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목회와 인문학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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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인문학을 생각한다

“한 손엔 성경을 또 한 손엔 신문을” 칼 바르트가 한 걸로 알려진 이 말은 개혁주의 목회자들도 나름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또 신문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성경을 읽고 신문을 많이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상황과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존 스토트는 <현대교회와 설교>에서 설교는 성경과 오늘날이라는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이라 말했다.

두 세계에 다리를 놓으려면 단순히 성경과 사회를 잘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사회 현상을 성경적으로 평가하고 분석하며 도전해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에서 파송된 인도선교사였다. 영국교회가 부흥할 당시 인도로 선교를 나갔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영국교회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뉴비긴은 그 원인을 문화와 사회가 변화되었는데 영국 교회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이전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계몽주의의 물결이 영국을 뒤덮었고, 사람들은 성경과 설교에 대해서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을 더 높은 권위로 두었기 때문에, 말씀을 거부했다. 뉴비긴은 단순히 성경적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먼저 ‘계몽주의 이성의 허망함’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복음을 방해하는 이성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해줄 때 복음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동일하다. 포스트 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문화에서 영향을 받는 문화내러티브의 영향력아래 살고 있다.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려면 문화 내러티브에서 형성된 세계관중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석하고 도전해 주어야 한다.

목회자가 인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세상 속에 있는 문화내러티브를 읽고 평가하고 분석하기 위해서이다. 인문학 속에는 일반은총적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과 호응할 수 있는 긍정적인 부분과 성경과 배치되는 도전해야 하는 부분, 그리고 세례를 주어서 변화시켜야 하는 부분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권위를 쉽게 부정하는 오늘날의 포스트 모던 시대에는 문화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인 방식이 될 것이다.

또 성경과 설교를 좀 더 잘 이해하고 풍성하게 적용하기 위해서도 인문학 공부는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리스도교 교양>에서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언어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지성을 단련시키고 확장해 주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시야를 열어 주기도 한다.

성경을 공부하고 설교를 할 때,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성경을 묵상한다고 내가 모르는 개념이나 주제들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 묵상을 오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성경을 풍성하게 해석하려면 성경묵상과 동시에 해석의 틀을 넓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다양한 주제들을 설교하면서 해석의 틀을 넓혀가려면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독서가 필요하다. 우리가 존경하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은 모두 위대한 인문학도들이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보아도 깊은 신학적 지식과 넓은 인문학적 소양이 돋보인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진공상태에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문화에 대한 이해는 성경의 진리를 훨씬 더 선명하고 날카롭게 해준다. 복음이 복음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 생각 속에 자리 잡은 잘못된 문화내러티브의 모순들을 드러내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 손엔 성경을, 또 한 손엔 신문을 그리고 머리로 고민을” 해야 한다. 성경과 문화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지만 오늘날 복음을 방해하는 문화내러티브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