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뜨락] 기도해야 주지_김금희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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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해야 주지

김금희 집사(세계로교회)

혼란의 시대에 더욱 선명해야 할 삶의 목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함

“기도해야 주지!”
다섯 살 꼬맹이가 옹알이 같이 종알거린 이 말이 최근 시도 때도 없이 귀에 맴돈다. 지난겨울 성탄절이 지나고 며칠 후 손자를 어린이집에 등원시켜주는 길이었다. 내 차를 타자마자 성탄절에 선물 받은 장난감자동차를 내 얼굴에 들이밀며 자랑을 해댄다.
“할머니 이거보세요. 미니카 멋지지요? 정말로 진짜로 갖고 싶었던 거예요.”
‘진짜로’를 강조하며 밝게 웃는 아이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다.
“우와 멋지네. 누가 줬어?”
“아기 예수님이요.”
발갛게 상기된 아이의 볼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말을 걸었다.
“우리 시엘이 좋겠네. 할머니도 선물 받고 싶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아이가 툭 하는 말.
“기도해야 주지.”
순간 왜 그랬을까 말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너무나 좋아하는 미니카를 갖고 싶다고 가정예배 때마다 매일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가정에서나 대부분 그렇듯 그 기도는 하나님이 아빠의 귀를 통해 들으셨고 성탄절 새벽에 아빠의 신용카드를 도구삼아 준비하신 응답이 거실의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아래 놓여 있었다로 마무리 되는 귀여운 스토리였다. 그런데 아이의 그 말이 요즘 계속 생각이 났다. 기도해야 주지. 기도해야 주지……기도하면 주시잖아……기도하면.
코로나19로 인해 세상이 변했다. 지금까지 경험 못했던 세상이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예배 자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에 극명하다. 방역에 실패한 몇 개의 교회가 비난의 중심에 세워지고, 예배자가 아닌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예배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우리 입장에서 이것은 좀 과하다 싶은 방역지침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처음엔 예배를 제한하고 관여하는 지침에 분노하기도 했었다. 비대면 예배라니, 인원수 제한에 찬양 금지라니, 큰소리 내어 기도하지 말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지침이야 라면서. 그러나 나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 예배자들이 너무도 빠르게 적응해 갔다.
처음엔 컴퓨터 모니터나 휴대폰 앞이어도 어떻게는 경건함을 갖추고 싶어 하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또 다른 형태의 예배라는 수긍을 핑계로 편한 장소에서 편한 모습으로,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아니 힘을 잃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 손자의 그 말이 또 생각났다.
“기도해야 주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차를 돌려 교회에 갔다. 평일 저녁이어서인지 교회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캄캄한 예배당의 조명 스위치를 올리고 늘 앉는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긴급한 어떤 기도제목이 있었던 건 아니다. 손자의 말이 떠올라 그저 요즘 기도하지 못함으로 약간의 찔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잠시 적막함 가운데 앉아 있었다. 내 숨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고요함이 예배당 안에 가득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중얼거렸다.
“아버지 저 왔어요.”
그런데 ‘어, 이게 뭐지?’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니 울음이 솟구쳤다. 한참을 울었다. 그런 내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다.
“왜 안 왔어. 아무도 안 올 때 혼자 와 앉는 너를 보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데 왜 안 왔어. 누가 막지도 않는데 왜 못 왔니.”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 그랬다. 교회에 내려진 방역지침 그 어디에도 혼자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것을 멈추라는. 그러면 안 된다는 조항은 없었다. 새벽에도, 저녁에도, 아무 시간에도 “아버지 저 왔어요.”하며 교회 문을 열던 발길이 나도 모르는 새 멈춰져 있었다. 어떤 의미일까. 반드시 교회에 가서 기도해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니까.
그러나 너무나 행복했던 그 시간들이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무엇을 자제한다는 핑계였을까. 너무도 자연스럽게 예배당을 찾는 발걸음이 줄었다. 당연한 순서처럼 그렇게 기도의 시간이 줄었다. 더 깨어 기도해야 할 때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데. 어느새 ‘방역지침에 협조’라는 말로 위장된 편안함이 나에게 스며들어 있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 나와 하나님,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개혁하는 다짐이 그 날 새롭게 내안에서 일어났다.
혼란의 시대에 더욱 선명해야 할 내 삶의 목적. 유일한 공급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함.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인 성경에서 깨달아 누리게 되는 자유함. 이 모든 것들은 내가 하나님 앞에 앉을 때 비로소 가능했었다. 이것을 기억나게 한 다섯 살 손자의 망치와도 같은 그 말이 너무 고마워 다시 되뇐다.
“할머니, 기도해야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