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계절 특집]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읽기 (3)_이원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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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읽기 (3)

이원평 목사(춘천돋움교회)

*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독후감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본문 인용/ <죄와 벌, 열린책들 간>의 허락을 받음.

범죄 후 라스콜리니코프가 받은 ‘벌’은 자신도 예상치 못한 인간 내면의 벌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리얼리스트다. 그의 리얼리즘은 죄악된 인간 실존의 불안을 적나라하게 해부해 보여주었다. 그가 펜으로 펼친 현실 세계, 그의 펜 끝에서 나온 인간 현실의 비참함과 불안함은 어찌나 사실적이고 극적인지 상상력이 따로 필요없을 정도다! 19세기 중후반의 제정 러시아는 일군의 뛰어난 리얼리즘 작가들을 배출했는데, 후기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중에서도 발군이라 할 수 있다. 그처럼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헤친 인물도 없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주배경은 유럽을 향한 러시아의 창 상트 페테르부르크다. 그러나 작가는 그 도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나 화려함, 고풍스런 건물들의 위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는 시간의 흐름에도 무심하다. <죄와 벌>은 보름 남짓한 시간 속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한 페테르부르크는 “냄새”로 가득한, 불쾌하고 갑갑해서 그저 “벗어나고”만 싶은 도시다. 도시를 채운 사람들의 면면도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지저분하고 썩은 내 진동하는 선술집에서 하릴없이 인생을 때우는 취한들, 취한 여인을 노리는 호색한들, 창녀들과 시정잡배들, 각종 사기꾼들과 시골에서 올라와 도시의 퇴폐적인 분위기에 취해 보려는 사람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다니는 한탕주의자들과 삶의 비참함에 날마다 악다구니를 쓰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몇 몇 인간적이며 선량한 마음을 아직 잃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등장한다. 이들이 찌는 듯한 더위와 냄새로 찌든 페테르부르크에서 그나마 산소통 같은 역할을 해낸다.

그러면 이 도시 속 현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다시 따라가 보자. 도대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페테르부르크의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는지 살펴보자.

라스콜리니코프

우리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푹푹 찌는 도시 속 허름한 건물 꼭대기의 “관” 같은 방에서 등장한다. 그의 거처는 비좁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숨쉬기조차 힘든 탁한 공기에 둘러싸여 있다. 거기서 그가 마시는 것이라곤 혼탁한 공기뿐이다. 그것마저도 자신이 내뱉었던 것을 다시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반복하는 중이다. 형편이 어려워 다니던 법대를 휴학한 그는 이미 오랜 기간 외부의 신선한 공기와 차단된 채 지냈다. 그러니 지금 그의 마음과 정신 상태는 말이 아니다. 꽤나 잘 생긴 그였지만, 지금으로선 그 겉모습마저 꼴사나울 정도가 돼 버렸다. 이러한 형편은 그에게 우울함을 가져다주었고, 우울함은 낙담을, 낙담은 다시 그를 깊은 우울의 수렁 속으로 밀어 넣었다. “우울은 낙담을 낳고, 낙담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절망을 낳고, 절망은 뒤틀린 자기 합리화를 낳고, 그것은 곧 범죄를 잉태했으니…… .” 그의 내면은 불안했으며 겉모습은 누가 봐도 초췌하고 꾀죄죄했다.

