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 ‘교회’ 정의에 대한 이해가 언약적 삶에 미치는 영향 _ 이차식 목사

0
265

신/학/논/단

 

‘교회’ 정의에 대한 이해가 언약적 삶에 미치는 영향

 

<이차식 목사 | 율곡숲교회>

 

개혁교회는 참교회와 거짓교회 둘 밖에 없다고
간주하고 중간의 교회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언약적 삶을 중시하며 교회 생활에
있어서도 열매로 가시성을 항상 검증해야 한다

 

  1. 초기 개혁신앙고백서들의 교회에 대한 정의

벨직신앙고백서는 교회를 정의할 때 니케아신경이 진술하는 어휘를 사용한다. “우리는 한 보편적, 또는 우주적인 교회를 믿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교회는 우주적인 한 교회이다. 니케아신경은(325년)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기술한다. 교회는 그때부터 하나의 교회를 고수해 왔다. 벨직신앙고백서 제27항, 제28항에 의하면 공교회는 하나다(마 16:18, 19; 행 2:47; 갈 4:26; 엡 5:25-27; 히 2:11, 12; 12:23). 화란에서 이 문제로 교회가 갈라졌다. 그 이유는 언약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교회’의 정의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달리 표현하면 개혁교회들은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 곧 두 개의 교회로 보지 않았다. 초기 개혁신앙고백서들이 두 개의 교회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가시적 성격과 비가시적 성격으로 구별했음이 분명하다. 한 교회 안에 양면이 있다.

부쩌의 테트라폴리탄 고백서는(1536) 이르기를 “그리스도의 교회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고 한다(15항). 불링거의 헬베틱 고백서(1536)는 “그리스도께 속한 회중은 하나님의 눈에만 알려져 있다. 그 교회는 가시적 표지들, 의식들 그리고 조례들에 의해서 알 수 있고 모이고 세워 진다”고 한다(14항). 여기서 표지들은 성례를 의미한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은 자들의 약함을 배려하여 그 약속들을 우리의 눈에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의식들이란 하이델베르크 주의 날 제38주일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들을 시행하고 공적으로 주님을 부르며 헌금을 하기 위해서 성실히 하나님의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4요소는 하나님께서 제4계명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며 교회의 가시성에 속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가시적이어야 한다. 이런 가시성이 없다면 교회라 할 수 없다. 교회가 우리 눈에 보이는 의식들과 몸짓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알려지고 모여들며 세워질지라도 불링거 제2헬베틱 고백서에 의하면 “교회는 교회의 표지들에 의하여 제한받지 않는다”고 한다. 엘리야의 때 아합의 통치 하에 7000명을 하나님께서 숨겨 두셨지만(왕상 19:10,14) 인간의 눈에는 교회가 종종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당시 7000명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는 가시적이었다. 그 7000명은 사람들의 눈에 숨기어졌을 뿐이다. 이를 가리켜서 비가시적 교회라고 하면 안 된다. 제네바 요리문답은 “하나님의 가시적 교회와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선택한 자들의 교제는 눈에 보여질 수 없다고 한다”(답변100).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를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중생이나 칭의를 볼 수 없다. 이는 비가시적이기 때문이다.

언약은 두 개가 아니다. 언약 안에 택자와 비택자가 섞여 있으며, 이를 내적 언약과 외적 언약으로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언약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에게 각각 다른 언약을 주시지 않았다. 만일에 그렇다면 이삭이 할례를 베풀 때 얼마나 초조하고 두려웠겠는가. 칼빈은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교회는 현재 지구상에 거하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모든 택자를 포함한다. 교회라는 이름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예배하기 위하여 고백하는 땅에 퍼져 있는 많은 사람을 의미한다.”(기독교강요 Ⅳ.ⅰ.7). 칼빈이 구분을 짓는 것은 사람들이 보았을 때 교회라 불리는 것과 사람이 볼 수 없는 것 곧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는 것, 이 둘을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만 ‘가시적’ 그리고 ‘비가시적’이라는 구별이 있다.

벨직신앙고백서는 비가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제27항에는 거룩한 교회가 때로는 잠시 동안 사람의 눈에 매우 작게 보여서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 의해 보존된다고 한다. 아합의 학정 동안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7000명을 보존하셨다고 한다.

