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현창학 교수 은퇴기념강연 – 찬양시의 분석과 그것의 의의(1) _ 현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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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현창학 교수 은퇴기념강연 _ <1>

 

찬양시의 분석과 그것의 의의 (1)

 

<현창학 교수 | 합신, 구약학>

 

* 지난 2019년 11월 21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현창학교수(구약학)가 정년 은퇴하며 기념 강연을 한 내용을 2회 분재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완전한 인도
  2. 구속의 은혜와 섭리의 은혜
    1) 시인하는 기도
    2) 창조의 시인과 출애굽의 시인
    3) 섭리의 은혜와 구속의 은혜
  3. 인격적 교제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개인의 삶과 역사의 어려운 상황을 지나며
하나님께 울며 부르짖은 탄식기도이다.

신자가 일생에 올릴 기도는
“감사합니다” 한 마디면 충분하다고 한
어느 신앙인의 말은 참으로 옳다.

 

시편에는 7개 정도의 기도 장르가 있다. 탄식시(간구시), 감사시(선언찬양), 찬양시(묘사찬양), 신뢰의 시, 회상의 시, 제왕시, 지혜시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 대표적인 것은 탄식시, 감사시, 찬양시이다. 나머지 것들은 대강 이 셋에서 분파된 것으로 보면 된다(지혜시는 다소 특수함).

오늘은 찬양시에 대해 생각하기로 하자. 찬양시는 8, 19:1-6, 29, 33, 46, 47, 48, 65, 66:1-12, 67, 68, 76, 81, 84, 87, 93, 95-100, 103-105, 111, 113-115, 117, 122, 134-136, 145-150 등 40편 정도로 전체 시편(150편)의 약 26.7%에 해당한다. 시편은 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기도책으로서 하나님께서 시편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할 때 시편의 음성에 맞춰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것을 주문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6.7%라는 분포는 시편 전체가 일곱여 개의 기도 장르로 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분포이다(가장 높은 분포를 보이는 탄식시가 39.3%임).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 중에 (탄식하고 간구하는 기도만 아니라) 찬양하는 기도를 많이 받기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도는 탄식시(간구시)이다. 삶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 문제를 하나님께 (울면서) 아뢰며 그 문제를 해소해 주십사 구하는 것이다. 찬양시는 이와는 대조적이다. ‘우는’ 것도 없으며 간구하는 것도 없다. 다만 하나님이 하신 ‘큰 일들’을 진술하며 그것을 두고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찬양시는 크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노래한다. 특별히 하나님을 창조주로 묘사하고, 또한 역사의 주인으로 묘사함으로 하나님을 높인다. 이제 이러한 특성을 지니는 찬양시가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1. 완전한 인도

첫째, 찬양시(찬양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인도를 의미한다. 찬양시에는 ‘불평’과 ‘간구’가 없다. 불평과 간구는 탄식시의 특징인데, 불평은 자신이 처한 괴로운 상황을 하나님께 눈물로 아뢰는 것을 말하고, 간구는 그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사 하고 간청하는 것을 말한다. 통상 우리는 이 두 요소를 기도의 중심 요소라 생각한다. 문제를 고하고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찬양시는 이 두 요소가 전혀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은 우리의 불평이나 간구가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상에 사는 동안 여러 가지 결핍에 시달리며 산다. 재화, 건강, 관계, 불안한 미래 등 모든 것이 근심과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삶이 우리 눈에는 매우 부족하고 못마땅하게 생각되어도 하나님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한 것으로 인도하고 계시다. 우리가 불평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가 특별히 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하나님의 인도는 완전한 것이어서, 우리는 가장 안전하게 구원 받고 가장 큰 복을 누리며 가장 충만한 의미 속에 살도록 보호받고 인도되고 있다.

필자의 청년 시절은 한국교회가 기도 운동의 바람으로 가득했던 때다. 기도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다. 당시 읽은 내용 중에 어린 신앙에 큰 격려를 주었던 말이 “기도는 결핍의 언어”라는 경구였다. 당시 모든 것이 ‘결핍’이라고 느껴졌던 힘겹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던 필자는 필자 자신이야말로 기도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이 경구는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이 바로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는구나 하고 기도의 힘을 얻었던 기억이 난다.

