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정을 누가 살 깊이 알겠습니까?
< 박성은 박사 >
“당신은 주석 집필과 설교 그리고 신학교 강의 때문에 교육은 다 어머니 몫으로 내어 놓으셨지만 그래도 거의 매일 드리는 가정예배 등을 통하여 저희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평생 가정의 재정 상황이나 가정사에 많은 관심을 못 가지셨던 당신은 자녀 교육을 비롯한 모든 가사를 아내에게 일임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선비의 한 사람이셨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온유한 사람이셨고 그 어떤 연약하고 배경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라는 교훈을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당시 “식모”)를 무시하는 행동을 한 것을 아신 당신은 집필 도중에 저를 불러 옆에 앉히곤,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이니 네가 그들을 무시하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 하시며 조용하지만 맵고 따끔하게 저를 야단치셨던 일을 기억합니다.
형님들의 고치지 못하는 심한 잘못 때문에 안타까움과 의분으로 격노하시기도 하셨고, 잘못 되어가는 형님을 인간인지라 젊은 시절 혈기로 고쳐보려고 하셨던 때가 있으셨겠지만, 당시의 상황을 자상하게 아는 그 어떤 지인들이나 함께 지내기도 했던 친척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당신이 과격하거나 혈기가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분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물리적 폭력이나 가슴 찌르는 폭언을 가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는 모두 한 가지입니다.
당신의 속을 너무도 몰라줍니다
당신의 슬하에서 저의 33년 동안 자랐던 저는, 매질은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너무도 온유하셨고 심지어 당신의 개인 기도 시간에도, 자주는 아니었지만, 어떤 때 함부로 시끄럽게 하거나 약간 급하다 생각하여 문을 열고 어떤 무엇을 여쭤보아도 묵묵히 하던 기도를 중단하고 대답해 주시던 분이셨습니다. 손자들이 기도하시는 할아버지 주변을 서성일 때는 붙들고 무릎에 앉혀 한참 기도하시고 내어 보내시던 일을 보곤 했습니다.
평생 당신보다 십여 년 연하인 어머니에게 늘 존대를 하셨고 당신의 최후를 직면하시기 며칠 전, 옆에 앉아 흐느끼는 어머니에게 “당신은 날 위해 모든 것 다 희생하고 거름더미와 다름없이 살았수다레!”라고 하신 말씀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당신은 주석 집필과 설교 그리고 신학교 강의 때문에 교육은 다 어머니 몫으로 내어 놓으셨지만 그래도 거의 매일 드리는 가정예배 등을 통하여 저희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주자주 매우 자세한 내용도 일러주시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세수를 하고 난 자리나 잠을 자고 난 자리를 깨끗이 해 놓아야 크리스천의 모습과 부합한다”든지 “습관은 제이 천성”이라든지, 또한 도산 안창호 선생, 정재윤 선생, 조만식 선생 등의 애국지사들의 이야기들도 가끔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사실 그런 것들이 저와 저의 동생들에게는 보석과 같은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젠 이 세상에는 없지만 저와 함께 성장한 이복형님 다니엘도 아마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모든 것을 회개하며 새 사람이 될 때, 모르긴 해도 아버지의 주셨던 교훈을 다 기억했을 겁니다.
아버지, 당신이 자녀인 우리에게 무관심했다 한다면 그것은 정말 당신의 속을 너무도 몰라주는 것입니다. 다만, 너무 단순하시고 자상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마도 일부는 성격 탓일 것이고, 더더군다나 너무 한 쪽으로 쏠려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 중에서도, 당신이 중요하다고 여기시던 것들은 입이 닳도록 일러 주시곤 했습니다.
어릴 적에 찻길을 건널 때 “먼저 왼쪽을 보고 차가 없으면 중간 쯤 가서 다시 오른 쪽을 보고 차가 ‘까맣게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나머지 반을 건너라”고 수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첫 부인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었던 아픈 기억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길을 건너며 살고 있습니다. 사실 길을 건널 때마다 ‘차가 까맣게 보일 때 건너라’는 말을 생각만 하고 지키긴 어렵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모르시는 모습 가운데서도 가끔 아버지의 원래 모습답지 않게 자상한 배려를 하셨던 것들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6-7세 때, 당시 삼각산 어느 교단 집회에서 (고) 차남진 목사님과 함께 강사로 말씀을 전하실 때, 제 동생의 출산으로 집에 계셔야 했던 어머니 대신 함께 따라간 저를 숙소에 두고 집회 장소로 가셔야 하신 당신은, 그곳 숙소 앞에 있는 과일 가게에 가셔서 과일 몇 가지를 엉거주춤 사다가 저에게 주시면서 ‘이거 좀 먹고 조용히 있으라이!’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으신 후 집회 장소로 올라가셨던 아버지가 기억에 새록새록 합니다.
