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향기 16] 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12_김진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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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12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통해 왕국계획을 실현하신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리하여 동물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그러한 왕국계획의 일부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란 원대한 계획에서 동물세계의 지배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된 일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수효가 크게 증가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받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온 땅을 가득 채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충만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a)는 축복을 먼저 주셨다.

표면적으로 노아 홍수는 하나님의 왕국계획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홍수의 물이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땅에서 쓸어버렸다(창 6:7 참조). 이로 인해 인간의 수효는 극도로 감소했다. 하지만 홍수 이후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시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b)는 말씀을 주셨다. 이는 인간을 통해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변함이 없음을 확인해준다. 그러나 홍수 이후의 형편은 인간에게 어떤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 없음을 알려준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마음에 악한 것을 생각한다(창 8:21). 인간은 한가지로 하나님께 반역을 꾀한다(창 11:1-9).

아브라함의 등장으로 하나님의 왕국계획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제 아브라함에게서 생겨나는 특별한 인간 그룹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도 사람의 수효가 중요한 문제로 언급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떠날 때 하나님은 그에게 “큰 나라”(gôy gādôl, great nation)를 약속하신다. 여기서 “큰 나라”는 백성의 수효가 큰 나라란 의미도 갖는다. 이는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을 다시금 확인해주시는 맥락에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창세기 1:28에 나오는 어휘를 사용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prh의 히필, 창 1:28에 준하여 번역하면 ‘생육하게’) 하리니”(창 17:6a);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창 22:17) 태초에 인간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해 다시 계시된다.

 백성의 수효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창 26:4a)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야곱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주셨다: “…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창 32:12)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의 왕국계획에 백성의 수효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세상을 복되게 다스릴 자들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생물과 피조물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에 동참한다(창 1:28; 출 20:10; 23:4-5, 11; 레 25:7; 신 22:1-4, 6-7; 28:4 참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최고의 왕으로 영광을 얻으시고 높임을 받으신다(시 82:1; 96:11-12; 98:7 참조).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받은 생육과 번성의 약속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야곱과 더불어 성취되기 시작한다. 야곱은 두 명의 아내(레아와 라헬)와 두 명의 첩(빌하와 실바)을 통해 열두 아들을 낳는다. 이들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할 열두 지파의 족장이 된다. 야곱의 아들들이 본격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애굽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을 때부터다. 출애굽기 1:7은 애굽에서 야곱의 후손에게 일어난 일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이 구절은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창세기 1:28에 사용된 표현 세 가지가 나타난다: ‘생육하다’(pārāh), ‘번성하다’(rābāh), ‘가득하다’(mālē’, 창세기 1:28에 준하여 번역하면 ‘충만하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말은 ‘불어나다’(šāraş)이다. 이 말은 창세기 1:20-21에서 물에 군집하는 생물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수적 증가를 창세기 1장과 연결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창조시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 자손의 수적 증가를 통해 성취된다. 창조시에 의도된 하나님의 왕국계획은 이스라엘 왕국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역사적 실체로 확고한 모습을 드러낸다.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 시대를 묘사하면서 족장들이 받은 약속을 상기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왕상 4:20) 인구의 증가를 나타내는 비유로 바닷가의 모래가 언급된 경우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창 22:17; 32:12). 솔로몬 시대는 족장들의 약속이 성취된 시대이다. 구약에는 솔로몬 시대에 하나님의 왕국계획이 가장 영광스럽게 성취되었다. 솔로몬이 누린 권세와 부귀와 영광은 그 시대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뚜렷이 증거한다.

하지만 솔로몬 시대는 영원하지 않았다. 솔로몬 시대는 왕국의 분열과 멸망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가져온 타락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아 홍수가 그랬던 것같이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하나님의 왕국계획에 지장을 초래한 것처럼 보인다. 이사야의 예언은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의 약속이 한때의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인상을 준다: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사 48:18-19) 하지만 불행한 결말은 실상 하나님의 왕국계획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이 그것을 암시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시대를 내다보며 특별한 예언을 덧붙인다: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호 1:10[MT 2:1])

호세아의 예언에서 모래알같이 많아질 이스라엘 자손의 수는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자들도 포함한다. 호세아서의 문맥에서 이들은 바알숭배를 일삼던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킬 수 있다. 하지만 호세아의 예언은 그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바울은 호세아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의 수에 합류할 이방인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롬 9:25-26).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혈통과 민족의 장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백성이 대규모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오순절에 세계 각처에서 온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행 2:5-13), 그들 가운데 삼천 명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 2:41). 그 외에도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나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 11:24)와 같은 표현은 그 옛날 족장들이 받은 후손의 약속, 더 거슬러 올라가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육과 번성과 충만의 복이 성취되는 것을 증언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전적인 순종과 충성을 받칠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이 생겨난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