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최초의 목사와 선교사 이기풍 목사의 삶과 사역_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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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교직자기도회 특강

| 지난 9월 23일-26일에 이기풍 목사의 제주선교 100주년기념 총회교직자기
도회가 제주에서 있었다.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
와 선교사인 이기풍 목사의 삶과 사역’을 주제로 한 김명혁 목사의 특강을 
특집으로 게재한다. _편집자 주|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와 선교사 이기풍 목사의 삶과 사역

김명혁 목사_강변교회 원로 및 선교목사

“이기풍은 지배층에 대한 반항심으로 교회 핍박하기도”
“바울처럼 달려갈 길 다 마치고 순교의 제물로 드려”

저는 길선주 목사님을 비롯한 한국교회의 초석과 기둥과 지붕이 된 우리 신
앙의 선배들을 바라보며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깊은 감동과 충격을 받으며 
저들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존경을 지니게 됩니다. 저들의 순수하고 고귀한 
헌신적 삶에 비추어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한없는 좌절과 탄식을 느끼기도 
합니다. 처절한 고뇌와 절망적인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합
니다. 
수년 전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사역을 살피고 나서 다음과 같은 고뇌
를 피력한 일도 있습니다. “위대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존경하고 예찬하
고 흠모하는 것이 도대체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진실도 없고 겸
손도 없고 청빈도 없고 참회도 없고 눈물도 없고 숨김도 없고 사랑도 없는 
나와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진실 대신 거짓, 겸손 대신 교만, 
청빈 대신 탐욕, 참회 대신 위선, 눈물 대신 강퍅, 숨김 대신 자랑, 사랑 대
신 비난 등으로 가득한 내가 설 곳은 어디란 말인가? 처절한 고뇌와 절망적
인 부끄러움과 깊은 탄식을 느낄 뿐이다. 단지, 이런 분들을 이 땅에 아니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부끄러운 감사를 드릴뿐이다. 내가 지금 살아 있
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이고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
님, 최권능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들과 같은 고귀한 신앙의 선배들의 제물된 삶과 죽음 때문임을 고백하
며 다시 한번 하나님께 부끄러운 감사를 드릴뿐이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2003년 1월). 
“지난 한 주
간도 장기려 박사의 가난과 사랑과 봉사의 삶이 저를 괴롭혔습
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의 모습인데 나는 도대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오늘 또 한 사람의 신앙의 
선배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핍박자가 전도자로 변한 사람입니다. 누구이
겠습니까? 사도 바울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산 사람입니다. ‘조선의 사
울’이라고 불리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는 선교사를 때려눕힌 핍박자였습니
다. 나중에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양의 어두운 밤하늘
을 밝힌 한국의 새벽 별이 되었고, 그는 제주도의 어두운 밤하늘을 밝힌 제
주도의 새벽 별이 되었었습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7분 목사님들의 한 분인 
이기풍 목사입니다”(2003년 2월).
제주선교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여기 제주도에서 총회교직자기도회를 개최하
게 된 것을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과 교회는 부끄
럽고 불행한 민족과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며 배우라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
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
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
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
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
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
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히11:33-
38). 
부족한 사람을 강사로 초청해 주신 합신총회 교육부와 전도부에 감사를 드리
면서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와 선교사인 이기풍 목사의 삶과 사역”이란 제
목으로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삶과 사역을 세 가지로 나누
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이기풍은 선교사를 때려눕힌 핍박자였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그는 1865년 12월 23일 평양에서 출생
하였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어릴 때부터 돈과 권력을 가
진 자들을 미워했습니
다. 한 번은 평양 거리를 지나가던 평양 좌수의 거만
한 행렬을 바라보다가 울화통이 치밀어 달려들어 좌수를 땅 바닥에 내동댕이
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체포되어 형틀을 목에 메고 고생했다고 합니
다. 
그는 지배층에 대한 반항심을 품고 주먹과 머리를 휘두르는 박치기 깡패로 
유명했지만 학문에 대한 소질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섯 살 때 사서오경을 줄
줄 외웠고 열 두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서 붓글씨를 써서 장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서양 사람들을 미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는 음흉한 계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사람의 한 사람인 쌤 마펫 선교사가 이기풍이 지배하고 있던 평양 거리
에 들어와서 날마다 복음을 전하자 깡패 두목인 이기풍은 그대로 보고만 있
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가 29세 되던 1893년이었습니다. 이기
풍은 28세(한국 나이로는 29세)였습니다. 
이기풍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마포 삼열 선교사의 말이 너무
나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런 말을 못하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그의 턱을 부서뜨렸습
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피투성이가 되어 길모퉁이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마포 삼열 선교사는 수많은 핍박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끈질기
게 전해서 그 이듬해인 1894년에는 22명에게 학습을 베풀었고 7명에게 세례
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에 교회당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장대현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기풍은 서양 사람이 교회당을 세운다
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당 건축이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기풍은 깡패들을 동원해
서 교회당 건축현장을 모조리 때려부수고 온통 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교
인들은 너무나 분개하여 모두들 맞서서 싸우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포 삼
열 선교사는 교인들을 달래며 말렸습니다. 그리고 깡패들을 부드럽게 대했습
니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평양성 전체에 퍼졌습니다. 이때부터 평양 시민들은 그
를 가르쳐 ‘마포 선교사’라고 부르며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선량한 사람’으로 평양에서 유명해졌습니다. 
선교사의 턱을 부서뜨리고 
교회당을 때려부순 이기풍은 의기양양했지만 양
심 한 구석에 찔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을 자는데, 
꿈에서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
