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거룩한 길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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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길로 가자

인생길이란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이고 평가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길을 가라고 하셨다. ‘거룩한 길(The way of Holiness)’은 어떤 길인가. 하나님이 마련하신 그 길을 갈 자는 깨끗한 자, 구속 받은 자이며 하나님을 알아 우매하지 않아야 한다(사 35:8). 거룩한 길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사는 인생길이다.

그러면 오늘날 진정 구원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신자들은 잠재적 신앙고백자의 자리에서 완성된 신앙고백자로서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들이다. 당연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2)는 말씀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이 는 권면이나 부탁이 아닌 명백히 생명의 새 계명이다.

이 단계에서 심각한 오류가 우리 제도권 전반에 퍼져 있어 매우 안타깝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산다’는 의미에 대한 제 멋대로의 해석과 설교가 난무한다. 사람이 참 구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자기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민망하실 수밖에 없는 빗나간 신앙적 열정들이 주류 신앙인양 행세하고 있다.

마치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고 하신 상황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고의성 여부를 떠나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을, 인간의 더러운 인본주의 종교성으로 변질시켜 버리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주류 행세를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천국백성의 생활강령을 가르치시던 산상수훈에서부터 이미 경고하신 중요 사안이다.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라고 하신 것이다. 왜 그런 상황이 전개되는가에 대해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마 7:15)라고 선언해 주셨다.

오늘의 어두운 시대에 각별한 각오로 기꺼이 남은 자로서 사는 기독 지성인이라면 다시 확인해 둬야 할 것이 있다. 몇 가지 중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지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라고 하신 말씀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주의 일’이란 무엇인가.

이 사활적인 문제 앞에서 두루뭉술하고 모호하기 짝이 없는 가르침으로 다수가 지금도 목자 없는 양이 되어 고생하며 유리하기에 천상의 예수님께서 민망해하시는 것 아닌가. 주의 일의 핵심은 ‘사람들의 나라’에 반대되는 ‘하나님 나라’를 정확하게 구현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초지일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통치를 영생의 양식으로 섭취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통치란, 어쩌다 한 번 기독교적 감정을 불태워 소위 선한 행위를 해 내는 인본주의 도덕성 발휘를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통치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교회적으로 통치하신다. 주의 일의 핵심, 곧 하나님의 교회적 통치란 반드시 과거, 현재, 미래까지 연결되는 진리의 광맥 위에서의 매우 경건하고 품격 넘치는 생활방식이다. 거기엔 육신의 양식과 비교조차 못할 영혼의 양식인 ‘진리의 지식체계’가 있다. 온갖 미신으로 오염된 인간적 종교성을 걸러내는 ‘정제된 감정표출’이 있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하는 ‘올바른 예배생활’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구속사는 각자도생이 아닌 교회 공동체가 무대이다. 성경 해석의 전체성과 통일성도 성령께서 그것을 수단과 방법 삼아 구원을 베푸시는 법이므로, 그 결과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이 거룩한 일이 이뤄져야 한다.  이미 개혁주의 신앙과 전통을 계승해 나가는 합신 교단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이 거룩한 길을 아름답게 걸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