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강] 임마누엘 예언의 의미 (1)_김진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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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예언의 의미 (1)

김진수 교수(합신, 구약신학)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또 다시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연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일이었으며, 오래 전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일입니다. 특히 이시야 선지자의 예언이 중요합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일을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는 예언이 그것입니다. 신약의 마태 사도는 이사야의 이 예언이 응하여 예수님이 탄생하셨다고 밝힙니다(마 1:22-23). 이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했던 때의 형편과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언은 역사적으로 진공상태에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사야가 활동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그 시대를 향해 주어진 예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 예언을 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기에 예수님의 탄생 예언이 주어진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며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언은 먼저 임박한 전쟁 앞에서 두려워 떠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구원의 징조 또는 표징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사야 7장 2절은 당시의 형편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여기서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는 표현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아하스를 비롯하여 유다 백성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한 처지에 있었는지를 잘 표현해줍니다.
 이 때는 소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the Syro-Ephraimite war, 734-32 BC)이라 불리는 전쟁이 있었을 때입니다. 당시 아시리아는 강력한 정복자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 745-27 BC)의 지배하에 힘을 회복하고 서쪽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시리아와 에브라임은 이 위협적인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전선을 구축하였고, 서쪽의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여기에 가담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아하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시리아 편에 서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용인할 수 없었던 시리아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목적은 아하스 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람을 왕위에 앉혀 유다를 연합군에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시리아와 에브라임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과 이를 거부하는 유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입니다. 이사야 7장 5-6절이 이 전쟁의 상황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아하스]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하스와 유다의 백성들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는 이야기지요. 이 때 선지자 이사야가 등장합니다. 이사야는 두려워 떠는 아하스를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사 7:7). 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까? 아하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이 아무리 놀라운 약속을 포함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믿는 자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하).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위로를 받고 소망 가운데 굳게 서는 사람은 그 자체로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하스는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믿음과 확신을 주시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절). 개역개정역에서는 “삼가며 조용하라”와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이 네 마디 말이 함께 연이어 나옵니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며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놀랍지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아하스를 붙잡아 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각별한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당시 상황이 매우 엄중했음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역대기는 아람 군대가 하루 동안에만 유다에서 용사 십이 만을 죽이고 심히 많은 무리를 포로로 사로잡아 갔다고 알려줍니다(대하 28:5-6). 또한 에브라임 군대는 아하스의 아들과 대신들을 죽이고 유다 백성 이십 만을 사로잡아 사마리아로 데려갔습니다(대하 28:7-8). 그러니 아하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지만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제아무리 대단한 존재라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르신과 베가의 “불타는 분노”는 한낱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지깽이”는 “아궁이 따위에 불을 땔 때 불을 헤치거나 거두어 넣거나 끌어내는 데 쓰이는 가느다란 막대기”입니다. “부지깽이”에 해당하는 말 “우드”(אוּד)는 사실 “불타는 나무토막” 또는 “타다 담은 나무조각”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려지는 것은 “연기를 내는, 타다 남은 나무토막”의 초라한 모습입니다. 르신과 베가가 불처럼 삼킬 듯이 아하스를 위협하지만 그들은 매우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들은 아하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마음에 믿음이 생기고 두려움이 가라앉았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하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확신을 주시고자 특별한 제안을 하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11절). 이 말씀에서 어떻게 하든지 아하스에게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돋보입니다.
 여기서 “징조”란 아람과 에브라임의 도모가 결코 서지 못하고 아하스와 유다가 망하지 않을 것을 확인해줄 징표(sign)입니다. 아하스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대단히 감사한 제안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하스는 거절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하스가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말은 겉으로 대단히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은 기가 찰 정도로 위선적인, 불신앙의 말입니다.
 사실 그 말을 할 때 아하스는 아시리아의 도움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아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했고 아시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쟁에 개입했습니다. 이로 인해 시리아가 멸망하고 이스라엘 왕 베가도 폐위됩니다. 아하스가 기대한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유다에게도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유다는 아시리아에게 수많은 조공을 바쳐야 했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아하스를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13절). 여기서 “괴롭히다”(לאה의 히필)에는 “피곤하게 하다”, “지치게 하다”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아하스의 태도는 하나님을 피곤하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로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놀라운 일입니다.
 구약이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하나님 상(像)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다윗 왕가의 죄로 인해 힘들어하시는 분, 어떤 면에서 그 죄로 인한 괴로움을 친히 짊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놀라운 신적 괴로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괴로움을 생각나게 합니다.
 다른 한편, 아하스의 불신앙이 하나님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서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래동안 신앙을 기대하셨는지를 알려줍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다윗 왕가를 향한 하나님의 기나긴 인내와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 신비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 왕가를 버리실 수 없습니다. 아하스가 비록 위선을 떨며 하나님이 내미는 손까지 거절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물러서시지 않습니다. 다윗 왕가가 400년 이상 지속한 것도 이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과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 왕가를 지켜온 것은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입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다윗 왕가는 진작에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 왕가와 맺은 영원한 언약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신적 사랑의 신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 오늘 우리를 멸망에서 지켜주는 것 역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절당한 사랑으로 인해 지친 하나님! 이제 모든 것을 끝내 버릴 법도 한데, 그러나 이 하나님은 이제 아하스에게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입니다. 무엇에 대한 징조입니까? 다윗 왕가를 무너뜨리려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계획이 서지 못할 것을 보증하는 징조입니다. 더 나아가 아람과 에브라임이 멸망할 것에 대한 징조입니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사 7:8);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사 7:16).
 그렇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의 멸망을 알리는 표징이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무엇보다도 아하스로 대표되는 다윗 왕가와 그 나라의 구원, 그리고 아람과 에브라임의 멸망과 관계됩니다. 이것은 임마누엘의 탄생이 예수님의 탄생과 별개의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임마누엘의 탄생이 우선적으로 아하스 시대 다윗 왕가와 관계되는 일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임마누엘의 탄생은 다윗 왕가의 구원과 적들의 패망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역사는 예수님의 탄생이 가져올 마지막 구원과 승리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탄생 예언은 아하스 시대 다윗 왕가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오늘 교회와 성도를 위한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탄생은 아하스 시대와 오늘의 성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증표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