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섬기며
코로나에 대한 성도들의 인식
“예배가 죽으면 삶이 멈춘다”
<정승진 목사 | 송우리 문화센터 | 외국인근로자교회>
코로나 시대에 성도의 삶은 광명의 빛이 되어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코로나가 위협이고 두려움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에 사는 성도들의 인식은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코로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코로나는 성도들에게 이미 제압되고 실상 끝난 문제다. 다만 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대하는가의 문제만 남았다.
첫째 코로나로 인한 감염을 보자. 일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이요 감염 이후 생활의 곤란과 그 뒷일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성도들은 아주 쉽게 배운 대로 이해하면 된다.
감염되어 죽는다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왜? 소멸이 아닌 더 나은 세상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다. 나 하나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라고, 이는 거짓말이다. 사실 죽고 나면 그 이후 삶은 죽은 사람이 관여할 수도, 관여할 바도 아니다. 성도들은 이 부분에서 이미 답을 갖고 있기에 문제가 안 된다.
둘째는 죽지도 않고 식구들 고생하고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질 거라는 염려 걱정이 두려움과 불안 문제로 와 닿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신이요 유아신앙이다. 이에 대하여 스스로 유아 신앙이라고 자처하든지 아니면 회개해야 한다. 성도들에게 무슨 일이든 자녀라면 그것은 자초한 것이 아니라면 시험, 테스트다. 그렇다면 이것도 이미 답이 다 나왔다. 하나님은 자녀의 문제, 시험을 그냥 지켜보지 않는다. 이미 감당할 부분으로 남겨놨다는 점이다. 코로나를 한 바가지 부을 수도, 가볍게 앓고 지나가게 할 수도 있다. 그걸 왜 걱정하고 사서 움츠려드느냐 그 말이다.
그렇다고 마스크 갖다 버리고 휘젓고 마음대로 살라는 말은 아니다. 성도는 기본 수칙에 모본을 보여야 한다.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일상 기본 섭리 방식이다. 이를 무시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무시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코로나 발생의 이유를 기억하고 거기에 따른 후속 조치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에 대하여 세상은 소경이다. 이것을 알고 이해하면 엄청난 영성을 소지한 수준 높은 성도다. 송우리는 아이들도 다 머리에 담아 외우고 있다.
코로나의 문제는 첫째 환경의 문제다. 즉 하나님이 주신 선물, 지구를 훼손한 대가, 벌이다. 이 벌을 달게 받으려는 자세만 있다면 코로나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 . 그리고 나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삶, 실천을 하면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죄를 짓고 회개하고 나면 그 날 밤부터는 다리 쭉 펴고 잘 수 있듯이 말이다. 코로나가 창궐해도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나면 이와 같이 평안이다.
둘째는 예배다. 지구를 선물로 주셔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면 그 복과 은혜를 예배란 제도를 통해서 그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예배는 폼이고 하나님과 예배는 간 곳이 없이 되어 버렸다. 주신 복을 가지고 헛되게 산 것이다. 그래서 삶을 일시 멈추게 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노아 때처럼 아주 쓸어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나마 지켜보고 계시다는 점이다. 사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허수아비처럼 살게 놔두겠는가? 감방에 갇혀 사는 것을 원하겠는가?
다 보고 계신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보고 있다면 금방 코로나 창궐의 이유를 그냥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열심히 마스크 쓰고 방에 갇혀 허송세월을 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불신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있노라고 찬송 기도하면서….
성도는 자가 격리도 복인 줄 알아야 한다. 불신자는 자가 격리 시간에 무엇을 하겠는가 게임 독서 인터넷 검색, 영화, 음악 감상. 물론 성도들도 이런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차원을 넘어서 기적을 만들어내야 한다. 제자들이 옥중에 갇혀 찬송하고 기도할 때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렸던 것처럼. 소위 고난과 역경이란 환경을 새로운 환경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성도들의 삶이다. 필자는 어려움이 있을 때 ‘행복마을에서 온 편지’라는 성경 66권에 대한 책을 골방에서 한 달 만에 집필했다. 세르반테스는 감옥에서 돈키호테 소설을 썼다. 사도 바울은 옥중서신을 썼다.
코로나는 성도들을 가둬 둘 수 없다. 주안에서 끝났다면 그냥 끝난 것이다. 생사를 초월한 자를 코로나가 어떻게 붙잡아 두겠는가. 그러니 얼른 다른 만만한 집으로 거처를 옮길 것 아니겠는가?
코로나 시대에 성도의 삶은 광명의 빛이 되어야 한다.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방법과 길은 수천수만 가지다 . 오히려 코로나 이전보다 더 많다 . 그리고 쉽다 . 다만 열매가 문제인데 하나님은 열매도 보시지만 그 싹수를 먼저 보신다. 다 두려워하는 가운데 움켜쥐고 있는 상황에 담대하게 그리고 보따리를 풀어서 다가가야 한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씩 조금씩 풀고 다가가야 한다. 목사가 먼저 가면 양들은 그냥 따라 온다.
환경을 살리고 예배를 회복하고. 송우리는 일회용품 줄이기, 육식 줄이기, 금연, 자동차 덜 이용하기 등 캠페인을 벌이고 있고 예배실에 들어올 때 무음이나 진동이 아닌 아예 핸드폰 배터리 제거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그 이상 정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예배하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나아가 외국인 노동자들이지만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로 나눔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슬로건으로는 “예배가 죽으면 삶이 멈춘다.”요 예배자로 작정된 자가 한 사람만 남아 있더라도 지구는 그날까지 보전되어야 한다. 지구를 더 이상 슬프게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