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칼럼|
위기상황에서 우리가 할 일
<고상섭 목사 | 그사랑교회>
어려운 상황인 지금은 함께 위기를 극복하며 기도해야 할 때
주일 온라인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설교도 강해설교를 계속 이어가지 않고 현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가야 될지를 2~3주 정도 나누려고 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한 가지가 어려운 현실을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고난 앞에서는 먼저 잠잠한 영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도 지혜로운 삶이며 믿음의 한 단면이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다 알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너무 쉽게 평가를 하고 결론을 내리면 자기가 가진 세계관을 통해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어 하는 경향들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레슬리 스티븐슨의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에 보면 다양한 세계관에 대한 통찰들이 있다. 유교, 힌두교, 플라톤, 칸트, 마르크스, 프로이드, 다윈주의까지 다양한 관점을 가질 때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바라보는지를 이야기 한다.
모두 각자의 관점에서 인간 본성을 바라보기 때문에 다양하지만 다른 해답들을 제시한다. 이 관점들은 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편협한 모습들이 있고 특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만큼 악하지 않은 것을 악마로 몰아가거나, 충분히 능력을 갖추지 못한 무엇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생긴다.
팀 켈러는 이렇게 설명한다. “온 세상은 죄에 빠져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세계관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무언가를 악당, 심하게는 악마로 만들어 죄의 역할을 대체하기 위해 이런 식의 논리들을 채택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도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본성이 있다고 말했다. 극한 사회적 위기가 닥쳤을 때 독일 시민들은 거대한 폭력적 군중으로 변했고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내몰아서 그 위기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했다. 이것을 아렌트는 ‘희생양 이론’이라고 불렀다.
복음적 세계관이 아닌 모든 세계관은 작은 것을 구원으로 격상시키거나, 심하지 않은 것을 악마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 양극단적 생각을 배제해야 한다. 특히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정치인들이 짜 놓은 진영논리에 휩싸여서 마치 한 인물이나 한 정책이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 같은 기대를 갖기도 하고, 또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나 사람들을 악마로 몰아가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팀 켈러는 『일과 영성』에서 ‘복음과 저널리즘’을 설명하며 어떻게 복음이 저널리즘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언론은 있는 그대로를 쓰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라도 있는 그대로를 쓰는 객관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고 가치와 기준과 신념이 모든 문제의 해석의 틀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변호인’에서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금서가 된 이유도 역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인간 역사가들의 해석이라는 단순한 명제 때문이었다. 모든 신문과 뉴스는 사람의 해석이라는 필터를 거쳐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선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언론이라는 직업은 일종의 제사장들이 교리와 관행을 다져가는 ‘종교적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럼 복음적 세계관을 가진 언론들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먼저 피조물 중의 무엇을 우상화하거나 또는 악마로 취급하지 않는 저널리스트들이 되어야 한다. 팀 켈러는 위기의 상황이 오면 현대적인 세계관은 인과관계를 먼저 따지기 때문에 재빨리 비난할 상대를 찾도록 유도한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상륙했을 때 재난 뉴스가 기본을 이루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대부분의 저널들은 대단히 신속하게 책임을 묻는 쪽으로 흘러갔다. 방파제를 건설한 회사의 부실공사나 연방 정부의 늦장 대처 따위가 뉴스의 도마에 올랐다. 도시계획의 허점이나 또는 정부에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팀 켈러는 다만 피조물 가운데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책임을 돌리려는 마음가짐이 복음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충동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
복음적 내러티브의 절정에는 방치와 태만이 아니라 희생과 인내의 이야기들이 더 잘 들어맞는다. 위기의 상황에서 늘 인간은 한 쪽을 승자로 또 한 쪽을 패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문제를 삼아야할 것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극단으로 치우친 생각은 모두 복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대부분 세상의 세계관은 한 쪽을 승자로 또 한 쪽을 패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무 자르듯이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에 전염병이 돌고, 또 포로로 끌려갈 때도, 어느 하나의 문제라고 보기에는 상황을 다 파악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섭리와 앗수르의 교만과 마귀의 공격과 더 크신 하나님의 작정적 역사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것에 대해서도 성경은 명확히 누구의 탓이라 말하지 않고 회개에 포커스를 맞춘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명확한 원인을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려운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탓하거나 악마로 만들지 말고, 또 누군가를 우상으로 격상하지 말고, 잠잠히 영혼을 돌아보며, 잘못된 점과 또 앞으로 행할 일들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지 말고, 잠잠히 침묵하는 것도 지혜일 것이다. 지금은 비난의 때가 아니라 함께 위기를 극복하며 기도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