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향기 6] 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2_김진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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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과 하나님의 나라 2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하나님은 율법으로 백성을 통치하시는 왕, 이스라엘은 그를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나라

구약신앙을 특징짓는 언약(covenant)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약관계를 규정하는 조항들이다. 이 조항은 언약을 맺은 당사자들이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기능을 한다. 히타이트 종주권 조약의 경우는 히타이트 대왕에 대한 소군주의 의무와 책임이 강조된다. 형식상 이와 비슷한 구약의 언약, 특히 시내산 언약과 그것의 갱신 내지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모압 언약(신명기)과 세겜 언약(여호수아 24) 역시 하늘의 대왕이신 여호와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한다. 출애굽기의 십계명(20:1-17)과 “언약의 책”(20:22-23:33), 더 나아가 신명기의 율법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백성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들을 규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약의 규정들은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통치수단임과 동시에 여호와께서 율법으로 백성을 통치하시는 “왕”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준다. 법률체계를 가진 모든 나라들이 그러하듯 구약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림 받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여기서 저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The Code of Hammurabi)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법전은 기원전 18세기 고대 바빌로니아의 강력한 통치자 함무라비(Hammurabi, 1792-1750 B.C.)와 관련된다. 그것은 모두 282개의 법조항을 포함하는 비교적 큰 법전이다. 함무라비의 통치가 얼마나 이 법전에 충실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대체로 이 법전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함무라비 법전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내용은 법전의 도입부(prologue)와 종결부(epilogue)이다. 다음은 그 중 일부를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도입부: “마르둑(Marduk, 바빌론의 주신)이 나(함무라비)에게 사명을 주시어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고 이 땅을 다스리도록 하셨을 때, 나는 이 땅의 언어로 법과 정의를 확립함으로써 백성의 안녕을 증진시켰다.”

종결부: “나(함무라비)는 나의 보배로운 말을 내 기념비에 기록하였고, 정의의 왕(king of justice)인 나의 조각상 앞에 세워 이 땅의 법을 집행하며, 이 땅의 규례를 규정하며, 억압받는 자들에게 정의를 베풀도록 하였다.”

위의 내용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함무라비는 비록 마르둑 신의 사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법과 정의를 확립하고 법을 기록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선전한다. 한마디로 함무라비는 자기가 직접 만든 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통치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구약의 율법은 이것과 전혀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모세라는 중요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모세는 그 지도자적 탁월성에 있어서 함무라비를 능가했으면 능가했지 모자라는 인물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베푸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모세의 역할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중개자”(intermediary) 혹은 “중보자”(mediator)의 역할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직접 법률을 제정하시고 그들에게 직접 율법을 베푸신 분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다. 아이크로트(W. Eichrodt)가 잘 설명한 것처럼, “전체 율법을 하나님과 관련지우는 힘”이 바로 구약 율법의 특징이다. 출애굽기 32:16이나 34:28은 하나님께서 친히 “열 가지 말씀”(ʻaśĕrĕt hăddebārîm) 곧 십계명을 돌 판에 쓰셨다고 알려준다. 그 외에도 출애굽기의 소위 “언약의 책”(20:22-23:33)이나 레위기의 제사법(1-10장)과 정결법(11-15장) 및 대속죄일에 관한 법(16장)과 성결법전(Holiness Code, 17-27장), 그리고 신명기의 수많은 율법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 주신 것이다(신 1:3 참조).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율법에 따라 백성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을 왕으로 모신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임을 분명하게 확인해준다.

구약에서 왕의 중요한 역할은 재판이다(잠 29:14; 사 33:22 참조). 왕은 올바른 재판을 통해 시비를 가리고 죄인에게 벌을 주며 무죄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치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일이 잘 이뤄질 때 나라에 평화가 임한다. 따라서 “재판”은 “통치”(regieren)나 “지배”(herrschen)와 같다. 구약에서 “재판”의 의미를 가진 말은 주로 “샤팟”(šāfăṭ)이나 “딘”(dîn)과 관련된다. 슐츠(R. Schultz)의 분석에 의하면, 동사 “샤팟”이 구약에서 202회 사용되며 이 가운데 대략 40 퍼센트가 하나님을 주어로 갖는다. 또한 이 단어가 분사 “쇼펫”(šôfēṭ)으로서 “재판관”인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9회이며(창 18:25; 삿 11:27; 시 7:11; 50:6; 75:7; 94:2; 욥 9:15; 23:7; 사 33:22), 명사형 “셰펫”(šĕfĕṭ,)과 “셔폿”(šefôṭ)은 각각 16회(출 6:6; 7:4; 12:12; 민 33:4; 대상 24:24; 겔 5:10, 15; 11:9; 14:21; 16:41; 25:11; 28:22, 26; 30:14, 19; 잠 19:29)와 2회(대하 20:9; 겔 23:10) 사용되어 하나님의 “판결행위”(act of judgment)를 나타낸다.

의미상으로 “샤팟”과 거의 동일하게 사용되는 “딘”(dîn)의 용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원래 정확히 재판에서 권위 있고 구속력 있는 판결을 표현한다.” 리드케(G. Liedke)는 여호와의 판결을 표현하는 동사로 사용된 19구절을 소개한다: 창15:14; 30:6; 신 32:36; 삼상 2:10; 24:16; 시 7:9; 9:5, 9; 50:4; 54:3; 68:6; 76:9; 96:10; 110:6(?); 135:14; 140:13; 욥 19:29; 36:17; 사 3:13.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까지 판결하시는 분으로 언급된다. “딘”에서 나온 명사 “다얀”(dăyyān)은 궁핍한 자 및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시는 “신적 재판관”(divine judge)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삼상 24:15; 시 68:5). 결국 “샤팟”이나 “딘”의 다양한 용례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보여주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