 

  1.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교회에 대한 정의

반면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보편적 혹은 우주적 교회는 비가시적이다. 그 교회는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 하나로 지금까지 모여들었고 지금도 모여들며 장차 모이게 될 택자들로 구성이 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그분의 충만이다. 가시적 교회는 복음 아래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교회이다. 그 교회는 참 종교를 신봉하는 전 세계적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자녀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하나님의 집이며 권속이다. 그 교회 밖에서는 통상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 보편적 교회는 때로는 가시적이 되기도 하고 덜 가시적이 되기도 하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고백서의 가시적 비가시적이라는 표현은 사용에 있어서 종교개혁초기 개혁자들과는 차이가 있고 느낌이 다르다.

 

  1. 두 교회의 위험성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서도 교회가 비가시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진술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중생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 등은 비가시적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것은 행동이라는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한 사람에게 보여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참 종교를 신봉하는 전 세계의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가시적 교회라고 정의하며, 택자들의 모임을 비가시적 교회라는 의미로 정의한다면 이는 별개의 독립체를 의미하게 된다. 그럴 경우 교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 되며 니케아 신조에도 위배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라는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존 머리 교수는 신약에서 교회는 비가시적 독립체로 나타나지 않으며 비가시성의 어휘로 결코 정의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소위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라는 대립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비가시적 교회가 있다고 가정하면 로마카톨릭이나 신천지 같은 곳에서 참 교회의 공 예배에 왔을 때 “저 사람도 하나님의 눈에 가시적 교회의 일원일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성찬을 오픈해야 한다는 견해가 생긴다. 요즘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나는 선택받았어. 나는 비가시적 교회에 속한 사람이야. 그래서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고 교회 나올 필요가 없어. 나는 선택을 받았는걸.”

이와 같이 누군가가 사고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신앙 의무를 거부하고 성경적이지도 않은 비가시적인 교회로 도망을 치는 위선자인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교회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니 가시적인 교회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며 참교회와 거짓교회 둘 밖에 없다고 간주한다. 그 중간의 교회는 어디에도 없다. 큰 교회, 작은 교회라는 개념이 없다. 교회가 두 개라는 신학적 진술은 성경에서도 종교개혁 초기고백서들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혹자는 열왕기상19장의 엘리야의 때 하나님께서 숨겨 놓은 7000명의 사람들을 비가시적 교회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누구의 눈에 비가시적이며 가시적인가이다. 하나님의 눈에 교회는 둘이 아니며 오직 하나다. 중요한 것은 열매를 보아 그들을 안다(마 7:20)는 것이다. 아합의 박해 가운데서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가시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는 언제나 가시적이어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드 때 교회의 대부흥이 있었다. 청교도 전통에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강조한 것은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무리가 교회에 몰려왔고 교회에 속하였지만 그들에게 삶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삶의 변화를 강조하다 교회에서 결국 퇴출당하였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된 자와(히 3:13)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히 12:16) 심히 많다고 본다. 칭의와 성화는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에베소서4장 20절에서 5장 5절, 빌립보서2장 12,13절, 3장 10절에서 16절, 고린도전서6장 9절에서 20절, 히브리서4장 1절에서 11절 등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은 우리는 지금도 성화 되고 있으며 또 성화 되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1. 교회는 항상 가시적이어야 한다

성화를 위해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 삶에 있어서 더 가시적으로 드러남이 있어야 한다. 에베소서에서 교훈하는 바처럼 부모와 자녀, 아내와 남편, 주인과 종과의 관계 등이 더 가시적이어야 한다. 누가복음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주님은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율법을 완벽하게 순종하셨으며 우리는 구속의 은총에 감사함으로 율법을 지킨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주의 날 제34주일부터 10계명이 나온다. 우리의 선행은 결코 구원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선행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그의 형상이 되도록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화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데 왜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하는가. 창조 후 우리는 타락하였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주의 날 제4주일). 그러나 주님이 재창조를 하신다(요 3장). 주님이 새로운 의지를 주셔서(겔 36:26)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신다. 이는 항상 교회가 가시적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교회의 가시적 삶을 강조하여야 한다(벨직신앙고백서 제28조를 참조). 교회를 선택의 관점에서 둘로 구분하거나 언약을 둘로 분리하면 기독교적 삶을 하찮게 여기거나 무시할 수 있다. 그러면 구원의 확신이 없으니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 이 시대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이 없다는 것이다. 권징이 없으며 교회 안에 멤버십이 없다. 언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장로님들이 교회에서 할 일이 없다. 달리 표현하면 교회가 항상 가져야 할 가시성이 없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의 약속과 의무를 강조하여야 한다. 이를 강조하지 않으면 하이퍼칼빈니즘이 된다.