수많은 눈물을 누가 한 방울이라도 이해하겠습니까
아버지의 단순하셨던 자식 사랑이 저는 너무 그립고 당신이 거리낌이나 간격 없이 저희들과 스킨십을 하시던 그때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고 34년 동안 아버님을 봉양하시며, 때로는 과격했지만 저희들의 교육을 오로지 자신만의 일인 양, 교육시켜 주신 어머니(이화주 님)께도 깊은 감사드립니다.
물론 제가 태어나기 전 또 다른 34년 동안 힘든 아버지의 세 차례의 유학길을 비롯한 온갖 어려움을 혼자 도맡아 형님들과 누님들을 키워 가시며 가사를 짊어지고 가신 전 어머님(김애련 님)에게도 큰 박수와 존경의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분명 하늘의 상급이 크실 것이며 그 아픔과 눈물은 주님만이 아시며 주님만이 씻겨 주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다 정말 너무 고마운 분들입니다.
제가 아버지께서 소천하시기 몇 년 전 언젠가 “아버지 주석은 혼자 쓴 게 아녜요. 아버지, 하늘의 상급은 아버지를 봉양한 두 어머님하고 또 옆에서 도운 분들도 함께 받을 걸요!”라고 조금은 건방진 코멘트를 하자 아버지는 “네가 날 납작하게 만드는구나” 하시며 머쓱히 웃으셨습니다.
당신이 후에 인정하시고 아픔의 눈물을 흘리신 대로, 자녀들을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지 못했음에 대해 용서를 빌기도 하시고, 눈시울도 붉히시곤 하셨지만, 그것이 마치 당신 혼자 욕을 먹어야 되는 것처럼 현재의 잣대로 비평을 받으시니 저는 참 가슴 아픕니다.
오랫동안 누님의 불평으로 힘든 심정을 참고 지내신 당신이 소천하시기 얼마 전 마지막으로 1987년 겨울, “저 아이가 저래선 하나님의 복을 결코 받지 못한다” 하시며 말리는 저희의 손을 뿌리치며, 1,000마일이 넘는 콜로라도로 길을 다녀오셨지요. 그 후 당신이 비행기에서 많이 우셨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도 울었습니다.
사실 제가 누님과 더 화친하고 더 화기애애하게 관계를 유지하지 못해서 이런 엄청난 일도 벌어진 것입니다. 저의 죄가 큽니다. 제가 아버지를 제대로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엎드려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당시 책이 없고 척박한 시기, 특별히 일제 강점기와 그것을 벗어나는 혼란의 시대, 또한 6.25전쟁을 전후해서 경제적으로 극히 열악한 시대를 위한 당신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해 준비하신 것입니다. 지금처럼 많은 책들이 번역되고 온갖 심리 이론들과 교육 이론들이 물밀 듯 들어와 이런 날선 주장들을 펴며, “박윤선 당신은 이런저런 것을 아이들을 위해 하지 못 했어. 그래서 빗나간 아이들이 생겨난 거야. 당신은 자녀들과 더 깊은 대화를 통해 가정을 살려야 했어” 하며 냉혹한 비판을 하지만, 주님 말고 누가 당신의 사정을 살 깊이 알겠습니까?
하나님 말곤, 누가 당신이 자녀들을 위해서 흘린 수많은 눈물을 한 방울이라도 이해하겠습니까? 성령님 아니곤 누가 당신의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려 주기나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잣대를 가지고 당신을 마구 난도질합니다. 당시의 척박한 한국 교회의 강단을 책임진 많은 설교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정통 진리로 향하도록 도움을 주려는 한 가지 일념으로 생명을 걸고 성경 해석을 위해 저희 가족들이 이런저런 희생까지 걸머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저희들의 영광입니다.
