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버드 박스’에 숨겨진 생존의 두 가지 의미 _ 이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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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위기의 시대, 생각하며 보는 영화

“보지 않고 들어야 산다”

– 영화, 버드 박스(2018)에 숨겨진 생존의 두 가지 의미

 

<이은숙 | 시인, 본보 객원기자>

 

눈은 떴으나 악에 마비돼 선한 어떤 것도
못 보는 자가 진짜 눈 먼 자

<버드 박스> 포스터

 

조시 말러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버드 박스>는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를 석권한 수잔 비에르 감독에 샌드라 블록이 주연한 영화이다.

주인공들은 ‘어떤 존재’를 보는 즉시 홀린 듯 자신을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집단 현상에 의해 “세상이 나뉘는 지점”을 만난다. 생존을 위해서는 ‘악령’으로 표현되는 ‘어떤 존재’와 눈이 마주치면 안 된다는 설정은 보는 이들의 긴장감을 높이며 관객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고 주인공들과 함께 영화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시각을 차단해야만 살 수 있다는 설정 자체가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며 관객인 우리의 시야까지 함께 차단한다. 이것은 대단한 긴박감을 주며 영화로서의 흥미를 더해줌과 동시에 관객에게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버드 박스>는 우리를 파괴할 수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인 ‘안목의 정욕’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요 20:29)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의 삶의 아비투스(habitus)를 완전히 교정해야만 하는 패러독스적 딜레마와 절묘하게 엮여있다. 우리 믿음은 진정 듣는 것에 의지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속적 안목의 정욕에 갇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신앙의 눈으로 영화 버드박스를 본다면 감상의 여운과 즐거움이 배가될 것이라 확신한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작은 상징적 대상물들은 그 ‘소리’와 더불어 많은 영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먼저 <버드 박스>에는 대략 네 가지 종류의 대표적 존재들이 등장한다. 눈을 감아야만 살 수 있는 이들, 즉 눈가리개 족. 또 눈을 가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나 눈가리개 족들의 눈을 억지로 뜨게 하여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일명 싸이코들, 이들은 자신들이 보는 악령이 황홀하다고 미혹하며 심지어 그것을 보지 않는 것은 불쌍한 일이라 여기는 정신이상자들이다. 다음은 영화 마지막까지 정체를 확실히 드러내지 않지만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악령들이다. 이들은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 사람의 심리를 뒤흔드는 친숙한 목소리로 눈을 뜨라며 필사적으로 미혹한다. 마지막으로 악령이 가까이 있을 때 이를 감지하여 사람들을 생존의 길로 인도하는 새들이 등장하는데 이렇게 네 가지 종류의 존재들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플롯(plot)을 이끌어 가며 인간 생존에 대한 의미와 인류의 근원적인 인간성에 대한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인물들의 캐릭터 또한 다양하다. 의심과 불평이 많고 이기적이지만 사람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진 ‘더글러스’, 인류의 종말에 관심을 가지고 소설가의 꿈을 키우지만 매우 심약하여 위기가 닥치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슈퍼마켓 직원, 인정이 많으면서도 모두를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냉철함과 신중함을 지닌 이라크 전쟁 파병 수의사 ‘톰’, 주인공 ‘말로리’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여성으로 순수한 심성을 지녔으나 강단이 없고 분별력이 둔한 ‘올림피아’ 등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이 생존을 위해 한 공간에 모여 공포와 생존위협을 대처하는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진정 의미 있는 생존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돌아보게 한다. 생존과 참된 인간성이라는 선택지를 놓고 펼쳐지는 이들의 갈등 양상을 통해 인간의 생존 의미가 단지 이기적 생존에만 있지 않으며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웃 사랑, 하나님의 품성을 닮을 수 있는 방편인 자비와 긍휼에 있음도 생각하게 한다.

영화의 제목 <버드 박스>의 상징적 의미를 신앙적으로 재해석한다면 기자는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에 비유하고 싶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신다. 영화 막바지에 주인공 말로리가 두 아이를 이끌고 ‘새 소리’가 나는 곳(안전가옥의 위치)을 향해 달리는 장면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를 삼키려 하는 사탄의 권세를 이겨내고 오직 ‘말씀’에만 귀 기울이며 살아야 하는 우리 삶을 처절히 대입해 보게 한다. 드디어 안전가옥의 문이 열리고 주인공과 함께 차단되었던 우리의 시야는 안도감과 놀라움으로 영화 마지막 장면을 마주한다. 악령의 필사적인 훼방에도 오직 새 소리에 귀 기울이며 끝내 안전가옥으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필사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따라 ‘천로역정’을 통과하는 ‘크리스천’의 삶을 연상케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당도해 보니 맹인학교였던 안전가옥. 악령이 가까이 있음을 감지해 주는 단 두 마리 새를 의지해 안착한 그곳에는 푸른 나무 넝쿨이 외부 세계를 차단한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그 정원의 하늘에는 새들이 가득하다. 새소리가 충만한 거대한 버드박스가 안식처(paradise)였던 것을 보며 알 수 없는 감동에 휩싸이는 순간 유한한 인간존재로서 영원히 시들지 않을 말씀으로 우리 삶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되었다.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는 성경말씀과 같이 생명 유지의 매개체이며 ‘새 소리’의 근원지인 <버드 박스>는 이 땅에 사는 우리가 귀 기울이며 따라가야 할 ‘복음’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맹인학교의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위대함을 아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악령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감지(detect)해 생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새 소리에 민감한 이들이었다. 이에 반해 눈은 떴으나 실은 악에 마비되어 선한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사이코’들이야말로 진정 눈이 먼 자들이었던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화려한 담론들과 유행하는 사조들, 세속적인 지식들로 바벨탑을 쌓으며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인 진리를 비웃을 것이다. 세상 지식이 아무리 하나님은 없다고 속삭이며 그를 의지하는 우리의 삶이 겁쟁이와 같은 삶이라고 미혹할 지라도 우리는 세세토록 있을 말씀만을 붙들고 신앙하며 세례 받은 이성으로, 시들어 없어질 지식들을 부끄럽게 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