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현창학 교수 은퇴기념강연 – 찬양시의 분석과 그것의 의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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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현창학 교수 은퇴기념강연 _ <2>

 

찬양시의 분석과 그것의 의의 (2)

 

<현창학 교수 | 합신, 구약학>

 

* 지난 2019년 11월 21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현창학교수(구약학)가 정년 은퇴하며 기념 강연을 한 내용을 2회 분재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완전한 인도
  2. 구속의 은혜와 섭리의 은혜
    1) 시인하는 기도
    2) 창조의 시인과 출애굽의 시인

3) 섭리의 은혜와 구속의 은혜

  1. 인격적 교제

 

헤세드 사랑은 무자격자를 구원하시는 자비이며,
어떤 조건에도 불변하는 신실하심이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이란 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귐이라고 말씀한다

 

<지난 호에 이어>

 

3) 섭리의 은혜와 구속의 은혜

찬양시의 창조의 진술과 출애굽의 진술을 살핀 것에 기초해 섭리의 은혜와 구속의 은혜가 신자의 삶에서 갖는 의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섭리의 은혜부터 살펴 보자. 성경, 특히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큰 신비의 공간’을 지니신 분이시다. 구약성경의 여러 책이 그것을 말하고, 오늘 우리의 본문 시편 136편도 그러하다. 시편 136편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첫 마디는 하나님은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라는 진술이다(4절). 여기서 “크다”라는 말과 “기이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이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생각이 우리 생각과 다르고 길이 우리의 길과 전혀 다른 하나님은(사 55:8-9) 무한히 질적으로 “크신” 분이시다. 욥이 욥기 42:3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가리켜 “내가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말할 때 쓴 “헤아리기 어려운”이란 말이 바로 시편 136:4의 “기이한”과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경륜은 사람의 인지 능력과 통제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 능력이 파악하거나 탐지할 수 없는(unfathomable, inscrutable) 신비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큰 신비의 공간을 지니신 분이시다.

이 하나님의 큰 신비의 공간이 신자의 삶에 접촉하여 오는 부분이 섭리이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 납득할 수 없기까지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로 하나님의 백성을 세심히 보호하고 조밀히 인도하신다. 섭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이 가장 안전하게 구원받고 가장 큰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우주를 운영하시는 원리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밀한 손길을(참고: 기독교 강요 1권 16-17장) 믿으며 그 어떤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절대 안심 속에 주를 따를 수 있다. 이해도 안 되고, 납득도 안 되고, 심지어 믿음도 지탱할 수 없고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안심하고 주를 따르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에 능력이 있어 우리가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보호하고 있을 뿐이다. 어려운 때는 시간이 지나주길 기다려야 한다. 안 보이고 안 계신 것 같아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의 이해와 납득을 넘어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조밀히 인도하고 계시다.

섭리의 원리를 우리 일상생활에 적용해 보자. 만일 어떤 일이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우리 마음에 맞는 대로 되어져 간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 당연히 “할렐루야!”이다(“할렐루야!”를 감사를 표현하는 말이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고 좋은 것을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일이 우리가 기도한 대로 되지 않고, 또한 우리 마음에 맞지 않게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로 되어간다면 그때는 어찌 할 것인가. 그럴 때 우리의 반응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말이다. 그때는 “할렐루야, 더블!”이다. 곱절의 감사를 하는 것이 답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뜻보다 훨씬 좋은 하나님의 뜻이 작동해서 가장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그때 내 뜻대로 됐더라면 참으로 결말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때 내 마음에 맞지 않는 대로(하나님 뜻대로) 되었기에 지금 좋은 결과를 누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은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쪽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쪽으로 자신의 백성의 길을 인도하고 계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신 로마서 8:28 말씀은 과연 섭리절이 아닌가. 마음에 들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밀한 손길을 경험하며 결국은 삶의 가장 성숙한 지점에 이른 요셉을 생각하고(창 45:8, 50:20) 깊은 감사를 올리며 주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구속의 은혜가 성도의 생활에서 갖는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실 구속의 은혜와 섭리의 은혜는 둘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구속이 없으면 섭리는 존재할 수 없고, 섭리가 없으면 구속이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는 것인데 우리의 인지 능력의 한계 때문에 오는 연약과 무지를 돕기 위해 실천적인 목적으로 나누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찬양시는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구속(출애굽)을 노래한다. 그리고 이 구속 역시 (창조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계속해서 현재적으로 역사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는 그 둘 사이를 맺는 언약의 질인 헤세드라는 사랑이 존재한다(헤세드 사랑은 구속사의 핵심을 이룸). 헤세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과 말할 수 없는 성실”이라고 정의되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다. 헤세드 사랑은 자격 없는 자를 구원하시는 자비이며, 어떤 조건에도 변하지 않는 신실하심이다. 헤세드의 이 신실한 성격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백성을 향하여 변하는 법이 없고, 그들의 고백을 통하여 항상 그들에게 현재적으로 역사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물리적으로 오래 지속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까지 오래 참으시며 끝까지 인도하신다. 사람은 변덕을 부릴지라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변덕 없이 지속된다는 물리적으로 긴 시간을 의미한다. 둘째는 좀 더 신학적으로 적극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예전적 반복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찬양시를 통해서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고백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출애굽 당시에 베풀었던 것과 같은 은혜와 기적을 재현시키신다. 즉, 찬양할 때마다 기억할 때마다 출애굽의 은혜와 기적이 활성화, 현재화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우리에게 십자가와 부활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회상하는 무리에게 늘 그 은혜가 새롭게 현재화된다.