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그는 너무 놀라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항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당시 청일전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서 잠시 원산으로 가서 피신하고 있었
는데 어느 날 그의 앞에 이상한 옷차림을 한 서양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평
양 거리의 마포 삼열 선교사와 비슷한 모습의 서양 사람이었습니다. 원산에
서 선교하고 있던 스왈렌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이기풍을 보자마자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소리를 질렀습
니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우렛소리와 같았습니다. 결국 이
기풍은 스왈렌 선교사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
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4년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마포 삼열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백배 사죄하
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잃었던 한 마리 양이 돌아온 것
을 바라보며 뜨거운 감
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부터 이기풍은 평양 시
내를 누비며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깡패가 전도자가 되었다
는 소문이 평양 온 성안을 발칵 뒤집었습니다. 
그는 동만 트면 나가서 전도하는 한국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를 서
양 귀신에 미쳤다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
나 그는 권서 활동과 선교사를 돕는 일을 하면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1896년
에는 마포 삼열 선교사와 함께 함경도 지방으로 긴 전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예수를 전하기에는 너무 무식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3년에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전도자와 목회자로서의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
국 한국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던 해인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이기풍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7인 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습니
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은인입니다. 그는 턱에 돌을 맞고서도 굴하
지 않고 꾸준히 십자가와 사랑의 복음을 전한 결과 그는 한국에 이기풍 목사
를 탄생하게 했고 길선주 목사를 탄생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한경직 목사를 
탄생하게 
했습니다. 
그는 1893년과 1894년에는 평양에서 복음을 전했고 1895년에는 평안남도 공
덕면 간리에 가서 복음의 씨를 뿌렸는데 바로 그곳 간리에서 7년 후인 1902
년 12월 29일에 아기 한경직이 태어나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을 받아먹고 자
라서 한국교회의 가장 존경을 받는 목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 이기풍 목사는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기풍은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에서 마포 삼열 목사의 선언에 의하여 우리나라 최초 일곱 목사님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송린
서, 길선주, 이기풍 목사님들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정식으로 세워진 것이
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특이한 것은 노회 셋째 날인 9월 19일 길선주 목사의 사회로 열
린 노회가 선교사들의 헌신적 노력에 보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
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한 사람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한 것입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풍속이나 방언이 다른 외국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때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기로 자원하고 나섰습
니다. 자신
도 흑암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도 사도 바울의 발걸음을 따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도 복음
의 빚을 갚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교사로 떠나기로 준비하는 동안 그는 마음이 약해져서 제주도 가기를 주저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윤함애 사모는 남편을 격려했습니다. “우리가 안 
가면 누가 불쌍한 영혼을 구하겠어요. 주저말고 속히 떠납시다.” 그의 부
인 윤함애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
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습니다. 1903년 마포 삼열 선교사의 중매로 이기풍 
신학생과 결혼을 한 후 기도와 사랑으로 남편을 격려했습니다. 
결국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1908년에 제주도를 향해 평양을 떠났습니
다. 아기를 등에 업고 개나리 봇짐을 머리에 얹고 평양성을 떠나 인천항으
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고 울지 않는 여전도회 회원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 가족은 조그마한 목선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여러 번 풍랑을 만
나며 간신히 군산항을 거쳐 목포에 이르렀으나 거센 풍랑으로 사모는 함께 
갈 수가 없었
습니다. 사모와 자녀들을 목포에 당분간 남겨두고 이기풍 목사
만 먼저 제주도를 향해서 떠났습니다. 제주도를 향하던 배가 난파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으나 이기풍 목사는 간신히 헤엄을 쳐서 추자도에 
상륙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경험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13년 동안의 제주도 복음화 사역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언
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
습니다. 잠잘 곳도 얻지 못했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해 때로는 산기슭에 때로
는 바닷가에 때로는 마구간에 쓰러져 기운이 없어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는 이기풍 목사를 해녀가 발견하고 집으로 데리고 와
서 살린 일도 있었습니다.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면 마치 그에게서 가까이 하
면 죽기라도 할 듯이 손을 흔들며 “설러버려 설러버려 야가기 끊어지갠” 
이라고 말하면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 말의 뜻은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
라 내 목이 달아 난다” 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정책으로 예수를 믿으면 핍박을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너무도 힘이 들고 괴로워서 제주도를 떠나려고 한 일이 있었
습니다. 제주도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그 사실을 편지로 써서 인편에 마포 삼
열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두어 달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
과 같았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
투하시오.” 
이기풍 목사는 그 편지를 받아 읽고서 그 자리에 쓰러져서 대성통곡하며 회
개했다고 합니다. 얼마 동안 울다가 일어나니 성령님의 역사로 그의 마음에
는 기쁨과 희망과 용기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마포 선교사
의 기도와 함께 윤함애 사모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산 속 동굴 안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구렁이를 때려눕힌 일도 있었습니다. 한 편에서
는 구렁이 신을 때려눕히고 소녀를 구한 이기풍 목사를 존경하며 따르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이기풍 목사를 계속해서 박해했습니다. 어떤 때는 
이기풍 목사와 사모가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미치
광이를 고친 일도 있었습니
다. 

