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땅에 단비를] 보내시는 하나님_허태성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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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시는 하나님”

허태성 선교사(일본 만노그리스도교회 담임)

 

1977년 10월 13일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문한 지 45년이 되었다. 그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다. 내가 목사가 되어 설교한 것만 해도 족히 일만 회가 넘을 것이다. 무슨 내용으로 그 많은 설교를 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내가 들었던 설교 중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설교가 하나 있다.

1981년 1월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나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매년 연말연시 4일간을 CCC 출신들의 모임인 ‘나사렛형제들 원단금식기도회’에 참석하여 금식하며 기도하곤 했다. 그 날의 설교자는 후암교회를 개척한 목회자로서 ‘비서구 세계선교운동의 창시자’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고 조동진 박사(1924-2020)였다. 설교본문은 창12:1-4이었고 제목은 “보내시는 하나님”이었다. 그 설교는 내 마음에 떨어져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1980년 8월 14일 수요일 밤에 나는 여의도 광장에 있었다. 80세계복음화대성회의 준비위원장이었던 김준곤 목사님은 그 밤에 그곳에 모인 수백만의 청중들을 향하여 도전하였다. 적어도 10만 명의 선교사가 필요하다며 일어서라고 했다. 서원하기 위하여 일어선 사람들 중에는 나와 내 아내도 있었다. 그 밤에 김준곤 목사님은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 사람들이 자신이 서원했다는 것을 잊어버릴지라도 당신께서는 기억하시고 찾아서 써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도 완벽하게 응답하셨다. 나와 내 아내가 산 증인이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면 선교사가 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세월은 흘러갔다. 선교사 서원을 한지 10년이 지난 1990년에는 나는 합신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졸업 후의 진로를 놓고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던 중에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윤복 선교사님이 인도네시아에 파송을 받아 출국하는 길에 교단 선교부의 여러 목사님들이 나를 포함한 재학생 5명을 동참하게 해주셨다. 이미 고인이 되신 장경재, 안만수 목사님을 비롯하여 김명혁, 박범룡, 장상래, 임석영 목사님 부부가 함께 한 여행이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선교현장을 열흘간 둘러보는 그 여행은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최초의 해외여행이었기에 약간의 흥분을 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관심사는 내가 과연 선교사가 될 수 있을까에 집중되어 있었다. 피나투보 화산을 오르고 칼리만탄의 정글을 지나며 주님께서 혹시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는 것은 아닐까를 수없이 많이 생각하였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도록 아무도 나에게 선교사가 될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후에 나와 같이 갔던 4명의 신학생은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교단 선교사가 되었다.

왜 나만 부르시지 않으시는 것일까? 이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만은 없었다. 나는 ‘가는 선교사’가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 내게 주신 사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던 중에 졸업하기도 전에 공주에서 금강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나 자신의 사례비도 받지 못해서 극도로 궁핍하게 살아야 했던 그때부터 나는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두 명의 선교사 후원을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금강교회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교회에서 나를 포함하여 다섯 가정의 선교사가 배출된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

또 10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 나는 은곡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은곡교회에 부임해서도 당회의 허락을 받아서 선교사 후원을 계속 늘려갔다. 하지만 선교에 대한 나의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 선교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2002년도에는 영어설교통역연구원에서 1년간 공부를 하여 미약하지만 영어설교통역과 영어설교를 해보기도 했다. 2003년도에는 필리핀 현지인 목회자 세미나에 강사로 갔다가 태풍 매미로 폐허가 된 교회의 소식을 듣고 교회당을 건축하여 봉헌하는 일에도 수종들 수가 있었다.

다시 10년이 지났을 때 나는 강변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선교지를 방문하여 선교사와 현지인들을 격려하고 강의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캄보디아와 중국에 예배당을 건축하여 봉헌하는 즐거움도 맛보았다. 하나님은 나를 십년 이상 합신세계선교회의 이사로 섬기게 하시며 선교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도록 해주셨다. 나는 65세에 조기은퇴를 하고나서 순회선교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생각보다 더 빨리 나를 부르셨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다. 하나님은 내가 처음에 가려고 했던 쿠바가 아니라 요나의 니느웨 같은 일본으로 보내셨다.

2016년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 설교를 끝으로 강변교회 사역을 마무리한 나는 1년 동안 GMTC와 합신세계선교회 그리고 일본복음선교회에서 선교훈련을 받고 2017년 12월 17일에 강변교회에서 합신세계선교회와 강변교회 공동으로 일본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 급한 문제는 일본어를 익히는 일이었다. 내가 선교훈련을 받았던 GMTC에서는 몇 년 전만 해도 40세가 넘은 사람을 훈련생으로 받지 않았다. 현지어를 배워서 현지인 사역을 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40세 이하로 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확한 기준이었다. 의심과 불안이 찾아왔다. 아직 일본어 히라가나도 읽지 못하는 내가 과연 이 나이에 일본에 가서 선교사역을 할 수 있을까?

2018년 9월 28일 나는 나리타공항을 통해 일본 땅으로 들어갔다. 일본어학교에 입학하여 1년 6개월을 공부하였지만 일본어는 생각만큼 빨리 늘지 않았다. 졸업 후에는 일본어 실력을 높여볼 목적으로 일본신학교 3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때마침 확산된 코로나로 인하여 모두 좌절되었다.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 채로 1년이 그냥 흘러가버렸다. 답답할 때마다 산에 오르고 강변을 따라서 걸으며 기도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하여 3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다. 둘째,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셋째,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날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순종하겠다. 이렇게 정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더니 마음이 훨씬 안정되었다.

2021년 3월 31일, 내가 다니고 있던 아키루다이바이블처치의 와타나베 선생이 집으로 찾아와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동경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시골인 카가와현 만노교회에서 목사를 찾고 있는데 가서 목회를 해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나와 아내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센세, 우리는 아직 일본어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못합니다!” 하지만 선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우선 가서 설교하면서 일본인들과 같이 지내다 보면 일본어가 능숙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노교회로 보내시려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그 분의 시간에 맡기고 순종하기로 했다.

2022년 10월 16일 나는 일본장로교회 만노그리스도교회의 목사로 취임하였다. 2018년 가을에 합신교단과 일본장로교단이 선교협력하기로 맺은 MOU의 첫 번째 열매의 주인공이 내가 되었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한국에서 환갑을 지나고 일본에 건너온 은퇴목사가 일본장로교회의 목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고 계신다. 보내기로 하신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보내신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뜻 안에 있다. 글을 맺으면서 조용히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본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