‘관’ 같은 방이 답답했던 그는 일어나 관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이 도시는 어디를 가도 탁한 공기만 그에게 내뿜었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불쾌감만 더해주었다. 도시 중심부인 센나야 광장 뒤로는 빈민가가 즐비했으며 대낮에도 술에 절은 사람들이 자주 띄었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당장 외부의 신선한 바람이 필요했다. 아직 젊은 그는 다른 세계의 공기를 마셔야만 했고, 특히 그의 영혼에는 소냐가 읽어줄 제 사복음서의 거룩한 공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라스콜리니코프는 사상범이었다. 그는 당시 등장한 무서운 초인 사상으로 무장해 냉혈한처럼 자기 합리화에 능했다. 그 결과 전당포 노파의 정수리를 도끼로 두 차례나 내리찍고서도 마치 ‘이’ 한 마리 죽인 정도의 느낌으로 자신을 설득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죄를 짓기 전까지, 아니 살인을 저지른 직후까지만 가능했다. 그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 전까지 모든 일이 자기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될 줄로만 알았지만, 갑자기 내면에서 한 음성이 튀어나와 그의 양심을 찔렀다. 이어서 죄책감이라는 끈질긴 불청객이 찾아와 괴롭힐 줄도 몰랐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 부부도 손을 뻗어 그 열매를 먹는 순간 알아버렸다. “이에 그들의 눈이 열려.” 부부는 그 자리에서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죄’를 지은 직후 라스콜리니코프가 받은 ‘벌’은 내면의 벌이다. 이것은 인간 내면에서 벌어지는 예상할 수조차 없는 어떤 뒤틀리고 당혹스런 반응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 찾아와 그토록 자신을 괴롭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람은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어떤 사상으로 자기 무장을 하고 합리화했을 때, 특히 그것을 통해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매우 대담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상범들일수록 비인간적이고 자못 두렵기까지 한 면모를 보인다. 인류 역사에서 윤리와 법을 초월한 초인 폭군들은 그렇게 등장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번 범죄 시도는 개인 차원에서 멈추었지만, 만약 누군가 또는 일단의 무리가 그를 추종했다면 인류 공동체를 어지럽힐 초인으로의 출현도 언제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마르멜라도프

오늘도 마르멜라도프는 술과 안주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 선술집 구석에 걸터앉아 사람들의 조롱어린 시선을 한몸에 안은 채 또 들이키고 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악한 사상의 시궁창에 빠져 범죄를 저질렀다면, 이 사람 마르멜라도프는 가난과 비참이라는 질곡에 빠져 생을 탕진하고 있다. 가난에 매이고 술로 인생을 허비하며 가정에도 무책임한 채 비참하게 살다가 간 그는 죄에 매여 고귀한 삶을 자포자기해 버리는 인간의 전형이다. 그러나 마르멜라도프는 가슴 아픈 한 인생을 살다 갔어도 죽음을 통해서는 놀라운 반전을 가져왔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생명의 은인이 되어 주었는데, 이는 그가 바로 소냐 마르멜라도바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이 사람 마르멜라도프는 끝간 데 없이 비참하면서도 동시에 한없는 연민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묘하디 묘한 캐릭터다! 우리에게도 그런 면모가 어느 정도 있어서일까?

<죄와 벌>에서 이 남자 둘은 참으로 묘한 대칭을 이룬다. 특히 구원의 매개자로 등장하는 소냐를 중심에 두고 볼 때 더욱 두드러진 대비를 보인다. 마르멜라도프는 비루했지만 거룩한 소냐의 아버지였다. 소냐는 뒤틀린 삶과 사상의 나락에 빠져 있던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전적인 사랑과 호의를 베풀었다. 소냐는 그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었다.

비참하고 방탕한 마르멜라도프, 그가 거룩하고 헌신적인 소냐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사실 스캔들이다! 앳된 소녀 소냐가 창녀가 된 일도 충격적이다! 무엇보다 약하고 멸시받는 창녀가 도도하게 머리를 들고 있는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의 길로 이끌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커다란 스캔들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스캔들 자체셨다! 그분은 약했고 멸시받았으며 낮았다. 십자가에 달린 그분은 공히 강자들과 약자들의 유일한 구원자셨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의 말을 듣고 살아났듯이, 누구라도 그분의 말씀만 들으면 다 살아날 수 있다!

두 모녀와 라주미힌

실로 오랜만에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머니와 누이 동생이 멀리 시골집에서 올라왔다. 그러나 아들과 오빠인 그가 어머니와 누이를 상봉한 그날은 세 사람 모두에게 큰 실망과 불안만 더해주었다. 그를 본 어머니는 회한의 눈물을 흘렸고, 무심한 오빠를 본 두냐는 분노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대학 친구였던 라주미힌이 끼어들었다. 그는 두 모녀의 소망이 사그러지지 않도록 불씨가 돼 주었다. 라주미힌이라는 불씨는 그렇게 비극 속에서 희극을 품은 만남을 만들어냈다.