우리가 언약 안에 있으면 자동으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하면 안 된다. 언약을 선택과 동일시하면 곤란하다. 우리가 주의 자녀와 후사가 된 것은 우리의 탁월함이나 선함 때문이 아니라 창세전의 영원한 작정에서 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은 온 교회가 누려야 할 영적 유산이다. 선택의 교리는 우리를 보다 겸손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택을 확신함으로 구원을 얻지 않으며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선택과 언약을 구별하여야 한다. 알곡과 가라지를 우리가 구별할 수 없으며(신 29:29) 또한 구별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단지 우리는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주어진 언약의 말씀을 좇아서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강조하여야 한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를 그분의 성령으로 새롭게 갱신하시기 때문이다. 이 일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주의 날 제 32주일 제86문: 우리 자신의 어떤 공로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우리의 비참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왜 우리가 아직도 선행을 해야 합니까? 답: 왜냐하면 그분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께서 또한 그분의 성령으로 그분의 형상이 되도록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이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며 우리를 만들어 가고 계신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법을 지켜야 한다. 침례교처럼 율법을 경시하거나 유아세례를 부인하는 것은 언약의 몰이해에서 기인한다.

주님의 교회가 박해를 피하여 숨어 버리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보일 수도 있다. 그 교회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 가운데 있든지 신실한 성도는 믿음의 열매로 나타난다. 즉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가시적 성격을 드러낸다. 반면에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는 이르기를 택자는 비가시적 교회에 속한다고 한다. 칼빈이나 다른 개혁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비가시적’이라는 어휘에 대하여 교회를 수식하는 형용사로 보면 안 된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할 때 신부 혹은 몸의 비사를 사용한다. 신부는 좋은 기질과 성품을 지니기도 하지만, 좋지 않은 습관이나 예민한 부분들도 있다. 보이는 매력도 있고 보이지 않는 매력도 있다. 또한, 몸에는 여러 기능이 있다. 이러한 기능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성격이나 기능들을 가리켜 가시적 혹은 비가시적 신부라고 부르게 되면 신학적 의미가 달라진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에서 교회가 지녀야 할 교회의 가시성에 대해서 강조하므로 개혁적인 면모가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다른 개혁 신앙고백서에 비해서 차이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1. 언약을 구속역사와 동일시하면 안 된다

그러면 창세 전 선택과 언약은 어떻게 구분이 되는가. 예정은 창세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창세후의 사건을 우리는 언약이라고 부른다. 역사 전의 사건은 삼위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창세 후 사건은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속한 일이다. 창세 전 사건은 오묘한 일이며 우리에게는 비밀한 일이다(신 29:29; 돌트신조 1장 6-9항을 참조하라). 창세전의 예정을 우리는 언약이라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작정이라 부른다. 이 작정은 후회하심이 없으며 불변하다(삼상 15:29). 반면에 언약의 말씀은 깨어 질 수 있다.사람이 깨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이 언약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자가 있으며 언약적 약속과 저주라는 두 길이 있기에 하나님 편에서는 깨어지지 않는다.

선택의 대상은 여럿이다. 다윗, 사울, 선지자, 언약으로 선택한 이스라엘 등이다. 언약은 그리스도가 오시는 통로만이 아니다. 언약을 구속 역사와 동일시하면 안 된다. 이삭을 통한 구속의 역사를 성경의 모든 언약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 단지 구속 역사와 병행해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언약의 써클은 선택자의 써클보다 훨씬 넓다. 언약의 써클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한 교회이다. 한 교회 안에 선택자들과 가라지가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일들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약을 순종하여 지켜 행하기를 명하신다.

여기에 율법이 필요하다. 율법을 이해 못하면 칭의나 그분의 능동적 순종을 이해할 수 없다. 능동적 순종이 왜 중요한가. 우리 스스로는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완벽한 순종을 성취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지켜 행하라고 요구하신다. 언약은 복음과 함께 주어졌다. 짐승의 희생이나 절기, 성막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에게 그분의 의를 전가하신다. 그리고 주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그 날이 오기까지 만들어 가신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우리는 언약적 삶을 중시하면서 교회 생활에 있어서도 열매를 통해 드러나는 가시성을 항상 검증하여야 한다. 개혁교회는 노회로 모일 때마다 다음과 같은 질의서를 통하여 교회의 가시성을 확인하고 있다.

1) 당회와 집사들의 모임에(확대 당회) 정규적으로 모입니까?
2)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설교됩니까?
3) 성례가 신실하게 시행이 됩니까?
4) 교회 권징이 행하여집니까?
5) 가난한 자들이 돌봄을 받습니까?
6) 하나님 중심의 교육이 촉진되고 있습니까?
7) 귀 당회는 적당한 교회 정치를 위해서 노회의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