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강] 임마누엘 예언의 의미 (2)_김진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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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예언의 의미 (2)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이사야 7:14의 아이 이름이 “임마누엘”인 이유는 이 구원이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

지난 호에서 임마누엘 예언의 배후에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의 위협, 아하스로 대표되는 다윗 왕가의 불신앙,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을 감내하시기까지 다윗 왕가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배경에 비추어볼 때 처녀의 잉태와 출산은 분명히 다윗 왕가의 아하스와 유다가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구원받는 일과 관계됩니다. 이는 임마누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과 무관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실 일을 예언합니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임마누엘의 출생에 대한 예언은 먼저, 일차적으로 이사야 시대 다윗 왕가와 유다의 구원과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7장 16절도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여기서 “두 왕의 땅”이란 시리아와 에브라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아이의 출생은 무엇보다 먼저 두 나라의 멸망과 관계됩니다. 이제 가장 어려운 해석의 난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처녀의 잉태와 아이의 출생이 아하스에게 시리아와 에브라임의 멸망을 보증하는 징조가 된다면, 그것이 가리키는 역사적 실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주석가들 사이에 처녀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여기서는 그런 의견들을 다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처녀(히브리어로는 “알마(עלםה)”)가 아이를 낳는 것은 아람과 에브라임의 멸망을 보증하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징표입니다. 다시 말해 “알마”가 잉태하고 출산하는 일 모두가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는 특별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알마”의 잉태와 임마누엘의 출생은 분명히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도 없고 기대조차 하기 힘든, 놀라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나” 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적이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구약에는 기적적인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더러 있습니다. 이삭의 출생, 삼손의 출생, 사무엘의 탄생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다윗 왕가에서, 특히 아하스 시대에 기적적인 탄생의 사건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7:14에서 알마의 잉태와 출산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딸” 또는 “처녀”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였을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셨습니다: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왕하 19:21). 시온이 “딸”로 불리는 경우는 이사야 1:8에서도 발견됩니다: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을 내다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렘 31:4).
물론 이 본문들에 나타나는 “처녀”는 “베툴라”(בחולה)로서 이사야 7:14의 “알마”(עלםה)와 다릅니다. 주석가들은 “알마”는 출산이 가능한 젊은 여자를 가리키며 “베툴라”는 말 그대로 처녀를 가리킨다고 하면서, 둘 사이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베툴라”와 “알마”의 용례가 언제나 명료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잠 30:19; 욜 1:8 참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결혼하기 전의 처녀에 대하여 “알마”와 “베툴라”가 함께 사용된 경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24장에서 이삭과 결혼하기 전의 리브가가 한번은 “알마”(16절)로 또 한 번은 “베툴라”(43절)로 불립니다. 그러므로 단어의 차이에 너무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시온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처녀”나 “딸”로 불리는 구약의 예들을 더 생각해보십시다. 지금 소개드리려고 하는 내용은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침공을 받았을 때 한 말입니다. 그 때 히스기야의 형편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구원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이었습니다. 아하스가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의 공격을 받던 상황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히스기야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사 37:3). 여기에 아이를 해산하는 여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해산은 산고의 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산고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면 이는 산통의 연장을 의미하며 경우에 따라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런 해산의 과정을 은유로 사용하여 앗수르의 침략을 받고 있는 유다의 형편을 묘사합니다. 여인이 아이를 해산하면 이는 곧 유다의 구원과 전쟁의 끝을 의미하며, 해산이 지연되면 이는 전쟁의 지속과 유다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히스기야는 전쟁의 재난 속에 고통당하는 유다의 형편을 해산의 고통 속에 있는 여인으로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환난에서의 구원을 임산부의 해산에 비유하는 방식은 이사야 26:17-18에서도 확인됩니다: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여기서 “바람을 낳았다”는 말은 해산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여인이 잉태하여 산고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구원이 불가능해졌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예들은 이사야 7:14의 해석에 큰 도움을 줍니다. 이 본문은 유다가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에 의해 공격받는 상황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임산부가 산고의 고통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다시 말해 처녀 유다가 산고의 고통속에 있는 여인과 같이 아이의 해산 즉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때 이사야 선지자가 등장하여 아하스에게 시리아와 에브라임의 멸망을 예언하며 그것을 보증하는 징표를 구하라고 합니다. 아하스가 거절하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징조를 선포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러므로 이 말씀은 처녀 유다가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의 공격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을 알리는 비유적 예언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이 “임마누엘”인 이유는 이 구원이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 하시며 다윗 왕가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구원이었습니다.
미가서는 이런 이해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줍니다. 미가 4:10에서 선지자 미가는 유다가 바벨론에서 구원받게 될 것을 잉태한 여인이 해산하는 것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너의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여기서도 유다가 바벨론으로부터 구원받는 일을 딸 시온이 산고 끝에 아이를 낳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 역시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원사건 역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사건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 7:14의 “알마”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란 말씀은 처녀 딸 유다가 시리아-에브라임의 위협에서 구원받을 것에 대한 비유인 것이 분명합니다. “알마”는 시온(또는 유다)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알마”가 낳을 아이의 이름 “임마누엘”은 다윗의 집과 유다가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실상 이런 구원의 사건은 당시 아하스와 유다의 백성들에게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 것만큼이나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기적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구원의 사건은 장차 시리아와 에브라임이 망할 것에 대한 확실한 증표가 될 것이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볼 문제는 과연 그때 아하스가 그런 구원을 경험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역대기가 그때의 기적을 소개합니다. 당시 에브라임은 유다에서 이십 만의 포로를 사로잡아 사마리아로 데려갔습니다(대하 28:7-8).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 오뎃을 통해 그 일에 개입하셨습니다. 오뎃은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군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너희 손에 넘기셨거늘 너희의 노기가 충천하여 살륙하고 이제 너희가 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압제하여 노예로 삼고자 생각하는도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 그런즉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너희의 형제들 중에서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박하였느니라.”

임마누엘의 탄생 배후에 괴로움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선지자의 말은 에브라임 군대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에브라임 군대가 유다의 포로 이십 만을 다시 유다로 돌려보냅니다. 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입니까? 이 일이 역대하 2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7:14은 이 기적적인 구원사건을 알리는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이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본문에는 아하스 당시의 상황에만 국한시키기 어려운, 신비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차일즈(B. S. Childs)와 같은 구약학자는 “신비롭고, 심지어 모호하며 불명확하기까지 한 음조”가 임마누엘 예언을 특징짓는다고 말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영(E. J. Young) 또한 “임마누엘의 출생은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실 이사야 7장의 임마누엘 예언에는 비유의 차원을 넘어서는 요소들, 구체적인 한 인물의 잉태와 출생을 암시하는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한 여인의 잉태와 한 아이의 출생이 너무나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언급됩니다. 거기에다 아이의 성장과 음식에 대한 묘사까지 곁들여집니다. 이는 임마누엘 예언이 아하스 왕 당시의 형편을 지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임마누엘로 상징화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이 임마누엘이라 불리게 될 한 인격적인 존재의 출생 속에서 구체화될 미래의 일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인접 문맥(8:8; 9:6; 11:1-9) 역시 이 해석을 지지 합니다. 이 미래의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아하스와 유다 백성은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에서 구원받는 기적을 통해 “임마누엘의 출생”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임마누엘의 출생”으로 인한 구원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임마누엘을 몸소 구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보다 더 무서운 세력(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을 위해 예수님은 2000년 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임마누엘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임마누엘의 탄생 배후에 괴로움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하스처럼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을 두려워하지 말고, 코로나 19나 기타 교회를 위협하는 세상의 세력을 무서워하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오늘도 교회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