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다_박종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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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다(막 4:35-41)

박종일 목사(수원노회)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 4:37)

καὶ γίνεται λαῖλαψ μεγάλη ἀνέμου καὶ τὰ κύματα ἐπέβαλλεν εἰς τὸ πλοῖον, ὥστε ἤδη γεμίζεσθαι τὸ πλοῖον. (BGT)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배에 앉으신 채 해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4:1-2). 그 가르침은 저물 때가 되어서야 끝났고, 예수님은 배에 계신 채 제자들에게 저편(반대편)으로 건너갈 것을 요구하셨습니다(막4:35-36).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저편, 곧 바다 건너편은 거라사인의 지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정은 쉴 틈 없는 빡빡한 일정으로 채워지고 있음을 봅니다. 복음을 위해 불철주야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오늘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역자들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배가 출발하자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베개(τὸ προσκεφάλαιον 토 프로스케팔라이온)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를 둔 것은 그 베개가 그 배 안에 있는 유일한 베개이며, 예수님은 그 베개를 의지해 깊은 잠에 빠지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깊은 잠에 빠진 이유는 낮 동안 내내 무리들을 가르치신 연고로 인해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과는 대조적으로 이미 큰 광풍은 큰 물결을 일으켜 물결이 거칠게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4:37). 제자들은 예수님을 급하게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면서 “주여”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반해 마가는 “선생님이여”(διδάσκαλε 디다스칼레)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용어의 차이는 마가가 본문의 상황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다급한 외침은 진정 그들이 예수가 누구이신지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같은 마가의 표현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구주와 죄인의 관계가 아닌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이 무례하게 예수를 대한 사실에 간접적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깨어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즉시로 바람이 그치고 뛰놀던 바다는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아주 잔잔하여지더라”(ἐγένετο γαλήνη μεγάλη 에게네토 갈레네 메갈레)는 ‘큰 잠잠함이 형성되었다’는 의미로 마치 언제 풍랑이 있었느냐는 듯이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뤄졌음을 시사합니다. 실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을 한껏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이 자연을 지배하시고 곤궁에서 구원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사74:13, 14;107:28, 29 등).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삼위일체 중 성자 하나님으로 그 능력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상황을 평정하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40).

공동체든 개인이든 위기에 처하면 누구나 당황하고 무서워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시고 있는 분이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인 줄 모르고 있었고 그런 무지함 때문에 진정으로 두려워할 분 대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책망 앞에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기를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습니다. 여기서 두려워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께 대하여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에 대한 놀라움, 곧 일종의 종교적 경외감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실로 ‘두려워한다’는 것은 예수의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과 일치시켰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대하듯이 예수를 대하는 제자들의 심적 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 표현이 다음에 나오는 반문하는 형식의 문구입니다. 즉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하는 질문을 함으로써 이 글을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당신에게 누구(어떤 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