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자와 은사와 회중
이세령 목사_암스텔담 사랑의교회
교회 직분은 성령의 은사에 따른 선물로 확증되어야
직분자는 감사함으로 전체 교회 유익 위해 봉사하길
교회를 생각할 때 직분은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즉 ① 말씀과 기도에 전념
하는 목사, ② 성도들을 돌아보고 심방하는 장로, ③ 구제에 힘쓰는 집사 등
의 말씀, 돌봄, 구제의 역할은 교회가 존재하는 기본적인 방식이다. 그런 중
에도 교회는 개별 직분과 직분자들이 아닌 전체 회중의 감독자로서 직분도
중요하다.
물론 직분 수행이 전체 회중을 염두에 두고 하지만 일의 범주상 개별 성도들
을 돌아보는 역할과 더불어서 전체 회중을 위한 봉사의 영역도 직분자들의
역할이다. 이러한 전체 회중의 감독이라는 측면이 회중들의 은사에 의한 섬
김과 구별되는 면이다.
이런 점에서 회중을 감독하는 역할로서 직분자들의 책임을 한국교회의 새로
운 흐름들과 관련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회중들에게 주어진 성
령
의 은사와 직분의 관계에서부터 살피고자 한다.
1. 은사와 직분의 차이
일반적으로 교회의 직분은 성령의 은사의 공적, 즉 회중적인 확정으로 이해
한다. 따라서 모든 다양한 은사를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으로부터 선물로 받
는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각자의 몸의 지체로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직분은 이러한 은사를 바탕으로 세워진다. 그러나
은사를 가졌다는 것이 직분과 동일하지는 않다.
2. 항존직과 임시직의 의미
직분은 은사를 가진 자들이 교회의 공적인 인정을 거침으로 봉사할 수 있
다. 직분은 일반적인 장로교회의 전통에서 항존직과 임시직으로 나뉜다.
항존직이란 성경에서 지시하는 직분으로 목사, 장로, 집사로 통칭된다. 그리
고 대개 안수를 받는다. 이것은 한국의 장로교회의 전통이다. 유럽의 개혁교
회는 목사만 안수를 받고 장로와 집사는 임기제이므로 안수받지 않는 임기제
이다.
임기제인가 아닌가가 항존직인가 임시직인가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권사
제도와 같은 류는 피선교 교회였던 한국에서 여성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위
해서 장로와 같은 권면의 역할을 하도록 만든 한국적인 직분이다. 이들은 취
임하면 일반적으로 평생직이나(물론 안수를 하지 않는다), 결국 항존직이라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항존직이라 함은 성경에서 ‘교회라면 항상 있어야 하는 직분’이라
는 의미이다. 반면에 임시직은 전도사, 강도사, 권사, 서리집사, 그리고 각
종 교회의 모임과 위원회 등의 직분들이다.
이러한 항존직과 임시직의 직분을 세우는 것은 역사적 정황 속에서 교회를
유익케 하기 위해서 교회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른다
는 이유로 임시직을 세우는 것을 잘못된 직분으로 이해하는 것은 직분의 이
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며 특히 한국에서의 교회 세우기의 전통을 무시하
는 처사이다.
실제로 유럽의 개혁교회도 임시직이 많이 있다. 구역장과 권찰과 같은 조직
과 직분이 존재한다. 각종 위원회의 조직이 존재한다. 이들이 교회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면서 교회를 세워간다. 모두 자신의 역사의 장 속에서
필요에 부응하는 제도들이다.
임시직은 항존직의 역할을 돕고 새로운 현실과 장에서 교회를 세우는 필요
에 부응하여 교회가 결정
한 직분이다. 교회가 천국의 열쇠를 가졌다는 말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효력을 발생하기에 교회의 필요를 위
해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항존직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임시직분이 언제나 필요하다. 특히 회중이 많아짐에 따라서 이러한 일은 더
욱 절실하다.
한국의 서리집사의 제도는 집사들을 돕는 역할이고, 권사제도는 장로를 돕
는 임시직이다. 그리고 전도사와 강도사는 목사를 돕는 임시직이다. 이러한
임시직분도 역시 교회의 직분으로 귀하고 소중하다.
임시직에 비교해서 항존직인 목사, 장로, 집사의 경우도 성경은 직접적으로
직분 자체를 언급하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교회에 필요한 역할들과 사람
들의 자격을 언급할 뿐이다.
그래서 다양한 교회의 전통에서 직분의 모습이 달리 형성될 수 있음을 인정
해야 한다.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직분개념이 더 성경적이라고 주장할 수
는 있지만 성경으로부터 나오는 유일의 것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항상 지나
친 것이다.
돌보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목사의 직분이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목사
와 교사로”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목자와 교사
이다. 즉 양떼를 돌보는 기능
과 가르치는 기능은 함께 엮어져서 목사의 역할을 대변한다. 따라서 목사라
는 구체적인 직분명이 성경으로부터 기원한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그러한
역할이 교회에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직분을 세우도록 하셨다.
돌보는 역할, 가르치는 역할, 감독하는 역할, 구제하는 역할들이 교회를 세
워가는 일에 절대로 필요하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교회의 직분자
로 사도시대부터 세워나갔다. 실제로 집사라는 명칭도 쉽게 직분적 명칭으
로 성경에서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장로라는 명칭은 감독이라는 명칭과 함께 사용되었다. 여기서 가르치는 장로
와 돌보는 장로의 구별을 가지고 목사와 장로로 구별한다. 그리고 구제의 역
할을 위해서 집사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항존 직분은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하는 역할에 맞게 공적으로 적합한
은사를 가진 성도를 세워서 교회를 봉사케 한 것이다. 이러한 돌봄과 가르침
과 구제의 역할을 수반하는 수많은 부수적인 역할들이 역사적 정황 속에서
임시직분이다. 따라서 항존직과 임시직은 교회의 본연의 역할을 위해서 존재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분을 생각할 때 임시직을 세울 수 있느냐의 논의보다는(특
히 한국 상황에서 서리집사의 경우이다) 더 실질적인 필요가 있다면 명목적
으로 주어지는 것만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는 면이다.
