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교회사 이야기 (2)] 아우구스티누스, 가면을 벗어 버리다_안상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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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가면을 벗어 버리다

안상혁 교수(합신, 역사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라는 단어로 초대 교회사를 ‘은혜롭게’ 요약 정리한 교부였다

무성 영화 시기에 활약한 배우이자 코미디언이며 영화감독인 찰리 채플린을 기억하실 겁니다. 1915년 무렵부터 그의 인기는 미국 전역을 강타했습니다. 심지어 찰리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 (Charlie Chaplin Look Alike Contest) 라는 것이 크게 유행했을 정도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샌 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이 대회에 채플린 자신이 출전한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신분을 숨기고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최종 승자로 수상하는 자리에서 “제가 진짜 채플린입니다!”라고 말할 계획을 가지고 출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재미있어 할까?’ 청중의 놀란 얼굴들을 상상하며 아마도 채플린은 무척이나 즐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웬일입니까? 채플린은 최종 결승에 오르지 못한 채 탈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의 전기 작가였던 조이스 밀턴에 따르면 이 웃지 못 할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합니다. 결국 대회에서 사람들이 상상한 채플린의 모습은 당사자도 완벽히 흉내 낼 수 없었던 또 다른 채플린의 소위 ‘만들어진 이미지’였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채플린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과연 무엇이 나의 진짜 모습일까?’ 교회 안에서는 거룩함과 친절함의 이미지로 인정받는 신앙인마저도 일상의 삶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탐욕스러운 본능적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가식적인 모습에 스스로 구역질을 느끼며 신앙생활에 회의를 품기도 합니다. 만일 이 질문을 좀 더 근본적이고 영적인 영역, 곧 하나님과의 관계로 적용시키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과연 나는 진짜 나의 모습일까 아니면 ‘가면’을 쓴 포장된 모습의 나일까?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이러한 고민에 빠졌던 인물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의 한 부분에서 그는 ‘가면’을 벗은 민낯으로,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아로 서게 된 극적인 체험을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친구들과 함께 남의 집 정원에 심겨진 배나무의 열매를 서리했던 사건을 회상합니다. 도둑질이 나쁜 것임을 알았고 또 먹을 것을 훔쳐야 할 만큼 굶주리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아직 배가 익지도 않았음에도 과일을 도둑질했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이러한 행위가 금지된 범죄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자체를 즐겼다고 말합니다. 죄이기 때문에 더욱 죄를 즐기는 모습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죄성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크게 탄식합니다. 이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감각하고, 진솔하게 고백하는 죄인의 깊은 탄식 속에서 뜻밖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어느 늦은 밤 나를 포함한 한 떼의 젊은 불량배들이 그 배나무를 흔들어 거기 달려 있는 배를 모두 도둑질 해갔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배들을 훔친 것은 먹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먹기는커녕 모든 배들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습니다. 단지 몇 개만 맛을 보았을 뿐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우리를 더욱 더 기쁘게 했던 이유는 이 일이 바로 금지된 행동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본 모습이었습니다! 오, 하나님! 이것이 바로 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저에게도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 날의 사건을 기억하면서 “나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라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고백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찾았습니다. 이러한 평안과 자유는 사죄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동안 쓰고 살았던 모든 종류의 가면들 훌훌 벗어던져버렸습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연극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가면을 쓰고 내가 아닌 가짜 인생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존재를 용서하고 그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 라는 단어로 초대 교회사를 ‘은혜롭게’ 요약 정리한 교부가 되었습니다. 먼 훗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은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재발견됩니다. ‘오직 은혜’가 종교개혁 시대를 특징짓는 구호가 되기 벌써 오래 전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새로운 시대에 드넓은 은혜의 바다를 항해할 종교개혁의 함선을 건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