이기풍 목사는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경험을 모조리 경험한 것 같습니다. 이기
풍 목사는 13년 동안의 제주도 사역을 통해 제주도에서 사탄 마귀의 어두움
의 세력을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했습니다. 30여 개
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1934년에는 제주도 독노회를 조직하게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성공적인 제주도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의 기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
과 봉사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
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
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
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나환
자들이 돌아
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
니다.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제주도의 어두운 밤하늘을 밝힌 두 개
의 새벽 별들이었습니다. 

3. 이기풍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평생 복음을 전하다
가 마지막에는 순교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복음 사역
을 마친 후에도 한국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특히 전라도 복음화를 위해서 그의 남은 생애를 바쳤습니다. 광주에
서, 순천에서, 고흥에서, 벌교에서, 여수군 남면에서, 돌산 완도 등지의 도
서지방에서 복음을 전했고 1927년에는 다시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평양 출신으로 이방과 같은 제주도와 전라도에 가서 평생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바울 같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1921년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제10대 총회장으로 한국교회를 봉사하
기도 했습니다.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며 한국교회를 
봉사하다가 성대가 막혀서 말을 못하기도 했고 관절염, 귓병 등으로 심한 고
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한국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 그는 과감히 일어나 
일제에 대항하여 한국교회를 지켰습니다. 일제는 1936년을 기점으로 신사참
배를 강요했는데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투쟁했습니다. 주기철 목사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일제는 그를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1938년 체포해서 순천 감옥에 투옥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습니다. 칠순의 노구로 당한 일경
의 취조와 고문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천에서 광주형무소
로 이감되는 도중에 그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그의 마지막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기풍 목사의 삶을 돌아보면서 한 사람의 생애와 운명이 예수를 믿
으므로 완전히 바꾸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또 한번 발견합니다. 기질도 습관
도 운명도 완전히 바꾸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
의 바뀌어진 삶을 통해서 민족의 운명이 바꾸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합
니다. 
우리의 운명이 바꾸어진 것은 이분들 때문입니다. 
전라도에서 오신 분들의 
운명이 바꾸어진 것은 이기풍, 손양원 목사님들 때문이고 평양에서 오신 분
들의 운명이 바꾸어진 것은 이기풍, 주기철 목사님들 때문입니다. 
핍박자가 전도자로 바꾸어진 사도 바울의 변화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다
는 사실도 발견합니다. 제가 1976년 여름 충청북도 괴산군 옥현리에 가서 
그 마을의 청년들을 모아놓고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전했을 때 청년 15, 6명
이 하나하나 앞으로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드린 사실
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마치는 말

한 사람의 생애와 운명이 예수를 믿음으로 완전히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기
질도 습관도 운명도 완전히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바뀌어진 삶
을 통해서 민족의 운명이 바뀌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에
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소원해 봅니다. 어
두운 세상을 밝히는 작은 별빛들이 되기를 소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