이들의, 특히 두냐와 라주미힌의 운명과도 같은 만남은 우리 삶에 항상 나란히 흐르는 두 선율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것은 우리 위에서 그리고 우리 아래서 늘 흐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 때가 다반사다. 그러나 비극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희극의 선율은 항상 우리 삶 가운데로 늘 흐르고 있다. 다만 우리가 듣거나 보지 못할 뿐! 그래서 눈에 보이는 가족과 친구, 이웃된 우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흐르는 삶의 선율 속으로 뛰어들어 희극의 물방울을 튕겨 피부로 느끼게 해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토록 비참하고 죄많은 우리에게 보내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죽어가던 시인 존 던이 외쳤던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섬이 아니다.” 때론 그는 수면 위로 솟아난 섬 마냥 외롭고 쓸쓸해 보일 수 있다. 누군가는 홀로 착각하며 도도하게 살아갈 수는 있다. 그래도 그 아래로는 모두 연대해 있는 대륙이다. 인류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가족과 친구가 공급해 주는 공기를 마셔야만 했다. 그가 ‘관’에서 나왔을 때, 눈을 자신에서 외부로 돌렸을 때 자신이 타인과 매여져 있는 한 인류임을 보아야만 했다. 노파를 도끼로 두 번 내리치기 전에 마땅히 그랬어야 했지만, 그는 그 일에 실패했다! 우리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만남을 주신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따라서 우리는 타인과의 만남이 끊어진 삶이야말로 불행하고 취약하며 위험하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과의 만남이 그러할진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얼마나 더 값지고 고귀할까? 만약 우리 삶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할까?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진정한 생명의 시작이 되어 우리 아래를 항시 흐르는 저 비극의 선율 위로 끊이지 않는 기쁨의 선율이 이어지도록 해준다.

소냐

“이때 방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수줍게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어떤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녀를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소피야 세묘노브나 마르멜라도바였다…… 그녀는 초라하고 심지어는 빈곤해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소녀처럼 앳되고 또렷한 얼굴에 약간은 놀란 표정을 짓고,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고 조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허술한 평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낡고 유행에 뒤떨어진 모자를 쓰고…… .”

드디어 소냐가 이 가족 앞에 등장했다.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방에 있던 라스콜리니코프와 모녀는 매우 놀랐다! 그럴 수밖에. 저토록 청순하고 여린 십대 소녀가 거리의 여자라니! 너무도 가슴 아프고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나 그 방에 있던 몰락한 초인이나 혼란에 빠진 모녀나 사창가로 내몰린 십대 소녀나 아프고 슬프긴 매한가지였다! 두 모녀는 그녀의 행실이 안 좋다는 소문을 벌써 들었었다. 그런데 그 창녀가 이토록 착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이 소설에서 소냐가 입은 옷과 꾸민 화장은 그녀의 처지와 인격을 판단함에 있어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그 무엇으로 묘사되어 있다. 분명 어젯밤 소냐의 옷차림은 한눈에 보아도 밤의 여인, 거리의 여인의 그것이었다. 비록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 굽 높은 구두와 양산, 가슴 패인 야한 드레스가 그녀에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모두가 보기에 소냐는 창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문을 열고 세 사람 앞에 들어선 소냐는 누가 봐도 순진무구한 십대의 소녀다! 단지 밤의 옷을 벗고 평상복을 입었을 뿐인데.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옷가지는 인격의 연장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때로 입은 옷으로 형편과 사람 됨됨이까지 판단 받으며 힘겹게 살아간다. 부한 이들은 대충 입어도 좋은 옷이라, 무시까지는 안 당한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옷은 인격과 처지를 대변해 주는 그 무엇이 된다. 서글프지만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고, 뭐 솔직히 다 그렇고 그런 인생이니 속일 필요까지는 없다. 소냐처럼 가난하고 약한 이들은 꾸미되 꾸며지지 않는다! 아니, 꾸민다 해도 어색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약한 창녀 소냐를 들어 구원의 길을 비추는 빛이요 ‘작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롬 13:14).  

<다음호에 마지막 4회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