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성찰하고 재정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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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성찰하고 재정립하자

 

코로나19 사태가 쉽게 종식되진 않을 듯하다. 우리나라처럼 진정 국면도 있지만 세계적으로는 확산 일로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바이러스의 재발 가능성과 지속성을 경고한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도 4월 20일 브리핑에서 겨울철에 대유행 가능성이 있어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토착화와 몇 년 간의 반복 가능성까지 말했다. 이미 큰 내상을 입은 한국교회에는 우울한 소식이다. 그래도 이런 현실은 우리에게 다시 철저한 자기 성찰과 신앙적 재정립을 요구한다.

존 파이퍼(John Pipper)는 최근의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라는 소책자에서 이번 사태의 본질을 “혹독한 섭리”로 표현했다. 괴롭지만 그걸 통한 하나님의 뜻과 함의를 천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사건마다 하나님의 뜻을 운위하는 건 단순치 않고 늘 조심스럽다.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그의 진단과 대답에 신학적으로 다 동의하진 않더라도 몇 가지는 우리의 생각에 힌트와 도움을 준다.

그 하나는 이번 사태를 그리스도의 무한한 가치에 비추어 비틀린 우리의 삶을 회개하고 올바로 재정렬하라는 신호로 받는 것이다. 현 단계 우리는 무엇을 반성하고 재정렬해야 할까.

먼저, 내적 열망이 그리스도의 가치보다 땅의 가치관에 기운 점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s)에서 “세상적 열정보다 마음 깊이 신앙적 열정을 가지라”고 했다. 그것이 신앙적 활동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세상적 열정이란 세상 이익을 추구하는 탐심,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야망,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정욕이라고 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요(요일2:16) 말씀보다 떡에만 집중하는 삶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미국제 복음주의’로 지칭된 물량적, 번영신학적인 조류에 있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이번 기회에 성경적 신앙 열정을 지향하며 가치관의 재정립을 해야 한다.

이와 결부된 것이 우리의 실생활이다. 대체로 과도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은 삶의 현장에서 생활신앙의 응전력으로 잘 이어지지 못했다. 최근 한국목회자협의회와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이 지앤컴리서치에 공동 의뢰한 ‘코로나19의 한국 교회 영향도 조사’ 결과를 주목하자. “이번 사태를 겪으며 한국 교회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실생활에서의 신앙 실천으로의 의식 전환’이 24.3%에 달하고 ‘교회의 공적인 사회적 역할’이 21.4%였다. 이는 교회 밖에서의 삶을 바르게 정립하고픈 갈망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목회와 교육의 초점을 재정립함이 필요하다.

파이퍼가 제시한 답에서 참고할 다른 하나는 이번 사태를 위험 속에서도 선을 행하라는 부르심으로 보는 것이다. 파이퍼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기 연민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와 기쁨과 사랑으로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부르심”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안락함을 추구하기보다 타인의 필요를 채워 주며, 자기만의 안전을 추구하기보다 사랑 베풂에 힘써야 하고 그것이 주님을 닮은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는 교회의 공적, 사회적 역할로 연결된다.

코로나 팬데믹 소재의 소설 ‘열병(Fever, 2016)’으로 유명해진 남아공의 작가 디온 메이어(Deon Meyer)는 이번 코로나19로 인한 봉쇄령 결과에 대해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존보다 공공의 이익을 더 중요하다고 과연 얼마나 오래 여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인내가 한계에 달했을 때 각자도생의 생존경쟁에서 붕괴될 인륜과 카오스에 대한 우려이다. 따라서 어려운 상황일수록 교회는 현실도피하거나 교회내적 문제에 노심초사하며 교회의 물리적 이익을 사수하려는 모습만 보이기보다 오히려 이웃을 위해 내어 주고 섬기는 자세를 함께 가져야 한다. 최근의 교단 내외적으로 이웃을 돕는 크고 작은 선한 활동들은 감동을 주고 있다.

하워드 A 스나이더는 ‘21세기 교회의 전망’(Foresight)에서 결론짓기를 “성공적인 기독교 공동체는 신자들로 하여금 힘 있는 믿음을 갖게 하고 동시에 사회에서 벌이는 구원적 활동에 효과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공동체”라고 했다. 하웃즈바르트(Bob Goudzwaard) 또한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Idols of Our Time)에서 “참 소망은 하나님께 있으며 기독교적 소망은 각 시대마다의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현실과 우리를 연결시켜 준다.”고 했다. 그가 구체적 행동으로 제시한 것은 예컨대 방위비 감축, 주인 없는 금전적 잉여의 빈국에의 재분배, 배려의 경제 등이다. 이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의 신앙생활의 구체적 시야 확대를 뜻한다.

로잔언약 이후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반향이 있는 듯했으나 적어도 한국교회에는 큰 결실이 없었다. 그러나 그 취지만큼은 지금도 유효하다. 교회 내적 문제로 예민해져 있을 때 교회 밖, 곧 실생활과 사회에서의 신자의 역할을 고찰하고 교육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역사적 큰 사건과 재난이 터질 때마다 기독교회는 성찰을 반복해 왔다. 미국의 9.11 사태가 대표적이다. 전 세계 교계가 회개와 반성에 들자 역설적으로 영적 각성이 왔다는 경험과 평가도 있다. 그러나 냉정히 보면 지속성은 약했다. 오늘 우리도 진정한 성찰과 쇄신보다 원상회복만을 추구한다면 도로 그 자리일 것이다. 위기가 기회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가치를 추구하고, 실생활의 응전력을 기르며 사회적 책임을 잘 감당하려는 방향으로 신앙적 재정립을 도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