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6] 역사 속에서 : 프랑수와 2세(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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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 프랑수와 2세

앙리2세가 마상시합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그의 장남 프랑수와2세가 왕위에 올랐다. 앙리2세의 죽음 앞에서 왕비 까뜨린느가 만면에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고 추정하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사실 까뜨린느는 남편 앙리2세가 살아있는 동안 쪽을 쓰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해서 감싸고도는 대신 까뜨린느를 매사에 무시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앙리2세의 죽음과 함께 까뜨린느는 연적과 그 세력을 단숨에 왕궁에서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할 기회를 얻는 셈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자주 묘하게 흐르는 법이다.

까뜨린느 앞에는 또 다른 강력한 정적이 부상하였다. 프랑수와2세가 왕위를 이어 받았을 때 나이는 15살이었다. 미숙하고 병약한 프랑수와는 모친을 앞세워 정치를 하고 싶었지만 까뜨린느는 아직 상중이라 그럴만한 위치가 못되었다. 프랑수와의 왕비는 스코틀랜드의 메리였는데, 골수 가톨릭 귀족 기즈 가문의 외조카였다. 이 때문에 프랑수와는 모친의 동의를 받아 왕비의 삼촌 프랑수와 기즈와 로레인 추기경 샤를르에게 국정을 위임하였다. 이 처사는 까뜨린느에게 오랜 동안 힘겨운 정적을 세워 준 꼴이 되었고, 정권 경쟁자들 뿐 아니라 위그노들에게 큰 격동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기즈 가문의 두 형제는 이미 선왕 앙리2세의 치하에서 혁혁한 이름을 날린 인물들이었다. 프랑수와 기즈는 한 마디로 말해서 전쟁 영웅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전쟁(1551-1559)에서 프랑스 왕군을 이끌며 여러 차례 승리를 장식하였다. 후일 위그노 1차 전쟁(1562-1563)의 사령관이 될 터였고, 결국은 오를레앙 공성 중에 암살을 당할 운명이었다(1563). 프랑수와 기즈의 동생 로레인 추기경 샤를르는 종교와 정치 분야의 외교 전문가였다. 프랑수와2세에게 국정을 위임받은 기즈 가문의 두 형제는 군대와 종교를 나누어가지는 특권을 누렸는데, 두 형제의 공통점은 위그노를 지극히 혐오하였다는 것이다.

위그노는 기즈 가문이 왕궁에서 득세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여기에 기즈 가문의 군대 장악을 두려워하는 귀족들의 긴장감이 더해지면서 모반이라는 극단적인 해결책이 가열되었다. 의기투합한 모반자들은 왕을 납치하여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게 만드는 한편, 기즈 형제들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1560년 초엽). 그들은 프랑수와2세가 엉부와즈 성으로 이동하는 시점에 행동을 개시하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역사는 순탄하게 흐르지 않았다. 겁을 먹은 배신자가 음모를 누설하는 바람에 반란 직전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고, 남은 사람들이 엉부와즈 성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생포되어 무서운 고문 끝에 무참히 참형과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기즈 가문에게 위그노를 지지하는 방계 왕족 부르봉 가문의 엉뚜완느(후일 앙리4세의 부친)와 꽁데(후일 위그노 전쟁 지도자) 형제를 한꺼번에 제거할 빌미를 제공하였다. 두 형제는 왕궁으로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다. 엉뚜완느는 겨우 화를 모면하였지만, 꽁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사형 언도(1560.12.10.)를 받고 투옥되었다. 잔혹한 고문을 받은 모반자들은 음모의 배후에 제네바의 깔방과 베자가 있다고 자백하였다. 물론 제네바 지도자들은 이런 방식의 음모를 지지하지 않았다. 1554년 베자가 이미 저항이론을 펼친 것은 사실이지만, 엉부와즈 음모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엉부와즈 사건 직후 베자의 저항이론이 프랑스어로 출판되어 기즈 가문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강화하였다.

불행하게도 프랑수와2세는 겨우 17개월 동안 왕위를 지키고는 병들어 죽었다. 왕비 메리는 아홉 달 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갔고, 10살짜리 동생 샤를르9세가 왕위를 이었다. 자동적으로 섭정후가 되어 정권에 발을 내디딘 까뜨린느는 이제부터 왕궁 안팎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기즈 가문과 겨루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