결핍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무한한 확신을 가지시고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라고(마 7:7) 외치셨다.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장르는 탄식기도(탄식시)이다. 개인의 삶과 역사의 힘겹고 어려운 상황을 지나오면서 하나님께 많이도 울며 부르짖었다. 힘에 지나는 어려운 곤경 속에서 우리를 구해주실 것을 간구하여 말할 수 없이 많은 응답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속된 표현을 쓰면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기도의 눈물방울만으로 오늘과 같은 복을 받는 기적을 경험하기에 이른 것이다. 1953년 당시 남한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57불로서 세계 최하위이거나 밑에서 두 번째 정도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회생 가능성이 없는 나라가 2018년에는 일인당 국민소득 3만불이 되어 (분배라든지 정의라든지 하는 경제의 사회적 질은 차치하고) 명실공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영국 컨설팅 업체 브랜드파이낸스가 최근 발표한 국가브랜드 2019 보고에 의하면 한국은 제9위의 국가브랜드 가치를 갖는 나라가 되었다(작년에 10위였다가 한 계단 오름). 이 보고는 10위 안에 미국 영국 독일 등 전통적 선진국들만이 포진된 사실상의 국력 평가 보고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목사의 눈에는 답이 하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백성의 탄식을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신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을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고 계신 것이다(참고: 마 7:11).

미국 미시간 주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할 때인데 어느 수업 시간에 한 구약 교수님이 미국의 저명한 구약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미국 교회는 탄식이 죽었다!”고 외치시는 것을 들었다. 미국교회가 왜 울며 고할 문제가 없겠는가. 안으로 곪고 썩어 들어가는 중증의 질환이 허다하지만 풍족한 생활을 오래 지속하다 보니 언제 부터인가 기도하지 않는 습관과 문화가 몸에 배기 시작하고 만 것이다. 기도로 하나님께 울며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교회의 큰 불행이 어디 있을 것인가. 어쨌든 그때 강단 아래에서 강의를 듣던 필자는 속으로 “저건 우리 전공인데…” 하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 결핍이 좀 있다 하더라도 기도할 수 있는 여건보다 복된 것은 없다.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없을뿐더러,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또한 가장 좋은 방향으로 해결해 주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사 전체로 볼 때도 아마 탄식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교회로 기록되지 않을까 한다. 새벽기도와 여러 기도 모임에 나와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고하는 기도 소리처럼 아름다운 소리는 지상에 다시없을 것이다. 탄식시는 이렇게 외친다: “울어라?!, 우는 것을 멈추지 마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의 탄식과 신음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귀하고 중한 것인지 말씀해 준다. 언제든 내 힘으로 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식의 방자무기(放恣無忌)한 교만에 빠지지 말고 작든 크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고하는 겸손을 유지해 나가야 하겠다. ‘울음’으로 그 혹독한 삶의 현실 속에서 살아남았고 큰 복을 받아 여기까지 왔다. 울음을 멈추면 우리는 죽는다. 하나님께 받은 탄식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고 기도와 기도 모임이 약해지지 않도록 다각도로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찬양에 대해 말하면서 굳이 탄식의 중요성을 먼저 이리 길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찬양은 무엇보다 중요한 기도로서 충분히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혹시 이 과정에서 탄식이 덜 중요하거나 저급한 기도로 오해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찬양이 중요하다 해서 탄식이 2급 기도로 밀리는 일은 없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는 그 어느 것이나 다 소중하다. 그리고 탄식은 문제에 봉착한 인간이 자연스럽게 드리게 되는 기도이기 때문에 신자가 기도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있어 추진제 또는 연료 역할을 한다. 아무리 찬양이 중요하다 해도 탄식은 여전히 꼭 같이 중요한 기도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이다.

다시 한 번 앞으로 돌아가자. 이미 우리는 기도는 결핍의 언어라는 사실을 살폈다. 그런데 이제 흥미로운 것은 찬양시를 살펴보면 찬양시에는 인간의 결핍에 관한 진술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하신 큰 일들만 나열되어 있다. 그 큰 일들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접촉해 오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족함이 없는 은혜가 되는 그런 것이다. 사람의 눈에는 지상에서의 삶이 힘겹고 고달픈 일들로만 가득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큰 베푸심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조금의 부족도 조금의 결핍도 없이 충만하게 채워지고 있으며 가장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다. 조금의 결핍도 보고하지 않는 찬양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도가 ‘충족의 언어’임을 가르친다!

기도는 한편으로는 결핍의 언어인 것이 분명하다(탄식시).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충족의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찬양시). 찬양시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르치시는, 그리고 기뻐 받으시는 기도라면, 찬양시는 명료하게 우리에게 충족의 언어로(도) 기도를 올려야 할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주세요!” 하는 것만을 기도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기도이며 빠뜨리면 안 되는 기도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부족합니다, 주세요!” 하는 기도만으로는 우리의 기도가 충분하거나 온전하지 못하다. “충족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를 배우는 데까지 나아가야 되는 것이다. “다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를 올림으로 우리의 기도는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된다. 나중에 더 살피게 되겠지만 복음적 신앙이란 어디까지나 충족의 언어로 표현되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바른 깊이, 참된 깊이에 이르려 한다면 우리의 신앙 여정은 높고 정교한 수준의 기도 훈련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본성이 이끄는 기도에만 머무른다면 아직 기독교 기도가 되기엔 부족하다. 복음이 주는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복을 고백하고 시인할 줄 아는 기도가 될 때에 비로소 온전한 기독교 기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인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세심히 보호하고 조밀히 인도한다. 슬픔과 탄식이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지상의 삶의 현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조금의 결핍도 조금의 부족도 조금의 무의미도 허용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엄밀한 의미의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진실이다. 충족,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다른 이름이다. 신자가 일생에 올릴 기도는 “감사합니다” 한 마디면 충분하다고 한 어느 신앙인의 말은 참으로 옳다.

