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특강] 성탄의 의미_이승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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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의미

이승구 교수(합신, 조직신학)

 

성육신은 예수님의 생애, 가르치심, 수난, 죽으심, 부활, 승천 등 구속 역사의 한 시작점이다

기독교회는 성육신이라는 역사성에 근거해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해마다 성탄 카드를 쓰면서 “성탄의 큰 의미로 가득한 성탄이 되시기를” 기원하는 문구를 넣는 습관이 있다. 오랫동안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성탄 맞음에서 성탄의 큰 의미가 퇴색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백화점의 진열대(show-window)에 먼저 찾아오는 성탄은 과연 성탄의 큰 의미로 가득한 것일까? 교회들마다 행사로서 진행하는 성탄 축하 행사는 과연 성탄의 큰 의미로 가득한 것일까? 구세군의 자선냄비로부터 시작하여 일 년에 한 번씩 연말연시에 즈음하여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는 일은 과연 성탄의 큰 의미로 가득한 것일까? 우리는 이에 답하기 전에 과연 성탄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성탄은 기본적으로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구속 사역을 위해 당신님께서 영원부터 가지고 계신 신성 외에 또 인간성을 취하시어 신인(神人, the God-man)의 독특한 존재로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것을 기념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정확히 언제 탄생하셨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정확히 12월 25일에 탄생하셨기 때문에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이점을 유념하고 모든 사람에게 정확히 가르치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12월 25일에 성탄을 기념하기도 했고, 1월 6일에 기념하기도 했다가, 점차 서방 교회 안에서 12월 25일에 성탄을 기념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므로 12월 25일은 정확히 그날 주께서 탄생하신 것으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신약 시대의 성도들과 함께 보편적으로 우리 주 예수의 나심과 성육신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의 핵심은 주 예수께서 왜 성육신 하셨느냐는 것에 모아진다.(한국 교회에서 이점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다. 이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먼저 강조해야 할 일은 성육신의 역사성(historicity)이다. 비록 12월 25일과 연관시켜서는 안 되지만,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신 일은 시간과 공간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이고, 그 일을 그 모친 마리아가 기억하고 마음에 두고 있다가(눅 2:19 참조), 필요한 때에 그 경위를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여 주고, 하나님께서는 마태와 누가로 하여금 그 전하여 들은 사실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성탄과 성육신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천사들의 이른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눅 2:10) 자신들이 경험한대로 전하여준 목자들도 당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의 역사성을 전달하는데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문제는 주께서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일정한 기간 동안 우리가 사는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신 일이 발생했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항상 이 역사적 사건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이 역사성에 근거해서 복음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동정녀 탄생으로 이루어진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마태공동체와 누가공동체만이 받아들이던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온 세상의 기독교가 이 동정녀 탄생으로 이루어진 성육신의 역사적 사실 위에 세워져 있다고 선언해야만 할 것이다. 이 사실이 부인되면 사실 진정한 기독교회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동정녀 탄생에 의한 성육신 없는 기독교를 말하는 이들이 많아 졌고, 예수 자신은 그렇게 의식하고 언명하지 않았다가 후에 그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이 생겨지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어느 정도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인양 나타나기도 하는 이상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시대야말로 동정녀 탄생에 의한 성육신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성육신이 시공간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임을 성탄을 기회로 하여 온 세상에 선포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경배하고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서도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그러나 시공간 안으로 들어오셔도 그 제한을 받지 않을 실 수 있는 분이심(extra humanum, extra Calvinisticum)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한다. 그는 시공간에 대하여 내재와 초월을 동시에 가지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역사적인 성육신은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전통적으로 기독교회는 이 일이 인간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즉, 성육신은 구속 사건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다. 이는 인간의 죄가 없었어도 성육신이 일어났었겠는가에 대한 모든 사변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이런 사변을 하는 오시안더(Osiander)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아끼지 않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해당 부분을 보라. 우리 주께서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의 사변과는 달리, 주님의 성육신에서 구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육신이라는 구속자의 오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생애, 가르치심, 수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신약 교회에 성령을 부어 주시고, 지금도 이루어 가시는 구속 역사(historia salutis)의 한 시작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육신 하신 일이 있어야 그가 사시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셔서 온전한 의를 이루시고, 우리를 위해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아 주시어 구속의 일을 이루시고, 부활한 몸으로 하늘에 오르시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의 영적인 몸인 교회를 세워 구속 사역을 계속하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시고, 진행시켜 나가시는 일의 기초가 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성육신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로 칩입하여 올 수 없는 것이다. 성육신 하신 성자가 계셔야 그가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의를 보여주시고, 그 의를 가르쳐 주시며, 그 의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통해서 우리로 그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시고, 이 땅에서 이미 그 나라 백성으로서 살며 이 땅에서 진행하고 성장하며 충만해 가는 그 나라의 극치를 대망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성탄의 의미이다.
우리는 여기에 그가 인간성을 취하셔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일과 관련해서 우리 선배들의 생각을 참조하여 두 가지 생각을 덧붙여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이렇게 그가 인간성을 취하신 것은 인간이 죄를 지었으므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라는 안셈적인 생각이다(Cur deus homo 참조). 이 안셈의 생각에서 중세적인 요소만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설명을 매우 중요한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죄에 대한 형별을 받으셨다. 이 일을 위해서 그는 인간성을 취하기 위해서 성육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범죄한 인간성(몸과 영혼)이 형벌을 받도록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인간성(사람의 몸과 사람의 영혼)을 취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자신과 많은 사람을 위한 이 형벌을 받을 수 없으므로 무한한 가치를 지니신 성자께서 친히 인간성을 자신에게로 취하셔서 신성과 인성을 지닌 신인(the God-man)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가 인간성을 취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네 인간들의 인간성을 온전히 성화시키어 그 원상을 회복하게 하시므로 이제 그 안에서 구속됨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사는 우리들이 온전한 인간성, 참된 인간성을 드러내며 살 수 있는 형이상학적 기초와 도덕적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해 인간성을 취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우리 그리스도의 십자가구속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염두에 두셨던 그 온전한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취하심이 우리의 온전한 인간성 드러냄의 존재론적 기초이다(은혜).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타내 보이신 온전한 인간성은 우리가 그 뒤를 따라 가야 하고 본받아 가야 하는 윤리적 토대이다(책임).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고(은혜, Gabe), 그 진정한 인간성을 드러내야할 책임을 지닌 것이다(과제, Aufgabe). 이는 구속받은 사람들의 매일의 삶을 규정하는 특성이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구속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온전케 하신 참된 인간성, 참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그 온전한 인간성,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온 세상에 드러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성탄에 즈음해서만이 아니라, 날마다 매순간마다 십자가와 성탄의 빛에서 살아야 한다. 십자가와 성탄을 이렇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성탄에서 기념하는 성육신이 있어야, 십자가의 구속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십자가 구속에 참여해야, 성탄에서 기념하는 인간성을 취하심의 참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부디 매년의 성탄을 이런 성탄의 큰 의미로 충만한 성탄으로 보낼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러면 우리는 성탄에 대해 참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탄 때에 만이 아니고, 날마다를 이런 의미에 충실해서 살아 갈 때 우리는 온전한 기독교의 증인으로 이 땅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승구 지음,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울 : CCP, 2018)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