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연구소 제3회 정례회 참관기_김현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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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일 목사(증평언약교회)

“교회의 참된 연합”(Vera Unitas Ecclesiae)

개혁자들은 핍박 속에서도 교회의 일치에 힘쓰며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지난 10월 22일 ‘프랑스 위그노 연구소’(소장:조병수 목사) 제3회 정례회에 다녀왔다. 8월에 예정되었던 모임은 코로나19로 소규모의 인원만 허락된 가운데 연구소에서 열렸다. “교회의 참된 일치”(Vera Unitas Ecclesiae)라는 책자 표지에 (특강) “멜란히톤, 칼빈 그리고 위그노” 류성민 교수(ACTS)라고 적혀 있었다. 특강을 맡은 류성민 교수는 멜란히톤의 시편을 전공했고, 이번 강의가 멜란히톤과 칼빈을 다리로 위그노까지 연결하는 연구임을 밝혔다. 멜란히톤과 칼빈이 주고받은 29편의 서신의 사회적, 정치적 배경과 함께 그 내용을 토대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수고와 섬김을 들려주었다.

하늘 소망을 가진 사이

교회 개혁을 위해 좋은 동역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프랑스 이민자 출신 개혁자인 칼빈에게 멜란히톤은 존경과 동경의 대상이자 개신교를 대표하는 신학자였다. 비록 신학적인 차이에 대한 우려와 근심을 표현하기도 하고, 충실한 편지 전달자의 부재로 한 동안 소식이 끊기기도 하지만 둘 사이의 소통은 지속된다. 말년에 칼빈은 자신의 질병과 제네바에서 겪는 정치적 위기를 알리면서 멜란히톤이 베스트팔 등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음에 공감한다. 그런 처지에 깊은 유대감을 느낄 정도였다. 두 사람은 공간적으로 단절되어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요 하늘 소망을 가진 사이로 영적 교제를 소망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깊은 대화

편지에 의존한 대화가 서로의 진위를 확인하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의 대적자들에 의해 교회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사람은 지속적으로 펜을 든다. 칼빈은 피기우스에 반대하는 글의 서문을 멜란히톤에게 헌사했다(1543). 피기우스가 가톨릭의 가장 강력한 인물로 여긴 추기경 사돌레토에게 헌정했는데, 가톨릭의 권위에 맞서 내세울 수 있는 개신교의 강력한 인물로 멜란히톤을 생각한 것이다. 멜란히톤은 서로의 견해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예정을 설명하는 방식과 정도의 표면적 차이가 있더라도 두 사람의 신학적 분열을 가져올 요소는 아니었다.
루터의 죽음과 슈말칼덴 전쟁에서의 개신교 진영의 패배(1546) 이후 예배 의식도 본질에 속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가진 순수루터파와 멜란히톤의 대립은 아디아포라 논쟁과 구원에서 공로의 필연성에 대한 마요르 논쟁으로 이어진다(1552). 순수루터파는 멜란히톤의 성찬 견해가 루터와 다르고, 칼빈과 동일하다고 여기며 공격했다. 칼빈도 멜라히톤이 자신의 견해와 동일하다고 선언해 주길 원했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성찬 논쟁을 기독교 교리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실천에 있어 세부적인 요소로 이해했다. 가톨릭은 성찬이 구원론적 핵심이지만, 개신교의 경우 성찬의 주체와 객체, 은혜의 배분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 논쟁에 개입을 꺼렸다. 오히려 멜란히톤은 세르베투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의 반삼위일체에 대항해서 삼위일체와 같은 본질적 문제로 칼빈과 교제하고 싶어 했다(1554).
멜란히톤은 삼위일체 교리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을 세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칼빈의 세르베투스에 대한 처리에 동의한다. 멜란히톤은 자신이 대적자들의 공격 앞에 용감히 대처하고 있으므로 칼빈도 그렇게 할 것을 권면한다. 이 모든 수고는 개신교회가 분열하여 다투는 일이 종식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1555).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

두 사람의 관심사는 교회를 향해 있었다. 당시 신앙의 피난민들은 대표적으로 루터파에 속하지 않은 개신교 진영의 사람들, 피의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형성된 잉글랜드 공동체, 프랑스 위그노들을 들 수 있다. 각자의 모임을 유지해 왔지만, 독일 내에서 머무르던 피난민들은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1555) 이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언어와 고향에서부터 익숙한 예배 형식과 다른 루터파 목사들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동의하지 않고 특히 성찬문제에 다른 고백(취리히 일치)을 인정하는 것을 불법으로 여겼다. 
성체거양 행위는 다툼의 원인이 되었고, 시의회의 호의와 달리 루터파 설교자들의 반대는 개신교의 일치에 장애물이 되었다. 멜란히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 했던 외국인들은 신앙의 난민이기 때문에 그들의 진리를 분명하게 버릴 수는 없다. 다시 추방하려고 한다면 애초헤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설교단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반대를 선동하기보다는 그들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이 필요하다”고 책망했다. 칼빈은 직접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하여 루터파 목사들과 대화하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멜란히톤으로 하여금 이 상황을 중재해 달라고 편지를 쓴다(1556). 그러나 성과는 미미했다.
보름스 종교대화(1557)는 개신교를 인정하는 동시에 종교의 통일을 위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개신교의 대표로 멜란히톤은 개신교회가 분열을 야기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참된 교회임을 주장했다. 카톨릭 진영을 향해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인정할 것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반대편의 대표자인 미카엘 헬딩 주교는 개신교 내부의 차이점을 질문하면서 개신교 내에 성경 해석의 통일성이 없고 오류가 있다고 공격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개신교 내에는 아디아포라 문제를 포함해서 선행(마요르 논쟁), 칭의(오시안더 논쟁)에 대한 논란이 존재했기에 개신교 진영의 통일된 견해가 합의되지 않는 상황에서 보름스 종교회의는 결렬되었다. 분열된 개신교 진영을 통일시키려는 멜란히톤의 노력은 실패했다.
회의 기간 프랑스 생 자크 거리에 있는 위그노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이 투옥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파렐, 베자 등은 멜란히톤에게 다른 개신교 대표자를 권해 앙리 2세에게 청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함께 서명하여 제후들에게 보내지고, 앙리 2세에게 보고되었다. 성과는 없었다.

우리는 쏟아 부은 노력에 걸맞은 결과를 원한다. 그러나 핍박 받는 교회를 향한 개신교 신학자들의 노력은 미비했다. 거대한 가톨릭을 향하여 개신교 내의 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통일된 입장이라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란 기초에서 전반적인 개신교 교리의 통일성을 인정하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일치였다. 그것조차도 어려운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멜란히톤은 전체 개신교에 요구하는 사항의 전달 통로였다. 루터파는 그의 태도가 불만스러웠을 것이고, 개혁파도 좀 더 중재적 입장을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를 다 만족하기란 어렵다. 한편 칼빈도 멜란히톤처럼 중재적 역할을 해야 했다. 루터파와 취리히의 종교적 협상을 위해서 그는 멜란히톤이 필요했다. 두 사람은 핍박이라는 교회의 위기 앞에서 개신교의 일치를 위해서 협력하고,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최선이 노력을 기울였다. 서로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위해 대화하고 교회의 참된 연합을 위해 노력한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다름을 인정하기보다 그 차이를 부각시켜 연합을 위한 노력마저 중단하는 경우를 보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은 핍박 상황임에도 교회의 일치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 살아온 두 사람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메아리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