예수님의 구속은 우리를 죄와 비참에서 해방하였다. 지상에서의 삶의 실존은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주님은 삶의 많은 고통을 해결해 주신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 뿌리로부터 죄를 척결해 참다운 해방을 가져다 주셨다는 점이다.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은 예수님이다.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는데 지상에서 신음하며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수님이 답으로 주어졌다. 예수님을 받은 것은 모든 것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을 받은 포만감으로 살아가도록 하자.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롬 8:32) 하시지 않았는가. 지상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문제를 만날 때마다 아무것도 못 받은 것처럼 울고불고 하면서 낙심하기 일쑤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받았고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 모든 것을 받은 것이고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기도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는 사람처럼 (‘거지’ 의식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이미 예수님을 받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받을 것(기도하며 구하는 것)보다 이미 받은 것(예수님)이 훨씬 크다. 아니 앞으로 받을 것들은 이미 받은 것 안에 다 들어 있다. 주님을 받은 것은 모든 것 이상을 받은 것이다. “주세요!” 하는 기도만 말고 “(예수님) 받았습니다!” 하는 기도로 살아가자. 예수님을 받은 포만감은 매우 정당한 포만감이며 신자의 삶에 가장 큰 안정(安靜)을 주는 포만감이다.

 

  1. 인격적 교제

우리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귐이라는 신비롭고도 높은 초월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어떤 다른 종교에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는 차원이다. 탄식이든 감사든 찬양이든 성경의 기도는 허공에 대고 주문을 외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인격을 향해 말을 거는 것이다. 신앙의 구체적 실존이 기도라면 우리는 예수 믿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과 인격적 사귐을 유지해 오고 있다. 특히 찬양시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라는 점을 잘 드러내 준다.

한 학자가 찬양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이스라엘의 찬양의 핵심은 그들이 주님 앞에 그분 자신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서 있다는 의식(意識)이었다. 그래서 전능하고 거룩하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찬양과 경배로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그들 중에 계셨다. 그들은 그분에게 모든 것을 빚진 그의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리고 확고한 믿음과 사랑과 환희와 솟구치는 열정으로 그분을 만나며, 그분이 행하신 위대하고 영광스런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찬양시는 주고받기의 내용이 없기에 가장 순수한 인격적 교제를 의미하는 기도라 하겠다. 찬양은 무엇을 달라는 것이 없이 그 자체로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찬양은 “거래의 요소, 회유책이 전혀 없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교제”이다(C. S. Lewis의 표현들을 사용하여 필자가 만든 찬양의 정의임).

성경은 우리의 신앙이란 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귐이라고 말씀한다. 무엇을 받고 말고는 이차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사귐을 가지시려고 자신의 백성을 창조하셨고 구원하시며 예배 받으신다. 우리 한국인들의 신앙은 주고받기식이 너무 강렬한 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 가려 하나님이 안 보이고, 영생 구원이 너무 귀하지만 이에 가려 예수님 자신이 안 보인다. 그러한 우리 신앙의 특징을 생각하면 한국인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란 점을 좀 더 의식적으로 신경 써도 좋을 것이다. 어떤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다가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 한다. “예수님,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많이 기도하고 많이 받고 신앙적 경험을 수없이 하지만 정작 주님과의 인격적 대화라는 것에는 생소한 우리 모두의 얘기는 아닐까 한다.

서양의 기독교는 설교를 들어보거나 경건 서적을 읽어 보거나 하면 탄식은 다소 약할지 몰라도 찬양은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그래도 자리를 잡은 기독교라고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서양의 기독교는 우리보다 한 수 위의 기독교이다.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라는 것은 자연스럽고 친밀하고 순수하다. 오 할레스비의 말처럼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하고 즐거운 교제가 기도의 본질이다. 무엇을 받고 안 받고에 너무 매달리는 대신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에 감읍하고 섭리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주님께 사랑받고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 가운데 살아가자. 찬양이야말로 복음적 신앙을 표현하는 기도이며, 주님과의 사귐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구현하는 기도이다.

박윤선 목사님이나 신앙의 선배들은 우리가 지닌 문제점들을 일찍부터 깨닫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무엇보다 주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중요하다 보시고 “여주동행”(與主同行)이란 가르침을 강조하신 것이 아닌가 한다.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처리하실 문제요 사실상 우리가 그리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내려놓자. 하나님은 차고 넘치게 주시는 분이심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너무도 분명히 깨닫게 해주신다. “기복일관”(祈福一貫)하는 문화를 지양하고 “여주동행”하는 문화로 날마다 성숙에의 발걸음을 내딛는 데 승리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