당신은 또한 해외 유학으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으셨지만, 한국적 상황은 아버지를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내몰았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한 가지를 전문으로 해도 되는 연구실의 학자(armchair scholar)로서 지내며 또 그런 위치에서 창조적 신학을 하실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해방 직후 당신의 사역은 하루 8시간을 강의하며 성경 원어를 비롯해서 교회 행정까지 가르쳐야 했던 그런 시기였으니까요.
평생 가정의 재정 상황이나 이사를 가고 집을 고치고 자녀들을 전학시키고 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못 가지셨던 당신은 자녀 교육을 비롯한 모든 가사를 아내에게 일임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선비의 한 사람이셨습니다. 당신도 그 당시의 그 사회의 아들이시기 때문이겠지요.
집 한 칸 재산 하나 없이 은퇴하신 아버지
약 40여년 전, 집 한 칸 재산 하나 없이 신학 교수직을 정년 은퇴하시자, 아버지는 늦게 재혼해서 얻은 저희 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염려하셨고 또한 아직 마치지 못한 성경 주석을 속히 마치기 위해 오래 전에 미국에 가 있었던 둘째 형님(요한)을 통한 초청으로 가족 이민을 결정하셨지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 당신이 저희 가정의 먹고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하신 것을 제가 목격하고 제 마음도 매우 힘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일하시던 미국 공장에서 퇴출되자 당신의 나이 칠십에 저희들은 아직 10대(맏이었던 필자는 19세)였고 영어 한 자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죠. 그때 영어 못하는 저희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허드렛일 직장도 얻어주시고 어머니를 따라 다니시면서 통역하시며 공장 일을 얻는 데 도움을 주셨던 아버지, 그리고는 틈틈이 아직 남은 몇 권의 주석을 계속 집필하시려고 주말이면 어머니가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주변 신학교 도서관으로 전전하시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또한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갓 들어갔던 모 신학교에서 배우며 성경 무오설에 조금 흔들리게 되자, 방학을 이용하여 미국을 방문하셨던 당신은, 불같은 심정으로 저를 새벽에 깨우시며 함께 80마일이나 떨어진 샌디에이고의 에스콘디도(Escondido, San Diego)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서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달려가 어거스틴과 칼빈이 직접 한 말들을 찾아 보여주시며 그때 제가 잘못 읽었던, 잭 로저스(Jack Rodgers)와 도널드 매킴(Donald McKim)의 <성경의 권위와 해석>(The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f the Bible)이란 책을 자상히 비평해 주시던 당신!
아침마다 울면서 우리 자식들 한사람 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당신이 못 다한 사랑을 회개하시면서 기도하시던 당신! 특히 이민 시절엔, 앞으로 다른 사람은 가르칠 기회가 많지 않아서 그러셨는지, 저녁 식사 후엔, 헌 양복이라도 차려 입고 나오셔서 가정예배를 독촉하시던 당신! 오늘도 기억에 새벽별처럼 떠오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항상 가정예배를 잊지 않고 자주자주 “형제들끼리 사랑하고 사는 것이 나에게 효도하는 것이야”라고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본문으로 말씀하시던 가정예배가 기억에 초롱초롱 남습니다.
이민 당시 저희를 조금 도우셨던 고 김CI 목사님과 주말 성경공부를 만들어 아버님으로 가르치게 하시며 돌봐 주셨던 LA의 조CI 목사님 그리고 주석 몇 권이라도 교포 교인들에게 팔아 주시면서 적은 양이지만 생활비로 만들어 주시곤 하셨던 시키고의 고EB 목사님 같은 분들은 정말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그 후 당신은 다시 한국에 나와서 일하시게 되자 어린아이처럼 저희 등을 붙잡고 팔짝팔짝 뛰시던 아버지, 한국으로 좀 초라하게 돌아가셔서 많은 생각 끝에 합동신학교의 젊은 교수님들과 함께 가담하시면서 많은 오해와 비난도 있었지만, “언제나 옳은 편에 서라!”고 하시던 당신의 평소 지론에 따라 그 후 십년 가까운 시간 동안 노구를 이끌고 힘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셨음을 압니다.
돌아가시는 침상 위에서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또한 방문하시는 한 분 한 분 다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특히 신학교를 교수님들에게 자상하게 부탁하셨습니다. 눈과 온몸은 황달로 샛노랗게 되시고, 놀란 사람처럼 눈을 똥그랗게 뜨시고 쉰 목소리로 코와 입에 호수를 끼신 채 힘에 겹지만 않으셔서 “교회를 중심하는 신학교가 꼭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부탁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