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이상목 목사(동산안교회)
생각의 차이에서 감성이 올라온다. 어떻게 하지? 이제 무엇을 하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그래서 무력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를 몰랐다. 굳이 찾는다면 그냥 내 생존을 위해서 내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 때문일 수 있겠다. 내 생존을 위해서 내 역할을 한다는 것은 내 생존이 내게 달려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오늘 성경을 보고 지난 주 내 설교를 들으면서 이 부분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신명기 27,8장이 오늘 읽은 성경이고, 이사야 35장이 지난주에 한 설교이다. 내 생존은 내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는 일이다. 내게 달려 있는 것은 내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느냐,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나님과 그 말씀을 잊어버리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욕심을 부리며 사느냐 하는 선택이다. 당연히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면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순종하는 삶을 택할 것이다.
문제는 평범한 일상은 나를 이런 기로에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 그것은 나를 기로에 세우는 대신 어느 기초 위에 서서 살고 있는지조차 잊게 만든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를 위해서, 나의 유익과 번영과 명예를 위해서 살도록 삶의 운동장을 기울인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나의 방향이 이렇게 기울어지고 있는지조차 인식 못할 정도이다.
어쩌랴? 이것이 육신을 가진 내가 처한 세상의 형편인 것을!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지금의 나를 이해할 길이 없다. 평안하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 계속 평안을 추구하려 하고, 힘들면 그것을 벗어나고자 애쓴다. 평안함과 고난의 자리 그 어디도 주를 앙망하며 그 뜻에 순종하며 주께 맡기기에 적당하지 않다. 어느 자리에서도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전진하는 것은 어색한 몸짓 같고 나를 위해 몰두하는 자세는 자연스럽다. 그나마 거룩한 시간은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뿐.
이런 환경에 사니 내 생각을 교정해야 한다. 나의 생각이야 말로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아마겟돈의 현장이다.
나는 주님의 것이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주의 소유다. 주는 나의 신랑이시고, 나는 주의 신부다. 주의 뜻이 내가 할 일이고, 나의 삶은 주님이 돌보신다.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대신에 오늘 주님은 내가 무얼 하기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 내 질문이어야 한다. 내 질문이 나를 대변한다.
“주여! 내가 주의 소유된 것의 영광과 자유를 세상에 내 주지 않도록 내 마음과 생각이 사랑하는 주님 앞에 반듯하게 하소서, 내 생각에 날마다 성령의 세례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