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통계시가 비성경적인 이유
소위 직통계시를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은밀한 욕망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직통계시에 열광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와 구원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대한 불신이며, 여전히 자신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불안을 주술적인 방식으로 바꾸려는 시도들 때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환경과 신적 존재를 제재하는 방식의 주술형 종교는 통제되지 않는 불안의 투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주술은 불안이 발생할 때마다 불안을 잠재우는 방식으로 기능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이런 부류들은 성경처럼 기록된 완성형의 계시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대신에 그들은 늘 살아서 매순간 자기 삶에 개입하는 방식으로써 신적 존재를 요구하게 된다. 이것이 직통계시의 직접적인 이유이다. 신사도 운동 계열에서는 이런 경향의 변종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그들에게 있어서 마치 자판기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는 기계화된 신이어야 하고,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부채도사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내재화된 불안 요소 때문에 그들은 성경이라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계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직통계시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모두 구원을 계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행동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와 그 계획은 완벽하여서 특별한 개입 방식이 없을 지라도 완전하게 운행된다. 따라서 특별한 하나님의 개입이 반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경영이 부실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율배반일 따름이다.
성경 계시가 오늘날에 반복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최후, 최종적 계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특별히 그의 낮아지심(성육신, 수난, 죽으심)과 높아지심(부활, 승귀, 등등) 그리고 구원의 보증으로서 오순절 성령의 강림까지 이 모든 것이 종말론적 성취이다.
그런데 이처럼 완벽한 종말론적 성취인 계시를 마다하고 직통계시처럼 또다른 계시를 요구한다는 것은 마치 성경 계시에 무슨 하자가 있어서 새로운 계시를 필요로 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로 계시가 충분치 못하든지 하는 일종의 자가 당착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억지로 암에 걸린 다음 그걸 고쳐주심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도록 하나님께 요구는 것과 다름없는 패역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