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8] 역사 속에서: 샤를르9세(2)

0
87

역사 속에서: 샤를르9세(2)

샤를르9세의 통치 3년차였던 1562년 3월 1일, 주일 아침은 작은 마을 바씨에도 봄날을 알리는 새 소리로 가득했다. 위그노들은 성 밖에서 예배가 허락된다는 생제르맹 칙령을 따라 바씨의 외곽에 자리 잡은 한 헛간에서 목사의 인도아래 시편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마침 프랑수와 기즈 공작이 한 무리의 군대를 거느리고 바씨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어떤 연유에서건 기즈의 군대가 예배 현장을 덮쳐 위그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상하였다. 지붕을 뚫고 성벽 위로 도망하던 위그노들은 자기들을 과녁 삼아 날아오는 총알에 꼼짝없이 희생되었다. 이른 바 “바씨 학살”이다.

이 날 무고한 위그노 신자들 50명이 피살되고 140명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레오나르 모렐 목사는 군인이 휘두르던 칼이 부러지는 덕분에 목숨을 간신히 건졌지만 인근 감옥에 투옥되는 고초를 당하였다. 전국의 위그노는 바씨 학살 소식에 전율하였고, 기즈의 만행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팔짱끼고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특히 부르봉 왕가의 루이 꽁데 왕자는 위그노를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무언가 대책을 강구하였다. 전쟁의 검은 먹구름이 코앞에서 급한 걸음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1562년 4월, 꽁데 왕자가 오를레앙을 공격하면서 앞으로 38년 동안 지속될 여덟 번의 위그노 전쟁이 서막을 열었다. 전쟁의 정당성을 위해 꽁데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겨우 몇 달 전 발령되어 위그노에게 원칙적으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허용한 생제르맹 칙령(“1월 칙령”)을 기즈가 묵살하고 바씨 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꽁데는 한편으로 생제르맹 칙령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는 명목과, 다른 한편으로 열 살배기 어린 국왕을 기즈에게서 보호한다는 명목을 부각하였다. 꽁데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즈 가문을 타도하고 왕실을 위그노 신앙으로 개편하는 데 있었다. 샤를르의 재위 동안 전쟁은 자그마치 네 번이나 발발하였다.

1차 전쟁(1562~1563)에서 양 진영의 지도자는 묘하게 엇갈렸다. 가톨릭 왕군의 총사령관은 형인 부르봉 엉뚜완느였고, 위그노 군대의 총사령관은 동생인 부르봉 꽁데였다. 루앙 전투에서 엉뚜완느가 치명상을 입고 수일 후에 사망하였다. 희한하게도 드류 전투에서 왕군의 대원수 몽모랑시와 위그노의 지도자 꽁데가 각각 적군에게 생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상대 진영에 형제나 친척, 친구나 동료가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싸움을 시작하지 못하였지만, 일단 전투가 개시된 후에는 참혹한 살육이 벌어졌다. 결과는 폭력, 약탈, 학살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 위그노는 승리하는 곳마다 성상을 파괴하였다. 1차 전쟁은 기즈의 피살과 함께 중대한 전환점에 들어섰고, 엉부와즈 칙령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진 두 번의 전쟁에서는 양군이 각각 총사령관을 잃었다. 2차 전쟁(1567~1568)에서는 왕군의 몽모랑시 대원수가 전사하였고, 3차 전쟁(1568~1570)에서는 위그노의 꽁데 왕자가 생포된 상태에서 피살되었다. 2차 전쟁에는 개혁파를 추종하는 독일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카시미르가 위그노를 지원하기 위해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합세하였다. 결국 이 전쟁은 롱쥐모 평화협정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3차 전쟁에서는 피살된 꽁데 왕자 대신에 독실한 위그노 신자로 적군마저도 흠모하는 인품을 지닌 꼴리뉘 제독이 위그노의 통수권을 받았다. 이 전쟁은 생제르맹 칙령으로 끝났다.

왕국을 파산으로 몰아가는 전쟁 앞에서 모후 까뜨린느는 양 진영을 화해시킬 궁리를 짜냈다. 다름 아니라 가톨릭과 위그노를 대표하는 왕실 간의 혼인이라는 묘책이었다. 묘령의 가톨릭 신부는 까뜨린느의 딸이자 국왕 샤를르의 여동생인 마르그리뜨였다. 위그노 신랑은 나바르의 여왕 쟌느 달브레의 아들 앙리였다. 쟌느는 남편 부르봉 엉뚜완느가 전사한 후에 위그노 신앙을 받아들여 위그노의 정치적 수장이 되었다. 앙리와 마르그리뜨의 혼인은 급물살 속에 추진되었고, 파리에서는 피처럼 붉은 여름철의 장미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혼인예식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