는 자들에게까지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사면부가 연옥에 있는 자들의 구원에 효력이 있음을 선언했다. 면벌부는 연옥에서의 형벌 기간을 면제 혹은 단축시켜 준다고 선전했다. 중세말 면벌부는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보증하는 그야말로 ‘면죄부’가 되었다. 면벌부를 판매하는 자나 구매하는 자에게 그것은 일종의 천국행 티켓이었다. 마침내 루터는 면벌부 판매를 논박하는 “95개조 테제”(1517)를 작성하였고 이와 함께 종교개혁 시대가 개막되었다.
“사후에 신자는 최후 심판 때까지 어떤 상태에 있는가?” 루터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의 영혼은 살아있고, 평화 가운데 잠들어 있으며, 그 어떤 괴롭힘을 받지 않는다.” 루터는 마 22:23, 요 8:51, 사 57:1-2, 계 14:13 등을 인용하며 사후에 신자들은 죽음, 연옥,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평화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요컨대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죽는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고, 우리를 위한 보속을 수행하셨다. 그분이야말로 신자가 기댈 품이고, 낙원이며, 위로이고 온전한 소망이다.
1480년 4월 10일, 교황 식스투스 6세의 대리인 존 켄달이 테이든 가논의 존 프린스와 루시 부부에게 발행한 면벌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