 

  1. 구속의 은혜와 섭리의 은혜

찬양시(묘사찬양)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할 때 하나님을 창조주요 또한 역사의 주인으로 묘사한다. 대표적인 찬양시인 시편 136편을 예로 보자. 136편 4절에서 9절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이고, 10절에서 22절은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이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을 지으셨고 땅을 펴셨고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신 분이시다.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를 치시고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고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고 시혼과 옥을 죽이시고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곧 국가 이스라엘의 탄생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열방을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인이시다.

 

1) 시인하는 기도

찬양시는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진술하기만 하는 기도이다. 무엇을 달라는 것이 없이 그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그러그러합니다” 하고 시인하기만(acknowledge) 한다. 이름하여 ‘시인(是認) 기도’라 할 수 있다. “무엇을 주세요” 하는 탄식시를 ‘요청 기도’라고 부른다면, 찬양시는 시인 기도인 것이다. (앞항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특히 찬양시는 기도에 또 하나의 다른 차원, 더 깊은 차원이 있음을 가르친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큰 일들을 시인하는 차원이다. 이것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기도의 새로운 양상이다. 물론 달라고 하는 기도는 매우 중요한 기도이다. 어떤 이는 기도를 표현하여 “하나님 아버지, 주세요, 주세요, 주세요!”라고 했는데 매우 잘 말한 것이라 본다. 그러나 달라는 기도(탄식)는 (역시 앞 항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기독교의 기도가 되지 못한다. 중요한 보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해 주신 일들을 시인(인정)하는 중요한 기도가 보충되어야 한다. 시인 기도가 요청 기도에 더해질 대 기독교인의 기도는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된다. 시인 기도는 기독교의 기도를 온전케 하는 기도일 뿐 아니라 요청 기도에 비교할 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훨씬 본질적인 기도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복음적 신앙은 은혜를 시인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은혜 위에 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신 일, 즉 은혜가 있기에 구원도 삶도 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은혜를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다. 찬양시는 이 신앙의 본질을 가르치는 기도이다.

 

2) 창조의 시인과 출애굽의 시인

시편 136편으로 돌아가 찬양시는 무엇을 ‘시인’하는지 그 내용을 살펴보자. 찬양시는 두 큰(참으로 큰) 사건, 즉 창조와 출애굽을 시인한다. 먼저 창조는 물론 태초의 창조(creatio prima)에 대한 언급이다. 그런데 찬양시의 창조는 태초의 창조만 말한다고 볼 수 없다.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도 의미한다. 창조가 역사에 단 한 번 있었던 태초의 창조만 의미한다면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그것을 계속 노래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태초의 창조는 그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창조의 능력이 이어지는 역사의 시공간 속에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역사의 시공간은 자신의 법칙만으로 자율적으로 돌아가는 세계가 아니고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의 통제를 받아 움직여 가는 세계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gubernatio mundi), 즉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움직이는 곳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찬양시의 창조는 이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찬양시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기술하는 데 쓰인 동사들은 기본적으로 분사들이다(participles). 이것이 무엇을 함의할까. 창조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므로 분사를 쓸 것이 아니라 와우계속법 미완료 꼴이나 적어도 완료 꼴을 써서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굳이 분사를 썼다는 것은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분사는 현재진행을 의미하므로 분사로 하나님의 창조를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지금도 계속 진행된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태초의 하나님의 창조는 단회적으로 그때에 끝났지만 그분의 창조적 행위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우주와 인류 역사 전체를, 그리고 성도 개개인의 삶의 면면을 조밀하게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출애굽에 대한 시인을 살펴보자. 출애굽은 주전 15세기에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그 은혜와 기적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필요로 할 때마다 반복되었다. 즉, 출애굽도?최초의 출애굽이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계속되는 출애굽이 이스라엘에게 더욱 의미 있는 출애굽인 셈이다. 찬양시의 출애굽에 대한 묘사 역시 기본적으로 분사들로 되어 있다(시편 136편의 경우는 분사를 기본으로 하되 와우계속법 미완료와 완료가 부가적으로 사용된다). 창조의 경우처럼 출애굽도 계속되는 출애굽을 강조하려고 한 의도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구약과 신약 전체를 아우르는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출애굽은 예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성된) 구속에 대한 예표이다. 따라서 찬양시의 출애굽 진술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기적이 그것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그것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살아 역사하는 사건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