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섬기며] 계란 한 알이 날아오르기까지_박종훈 목사

0
55

계란 한 알이 날아오르기까지

받기만 하고 주기를 멈춘다면 우리 모두의 불행으로 이어질 것

 

박종훈 목사(궁산교회)

여러 개의 알을 넣었지만 겨우 한 마리의 병아리를 부화시킨 암탉은 지극정성으로 양육하여 독립시킨 어미닭의 위대함을 지켜보았다. 마당 귀퉁이에 닭장을 짓고 처음에는 청계 한 쌍과 양계 암탉 두 마리를 들여놓았다. 청계 계란이 좋다는 말을 듣고 입식했는데 청계 수탉이 시도 때도 없이 우는 바람에 이웃에 피해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식용으로 처리하였다.

양계와 달리 청계는 몸집이 작지만 알을 잘 낳고 번식 본능이 강한 것을 발견했다.
일반 암탉은 알을 낳고 무관심하지만 청계는 알을 달라는 특유의 소리를 하면서 여성의 상상임신처럼 빈 둥지를 며칠이고 품고 있었다. 다른 암탉들도 알을 낳아야 하는데 청계가 자리 잡고 있자 똥 마려운 아이처럼 안절부절 하므로 청계를 강제로 쫓아내곤 했었다. 하지만 후손을 남기려는 가장 강한 모성애 본능이 나를 감동시켰다.

알을 부화 시키려면 수탉이 필요해서 시장에서 일반 수탉을 사 왔지만 텃세가 유독 심한 닭들 사회에서 적응하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덩치는 수탉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암탉들은 후배인 수탉을 상대하지도 않고 지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필자는 교미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손이 귀한 집안에 잉태를 기다리는 시어머니처럼 늘 닭장을 살펴보지만 짝짓기의 장면은 먼 나라 이야기 마냥 기미가 없었다. 빨리 유정란을 먹고 싶은 마음에 수탉을 바꾸고자 처음 사 올 때 구입한 오일장 장날에 나갔다. 남자구실을 못한다고 하자 여자 사장님이 웃으면서 그럴 리 없다고 하며 좀 더 기다려보자고 하여 다시 가져왔다. 그리고 얼마 지난 후 양계 암탉을 눌러주는 바라던 현장을 목격했다.

이미 한두 개씩 낳아놓은 계란도 유정란이라 판단하고 12개를 둥지에 넣어 주었다. 청계는 물을 만난 개구리처럼 그날부터 알을 품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먹이를 주면 기를 쓰며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사납게 달려들며 치열한 먹이 다툼을 했던 닭이었지만, 일단 알을 품고 있을 때는 오직 그 일만 전념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겨우 생명을 이어가는 사료와 물을 마시는 순간에만 내려오고 그 외에는 거의 단식 수준이었다.. 날마다 낳은 계란도 낳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사료를 먹지 않으면 계란을 낳지 않는 자연의 순리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어느덧 삼 주가 지난날 반가운 생명의 소리가 가냘프게 들려왔다.

앙증스러운 병아리 한 마리가 어미 품에서 나와 첫 대면을 했던 순간은 짜릿한 감격이었다. 다른 알들은 이미 골아 버려 내던지자 펑 하며 터져버렸다. 수탉의 씨가 없는 무정란 알은 오히려 먹을 수 없는 길가에 버려진 소금과 같은 꼴이 된 것이다.

삼십여 년 간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알고 깨닫는 것은 애초에 하나님의 씨가 없는 자는 아무리 암탉처럼 품어도 결국 새 생명이 없는 썩어버린 계란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관계는 잠깐이요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가는 것을 많이 경험해왔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처럼 영적 소경들이었다.

청계는 단 한 마리의 병아리이지만 최선을 다하여 양육하고 있었다. 토끼들과 다른 닭들이 한 우리 속에 있어 단 한순간도 한눈 팔지 않고 계속 소통하며 키운다. 병아리와 어미가 서로 부르는 소리가 있다. 그 소리를 듣다 보면 마치 휴대폰의 무선이 기지국과 소통하는 것과 같았다.

잠 잘 때 어미 품속에 있을 때만 제외하고는 몇 초 간격으로 소리로 오고 가며 장단을 맞추었다. 그 속에서도 몇 가지 언어가 들어있다. 평상시의 소리와 더불어 모이를 발견할 때의 소리와 위험할 때의 소리가 분명히 다르게 들렸다. 성경 말씀에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데 끊임없이 소통하는 암탉과 병아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과 자녀들의 관계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어미닭은 온 힘을 다해 일관되게 한 마리의 병아리를 키우고 있었다. 저녁에는 낮은 둥지로 들어가 병아리를 온몸으로 품으며 전신 갑주를 입은 병사처럼 완벽하게 보호하면서 후손을 키우는 행복을 맘껏 누리고 있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자녀를 키우는 순간은 늘 희로애락이 교차되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가 행복임을 나중에야 느낀다.

거저 받았기에 거저 주라는 말씀은 보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육체와 영혼을 낳고 키우는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면 또 다른 후손을 위해 기쁨으로 희생하며 후손을 남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순리이다. 받기만 하고 주기를 멈춘다면 우리 모두의 불행으로 이어질 것이다.

암탉의 병아리 양육은 마지막 한 가지 과정이 남아 있다. 닭들은 평상시 횃대에 올라가서 잠을 자지만 암탉은 병아리를 키우는 동안에는 바닥에서 병아리를 품고 저녁을 지냈다. 본능적으로 바닥은 위험을 느끼지만 날개 없는 병아리를 위해서는 눈높이를 낮춰야 했다. 조금 자라자 암탉이 횃대에 먼저 올라가서 아기를 부르자 병아리는 가냘픈 날갯짓으로 오르려 하지만 몇 번의 실패를 한다. 암탉은 할 수 없이 바닥에 내려와서 품고 잠을 청한다.

며칠 후 드디어 병아리가 몇 번의 시도 끝에 어미닭이 머무는 횃대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그 후로 암탉이 병아리를 부르며 소통하는 소리도 멈추었다. 독립시키면서 암탉의 역할은 마친 것이다. 비록 다른 암탉이 낳은 알을 부화시키며 한마리만 키우는 암탉이지만 여러 마리를 돌보는 보통 어미닭처럼 끝까지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암탉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본능이 있었기에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지금까지 이어왔음을 생각하니 생명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