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이야기 5] 역사 속에서 : 앙리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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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 앙리2세

 

앙리2세와 몽고메리 마상시합

 

역사는 반복이 아니라 연속되는 것이다. 앙리2세는 부왕 프랑수와1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위그노 박해에 앞장을 섰다. 앙리가 왕좌에 오른 것은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이다. 7살짜리 앙리는 파비아 전투에서 포로가 된 부왕이 석방 받는 조건으로 형과 함께 볼모로 잡혀가 4년 동안 타국에서 우울한 삶을 보냈다. 앙리는 14살에 동갑내기 까뜨린느와 혼인을 하였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시 가문으로 교황의 조카였던 그녀는 네 아들을 낳았지만, 일생 다른 여성을 사랑한 앙리에게 애정을 받지 못하였다. 어느 날 왕위 계승자였던 형이 테니스를 하다 물을 마시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형의 사망 원인이 베일에 싸인 채 앙리가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앙리는 왕좌에 오르자마자 위그노를 색출하여 고문하고 심지어 화형을 집행하는 샹브르 아르덩트라는 기관을 파리 시의회에 설립하였다. 게다가 앙리는 샤또브리앙 칙령을 발표하여 이단으로 치부한 위그노들을 강하게 압박하는 카드를 내밀었다. 여기에는 위그노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것과, 불온서적을 인쇄하거나 수입하여 판매하는 것을 전면 금지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당시 유력한 시의원이었던 안느 뒤부르는 위그노를 옹호하는 발언 때문에 국왕의 미움을 사서 투옥되었고 결국 앙리의 사망 직후에 파리 시내 한가운데서 교수형과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앙리의 통치 기간은 공교롭게도 쟝 깔방의 주요 활동 시기와 맞물려 있다. 앙리가 박해의 시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시기에 도리어 깔방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제네바로부터 개혁파 물결이 프랑스로 쇄도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났다. 제네바에서 훈련 받은 적지 않은 수의 목회자들이 프랑스 전역에 파송되어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전도자들의 파송과 함께 프랑스어로 번역된 성경과 시편찬송이 보급되었고, 신앙교육서, 설교문, 신학논문 등 다양한 문서들이 왕궁의 불같은 감시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유입되어, 위그노들에게 믿음의 양식을 제공하였다.

놀랍게도 앙리의 박해가 절정에 달한 시점에 제1차 전국 위그노 총회가 파리 한복판에서 열렸다(1559.5.25.-28.). 총회 장소는 루브르 왕궁에서 센 강 남쪽 너머 직선거리로 고작해야 500미터로 떨어진 곳이었다. 12노회의 72교회를 대표하는 20명의 총대가 나흘간 모여 치리서와 고백서를 작성하였다. 40항목의 치리서는 교리와 예배와 윤리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치리서는 목사, 장로, 집사 세 직분을 말하며, 당회, 시찰회, 노회, 총회 네 조직을 말한다. 치리서가 처음부터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평등과 직원의 평등이다. 고백서도 40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 구원, 교회, 세속정치를 차례로 진술한다. 고백서를 통해서 위그노들은 피로 얼룩진 박해의 시대에 무엇을 믿어야 할지 선명하게 알았고, 믿은 바를 위해 피를 흘리는 고난의 자리에 동참하였다. 이 고백서는 보통 “프랑스 신앙고백서”라고 불리지만, 로마 제국 시대로부터 내려온 속령의 명칭을 따라 “갈리아 신앙고백서”라고 불리기도 한다. 후일 이 고백서는 베자가 의장을 맡았던 제7차 라로쉘 총회에서 인준을 받았기에 “라로쉘 신앙고백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앙리는 선대로부터 65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와 치른 이탈리아 전쟁을 까또-껑브레지 평화협정으로 끝내면서, 큰딸을 스페인 왕과 결혼시키는 것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제1차 위그노 총회 한 달 후였다. 축하연에서 마상시합을 지켜보던 앙리는 직접 나서서 스코틀랜드 용병대장 몽고메리와 시합을 겨루었는데, 몽고메리의 창끝이 부러지면서 파편이 하필이면 눈에 박히는 치명상을 입었다. 몽고메리는 앙리의 용서를 받았지만 따가운 눈총을 이기지 못해 직위를 떠나 신학을 공부하는 길에 들어섰고, 후일 종교 전쟁이 터지자 위그노 군대를 지휘하였다. 15살짜리 장남 프랑수와2세가 왕위를 이양 받자, 위그노에게는 어둡고 거친 긴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대표 : 조병수 박사
경기 수원시 영통구 에듀타운로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