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아무개’들이 세우는 교회 _ 전상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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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아무개’들이 세우는 교회

 

<전상일 목사 | 석광교회, 북서울노회장>

 

무명이라도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지켜 나갈

‘아무개’들이 많이 있었으면 한다

 

여러 번 힘에 부치고 지칠 때, 자주 들르는 곳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다. 엘리야가 겪었던 것처럼, 어제의 갈멜산이 아닌, 오늘의 로뎀나무 아래서 영적인 침체가 밀려오는 순간마다, 필자를 다시 일으키고, 정체성을 찾게끔 하는 곳이 바로 이곳 양화진이다.

양화진의 100주년선교기념관을 지나 계단에 오르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오른쪽 비문에 마음이 베인다. 고종의 외교고문을 지냈던 헐버트 선교사의 비문인데,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도 조선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그 옆에는 낯설은 조선 땅에서 한 살배기로 죽은, 헐버트 선교사의 아들 역시 나란히 묻혀있다. 조금 지나다 보면, 루비 켄드릭의 비문에 발걸음이 멈춘다. “만일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 땅에 바치겠습니다.”

이들 옆에는 외롭지 않게 베델,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턴선교사 등도 멀고 먼 이국땅에 묻혀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들처럼, 우리 귀에 익은 선교사들보다, 마치 처음 듣는 것 같은 이름의 무명선교사들이 더 많이 잠들어 있다. 이곳에는 16개국, 417기의 묘가 있는데, 그 중에 145기가 선교사와 그 가족의 묘이다. 다시 말해서, 이곳 양화진에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조선 땅에 들어와, 쇄국조정과 풍토병, 각종 악조건과 싸우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조선 땅에 세웠던 ‘아무개’들이 묻혀 있다. 만약 이들, ‘아무개’들, 무명의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신앙적 혜택과 영적유산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 올수록 다시금 나를 돌아보고, ‘내가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마음속에 선명하게 새기게 된다.

지난해 여름, 어느 방송에서 24부작으로 방영된 인기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있다. 시간의 제약으로 모두 시청을 하지 못했지만, 이 드라마에서 받은 깊은 인상은, 바로 의병(義兵)들의 존재를 아주 심도 있게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여러 의사(義士), 열사(烈士)들의 희생으로 조선독립의 기초가 세워졌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이 드라마는 우리가 미처 조명해 보지 못했던, 이슬처럼 사라져 간 무명(無名) 의병들을 독립의 주인공으로 다루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주인공 애신을 비롯한 의병들은, 노비와 백정, 천민과 유생, 심지어는 사대부 집안 자식들까지 어우르는 각계각층의 ‘아무개’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조국의 독립이라는 한 기치 아래, 불꽃처럼 타다가 사라져간 무명의 꽃들이었지만, 지금의 우리를 만든 주인공들이었다.

얼마 전, 필리핀신학교에서 있을 강의 준비를 하다가 말씀 안에서, 이 또한 ‘아무개’들을 만났다. 빌립보교회 설립을 위해 기꺼이 집과 물질을 내어 준 루디아, 작은 겐그레리아교회의 심부름꾼 자매 뵈뵈, 아볼로를 드러나지 않게 도와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불에 탄 로마 시가지를 헤집고 들어와서 바울을 면회하고, 여러 번 유쾌케 했던 오네시보로, 바울과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던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 등, 이들이야말로, 초대교회를 세운 무명인, ‘아무개’들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사를 보면, 교회의 타락은 어느 특정한 지도자가 ‘영웅’이 되거나, 특정한 교회가 세상 안에서 큰 힘을 소유하게 될 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즉 교회 안에 영웅이 나타나서, 그가 중심이 되고,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발버둥 칠 때부터 타락은 시작된 것이다. 결국은 한 영웅이 말씀보다 앞서 가고, 주님보다 앞서 가면서 주님의 존재를 지우게 되니, 하나님의 교회가 사람의 교회로 전락한 것이다.

유난히 더운 올 여름 동안, 노회와 교회의 여러 수련회들을 돌아보면서 새삼스러운 것이 있다면, ‘아무개’들의 섬김이 어느 때보다 마음속 깊이 새겨진 것이다. 물론 특정한 유명 강사나 지도하는 목회자들 또한 수고가 컸겠지만, 곳곳에서 섬기고 있던 ‘아무개’들이야 말로, 그 어떤 보상도 없이 땀 흘리고, 심지어는 휴가를 모두 써 버리면서까지 희생하고 있었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지금까지 잘 버텨 온 우리 합신총회나 각 노회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무개’ 총대들의 희생과 섬김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우리가 한국교회 개혁의 선봉에 서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작금의 한국교회를 보면, 여전히 특정 힘 있는 교회와 힘 있는 사람들, 소위 영웅들로 인해, 잡음이 끊이지 않으며, 그로 인한 선한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음에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이것에서 우리는 예외이고,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또한 ‘아무개’로 남기보다, ‘영웅’이 되고 주인공이 되려는 속성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고 지켜 나갈 ‘아무개’들이 많이 있었으면 한다. 앞으로 우리가 치를 총회나 노회에서도, 이런 ‘아무개’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어느 때보다 우리가 힘주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주변의 ‘아무개’들이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