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교회사 이야기 7] 종교개혁자 칼빈의 회심 이야기_안상혁 교수

0
276

종교개혁자 칼빈의 회심 이야기

안상혁 교수 (합신 역사신학)

 

한 사람을 사역자로 빚으시며 여러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섭리를 이루시는 하나님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은 언제 회심했을까요? 학자들 사이에 칼빈의 회심 시점에 대한 이견이 존재합니다. 이른 시기로는 1527년부터 늦은 시기는 1539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른 회심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개신교 학자인데 비해, 로마 가톨릭 학자들은 늦은 회심설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 가녹치는 1539년경까지 칼빈이 옛 신앙 안에 머무르며 교회개혁을 추진했다고 말합니다. 타바드는 소위 ‘두 단계 회심설’을 주장했습니다. 제1단계 회심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 머무르며 인문주의적 교회개혁자로 활동한 1533-34년경에, 제2단계 회심은 로마와 절연하고 소위 분파주의적 종교개혁가로 변신한 1535년 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개신교와의 교회연합을 지지하면서 소위 ‘젊은 칼빈’ 안에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하나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에는 종교개혁이 곧 분파주의 운동이라는 전제가 뿌리깊이 박혀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진리와 공교회성을 확신했던 칼빈이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입장입니다. 사실 회심 시점에 대한 다양한 이견들이 등장하는 큰 이유는 칼빈이 자신의 회심 시점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칼빈의 회심 시기를 대략 유추할 수 있는 몇몇 문헌 자료가 존재합니다.
일례로 칼빈은 『시편 주석』(1557) 서문에서 자신의 ‘돌연한 회심’을 언급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리하여 참된 경건의 맛과 지식을 어느 정도 얻은 후에 즉시 그 안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강한 욕구로 불타올라 나는 비록 다른 연구를 완전히 그만 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것들을 더 이상 열심히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 보다 더 순수한 교리를 추구하려는 열망을 가진 모든 이들이 일 년이 경과하기도 전에 비록 내 자신은 아직 다만 초보자와 초심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에게 배우기 위해 계속 찾아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고 있었다. … 나의 모든 은거처는 공공 학교처럼 되었다.

칼빈이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시점이 1532년 초입니다. 위의 진술을 근거로 리처드 멀러와 같은 학자는 대략 1530년 말과 1531년 초에 칼빈이 회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칼빈은 회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은밀한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칼빈의 가정, 교육,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환경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특히 칼빈이 만났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볼 때 그의 말을 쉽게 이해하게 됩니다. 베자에 따르면 칼빈을 개혁신앙으로 인도한 초기의 인물은 그의 사촌형 피에르 올리베탕입니다. 올리베탕은 성경을 원문에서 불어로 번역한 프랑스의 초기 종교개혁자였습니다. 올리베탕의 영향으로 칼빈은 미신적인 신앙에서 돌아서 성경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부르주 대학의 볼마르 교수를 만난 것도 중요했습니다. 루터파 신앙을 받아들인 볼마르는 칼빈과 베자에게 헬라어를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칼빈은 파리와 오를레앙에서 공부하는 시절 믿음의 인물들과의 사귐을 지속해 나갔습니다. 그중에는 니콜라 콥과 에티엔 드 라 포르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파리의 부유한 왈도파 상인이었던 에티엔 드 라 포르쥬는 자신의 돈으로 성경을 출판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포하며 종교개혁 신앙을 전파했습니다. 칼빈이 파리에서 살았을 때, 그의 집에 함께 머물며 친밀하게 교제했습니다.

한편 콥은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프랑수와 1세의 주치의였던 기욤(윌리엄) 콥의 아들이었습니다. 유력한 가문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니콜라 콥은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취임연설(1533. 11.1)에서 콥은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파리를 빠져나와 바젤로 도망갑니다. 콥의 연설문 작성에 칼빈이 연루된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칼빈도 파리로부터 도망하여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했습니다. 이듬 해 플래카드 사건을 계기로(Affaire des Placards, 1534.10) 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의 친구 에티엔 드 라 포르쥬는 붙잡혀 화형을 당했고, 칼빈은 해외로 도망쳤습니다.

돌이켜 보면, 일부 학자들이 아직 칼빈의 회심을 운운하는 시기에 이미 ‘젊은 칼빈’은 믿음의 동지들과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부를 상대로 종교개혁 신앙을 위한 목숨을 건 투쟁에 가담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를 떠난 칼빈이 마침내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로 정착하기까지 하나님의 ‘은밀한 인도하심’은 계속되었습니다. 스트라스부르크로 향하던 중 파렐과의 만남을 계기로 제네바에서 사역을 시작한 일,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후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이루어진 소중한 만남들(종교개혁가 부써와 저명한 교육가 슈트룸, 그리고 칼빈의 아내가 된 이들래트와의 만남), 그리고 다시 돌아온 칼빈을 위해 좋은 동역자가 되어 준 제네바 목사회의 신실한 사역자들과의 만남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칼빈의 생애를 살펴볼 때 우리는 한 사람을 회심시켜 훌륭한 사역자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만남도 (아는 사람과의 일상적 만남이든 혹 모르는 사람과의 새로운 만남이든) 분명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