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 칼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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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세상

<김영규 목사>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이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기이한 아이디어로 가득 채워져 있어

 

우리는 누구나 항상 보는 자로 있으면서 우리 밖에 우리가 보는 대상들은 우리에 대해서 언제나 개방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고 느끼고 있다.

그런데 과연 세계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환경을 만들고, 그 안에 로봇을 만들어서 그 로봇이 그 환경에 대해 그와 같은 개방성을 가지고 항상 보고 느낄 수 있을까 하고 묻게 된다.

우리의 위치가 항상 변하여도 우리 앞에 있는 대상들은 항상 개방이 된 채로 발견된다는 것은 너무 신기한 현상이다. 그런 신기한 현상을 좀 더 확인하기 위해 우리 주변에 빛을 제거해 보면서 그 현상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를 실험해 볼 수도 있다.

그처럼 캄캄한 상태에서도 그런 현상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의 귀나 우리의 피부, 우리의 혀 등 모든 감각기관들이 없다고 가정하여도 그런 현상이 있는지를 상상해 본다. 그때 비로소 ‘완전 무’와 같이 그런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약간 느끼게 된다. 하루 중에 항상 그런 ‘완전 무’ 상태에 들어가는 경험은 분명히 소위 깊이 잠을 잘 때에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우리 앞에서 대상들이 항상 개방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분명히 ‘기이한 창조 아이디어’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우리에게 그런 현상이 있게 되었는지는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자에게만 물어야 할 주제인데, 우리 앞에서 한 번도 그 창조자가 나타나지 않아 답답할 뿐이다.

그렇게 기이한 현상을 창조하신 자가 그 현상과 함께 항상 나타나도록 지금과 전혀 다르게 창조하셨더라면, 그때 우리 인간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는지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우리가 달에 있든 화성에 있든 아마 우주의 끝에 있던 우리 자신은 항상 보는 자로 있도록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기이한 창조 방식이라고 해야 될 것 같다. 그런 창조적 아이디어들로 우리 세계 자체가 가득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 더욱 더 놀라울 뿐이다.

우리 주변에 끔찍한 사건들에 대한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그런 기이한 현상들에 대한 특별한 이해와 그 뒤에 앞서서 이미 제공된 그 창조적 아이디어들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존재하는지를 스스로 풀려고 한다면, 인류의 역사의 모든 호기심만을 확인할 뿐 더 이상 답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을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하는 자들도 완전 무의 상태에서 그런 기이한 현상을 프로그램으로 구현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있다면, 그런 컴퓨터 프로그램 작성자를 한 번 만나 보고 싶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으로 쉽게 답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도 스스로 보는 자로서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나 보는 자로서 완전 포기의 상태로 전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컴퓨터의 2차원 화면에 그런 프로그램 작성자 자신이 현실적으로 들어가 모든 것들을 구경하는 자로 그 화면 속에서 돌아다닐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 우리가 항상 보는 자로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현상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거기로부터 이제 쉽게 우리에게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자유 의지’를 말한다. 우리에게 ‘하려고’ 하는 현상이 있어도 그 현상이 소위 ‘자유’인가에 대해서 더 따지기 전에 너무도 쉽게 그 두 개념들이 결합이 되어 언어화되고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사용이 되고 있다. 언어들을 제거하고 표상들을 제거하여 거기에서 발견된 어떤 ‘사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먼저 언어들을 사용하기에 바쁘고 그것과 함께 행동하고 일을 저지르기에 바쁘다.

‘완전 무’가 가지는 개방성처럼 우리가 서 있는 곳마다 그 대상에는 그런 개방성이 항상 있다는 것이 역으로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 본질일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에게도 항상 개방이 되어 있는 세계이고, 우리가 보이지 않는 인격체에게도 이 세계에 대해서 항상 보는 자로서 있는 개방된 세계로 있다면 아마 그런 개방성이 모든 ‘보는 자들’의 자유성의 본질을 푸는 필수적인 열쇠로 남아 있을 수 있음을 가정하게 된다.

우리 자유의 경우의 수가 우리 주변의 빛의 수나 빈 공간의 경우의 수들 및 물질 입자들의 수 등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가 가정하는 그런 개방성의 경우의 수는 창조자 하나님의 자유성의 경우의 수와 일치될 수 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보는 세계로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음을 보게 된다. 그들 중에서 정치가들도 있고 법률가도 있으며 지배적으로 과학자들도 많다.

구체적인 삶의 내용을 따져 보면, 의외로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행동 결과들에 의해서 창조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성직자들도 많다. 그 이유는 아마 크게 우리 자신의 진실성을 좀 더 깊게 성찰하면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성경에서 소개된 창조자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의 말을 더 잘하고 우리보다 다르게 보며 우리보다 다르게 듣는 자로서 우리와 같이 생각할 수 있되 다르게 생각하시는 자로 소개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좀 더 깊게 알고 그런 세계들을 창조하신 그 창조자 하나님을 더욱 더 배려하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 결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