유교적 사회전통이 기반인 한국 사회는 장유유서의 질서가 명목적인 직분을
양산하고 있다. 제직회에 한번 참석하지 않는 서리집사들이 많이 있다. 그리
고 집사는 교회에서 형제 자매를 부르는 칭호가 되어간다. 그리고 회중을 돌
아보는 기능의 대표적인 직분인 장로들이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도 한번 하
지 않는 일이 빈번하다. 이러한 현상들은 직분 개념을 흐리게 만드는 요소이
다.
3. 직분자의 회중 속에서의 역할
직분자가 회중가운데 은사를 가지고 섬기는 역할을 하는 일반 회중과 어떤
면에서 차이가 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직분자가 교회 회중 속에서 어떤 역
할을 하는 존재들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분명하게 표현하자면 직분자와 회중 누가 중요한가라는 질문이다. 물론 회중
이다. 이것은 천주교회의 입장과 반대이다. 사제가 없으면 교회가 없다는 관
점과는 전혀 반대의 개념이다. 회중을 섬기는 자들이 직분자이다. 그러면 직
분자는 어떤 방식으로 회중을 섬기고 돕는가?
성령의 은사가 적절하게 전체 회중들이 지체로서 교회를 세워가도록 조정하
고 참여하도록 돕는 일이 바로 직분자의 역할이다. 따라서 당회나 제직회는
항상 전체 회중을 염두에 두면서 봉사하는 기관이고 직분자들의 회이다. 그
리고 전 회중들이 각각 가진 은사를 따라서 봉사하도록 조정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돌보며 섬기는 역할이란 바로 이러한 일들을 포함한다. 물론 개개인과 개별
가정을 직접 심방을 하고 돌보는 것은 물론이지만 각각이 가진 은사들이 교
회 전체를 세워가고 봉사되도록 인도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직분자들이 회중 속에서 하는 역할은 교회를 감독하
는 역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체 교회를 살피는 역할이다. 이것의 예로서
당회는 예배를 감독한다. 목사의 설교를 교리에 근거해서 감독하고, 예배의
전반적인 일들을 준비하고, 성찬을 거행하고, 세례를 합당하게 하도록 준비
하는 일이다.
이뿐 아니라 말씀과 교리의 원리에 따라서 성도들의 삶과 가정의 삶들을 관
할하고, 또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일들에 대한 최
종적인 영적인 책
임을 지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 안에서 이러한 전체 교회를 관할하는 당회나 직분자들의 역할
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문제는 장로로서 성도들
의 가정을 돌아보고 심방하는 역할들이 결여된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장로의 직분이 그리고 당회의 기능이 이러한 개별 성
도들과 가정의 돌봄의 기능으로만 본질적인 역할의 전부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전체의 교회를 그리스도와 그의 고백이라는 튼튼한 반석 위에 항
상 세우는 일에도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한국적인 상황에서 바라는 바는 당회나 제직회가 가능하면 개개 성도
의 가정을 돌보는 역할을 회복하기를 바람과 동시에 스스로 이를 더욱 잘 감
당하기 위해서 이러한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제자훈련과 가정교회 등의 방
식에서 드러나는 필요한 은사자들을 선발해서 봉사케 하는 것이다.
여기에 직접 장로들이 관여하는 것이 좋지만 손이 모자라면 다른 은사자들
이 참여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로와 당회의 교회 전체적인 감
독과 돌봄이 완전히 배제된 형태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교회에
서 어떤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자발적인 역할을 하려고
할 때 직분자들은 이들이 전체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봉사하는 것이 좋은지
를 잘 살펴서 기능하게 해야 한다. 그러할 때 교회는 큰 유익을 얻는다.
그런데 교회는 자발적이기에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하고 싫으면 언제든지 그
만 둘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 교회는 그만큼 희생이 클 것이다. 자발
적이라는 말이 질서라는 말을 거스를 수 없음을 직분자들이 잘 감독해야 함
을 말한다.
글을 맺으면서
직분자는 개별 성도 즉 교회의 지체로서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세워간다는
입장에서 성도들과 다른 바가 없다. 좀 더 책임있게 가정을 돌보고 구제의
역할을 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 안에는 때로 성경을 잘 알고 전도를 잘 하는 성도가 있
을 수 있고, 성도들을 잘 위로하고 돌보는 자도 있을 수 있고, 구제의 일을
은밀히 잘 하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할 때에 이러한 은사를 가진 자
와 직분자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를 전체로 살피는 역할이다.
주님의 교회가 참된 교회의 표지를 따라서 건강하게 서도록 개별 지체
들이
그 역할을 충돌과 갈등없이 잘 감동하도록 돕는 역할을 직분자들이 하는 것
이다.
그리고 교회는 항존직 만이 아니라 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항존직이 의미하
는 바의 본연의 교회를 세우고 온전케 하는 역할을 위해서 별도의 임시직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에 교회적인 질서를 잘 살피면서 임시직을 설정
하여 ‘오늘과 여기’라는 현실의 장에서 교회가 서 가는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야겠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임시직의 창출을 생각할 때마다 현재의 직분들이 제 기
능을 하고 있는가 혹은 바르게 직분자들의 회가 역할을 하는가를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고려 속에서 새로운 영향과 운동과 움직임들을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서 잘 수용해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