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육과 목회자 수급_김영재 목사

0
49

신학교육과 목회자 수급

김영재 목사_전 합신 교수

“교회와 신학교는 목사 지망생들을 철저하게 선별 교육해야”
“분별없이 직분자를 세우는 것은 교회 부패의 원인 만들 뿐”

7″0년대 신학생수 급증은 신학교에 재정 자립을 가져온 대신
목회자수급 불균형을 초래했던 역사적 교훈 간과하지 말아야”

“교회 수에 비해 신학교 졸업생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여러 기독교 언
론사들이 말할 뿐 아니라 교계에서는 그것이 이단 문제에 이어 한국 교회가 
안게 된 또 하나의 큰 난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2008년 2월 24일자 기독교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국내 주요 8개 교단이 직영
하는 17개 신학대학원에서 배출된 졸업생의 수는 총 2319명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학교 졸업생과 무인가 교단 신학교와 교단이 없는 독
립적인 무인가 신학교 졸업생을 다 합하면 그 수는 엄청날 것이라고 한다. 
신문이 보도하는 대로는 모교단의 경우 신학교를 졸업
하고도 10년간 교회 목
회자 회원으로 영입되지 못한 ‘잉여인원’의 적체가 1175명에 달하는데, 
2006년부터 2007년까지 한 해 동안 동 교단의 교회 수는 133개 늘어나는데 
그쳤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교단에서 예외 없이 볼 수 있는 현상이
라고 한다.
복음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의 청빙을 받아 사역에 임하
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역자들의 임직을 위한 경쟁은 일반 사회의 취업 전
쟁을 방불케 하여 사역자의 직분이 소명에 따르는 직분인지 알 수 없게 만든
다. 임직을 위한 경쟁과 무임 목사 수의 증가로 인한 목사의 권위의 실추는 
복음 전파에 장해가 되는 요소이다.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에 종사해온 사람으로서 일할 곳이 없는 분들
과 교회 앞에 죄송하고 민망하게 여기면서 무슨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
는 주제를 두고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경위를 반성하며 몇 가지 신학교육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한국 교회의 급성장

한국에서 목회 지원자 수가 불어난 것은 1970년대부터 있게 된 교회의 갑작
스런 성장으로 인한 것이다. 1960년대의 급변하는 사회 상황이 “허탈상
태”
에 빠져 있는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알맞은 시기로 알고 교회의 지도자
들은 한국 교회 선교 80주년이 되는 1965년을 ‘복음화 운동의 해’로 정하
여 초교파적인 조직을 갖추어 전도운동을 추진하였다.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전국 주요 도시와 4만개의 
부락에 복음이 골고루 전파되게 하여 온 겨레가 모두 복음을 듣게 하자는 것
이었다. 준비위원들은 수차례의 회합을 거쳐 각 교단 대표 300명을 회원으
로 하는 복음화 운동 전국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65년 한 해 동안 농촌 전도, 도시 전도, 학원전도와 군전도, 개인별 혹은 
그룹별 전도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다방면으로 전도활동을 교단별
로 혹은 연합적으로 전개하도록 추진하였다. 400명의 목사들이 전국 각 도시
와 지방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한국 교회가 여러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화” 운동
을 초교파적으로 추진한 것은 뜻있는 일이다. 그것은 여러 교회들이 교회의 
목적과 시대적인 사명을 다 같이 인식하고 공감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또한 여러 교회가 하나가 되어 전통적인 경건주의 
전도 정신과 열정
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과시한 것인데, 한국 교회가 1904-1907년의 대 
부흥 이후 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 1915년의 박람회의 기회를 포착하
여 추진한 전도운동, 1920년의 전도운동, 1930년에 시작한 3개년간의 전도운
동 등 한국 교회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도한 전도운동의 전통을 이어 받
은 것이었다. 
1960년대의 복음화 운동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 
‘엑스플로 74’, ‘80 세계 복음화 대회’ 등 세계 역사상 미증유의 대형집
회들로 이어졌으며, 수많은 젊은이들과 사역자들이 동원되고 많은 결신자를 
얻게 되었다. 1960년대에 기독신자의 인구가 전 국민의 약 5%이던 것이 1980
년에는 20%에 이르게 되었다. 

목사후보생 엄선해야

목사 후보생이 너무 많이 배출된다고 염려하면서 목사 지망생이 많은 것은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할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 같지만, 목사 지망생이 
많다는 사실과 목사 후보생이 많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한다. 목사 지망생의 
많고 적음은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교회는 그 수가 많으
면 감사해야 하고 적으면 일군을 
보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교회와 신학교가 목사를 지망하는 사람을 다 후보
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교회와 신학교는 마땅히 지망
생 중에서 후보생을 선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 교회와 
신학교가 목사 지망생을 선별하지 않고 다 받아주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님께서는 큰 무리와 많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셨으
며, 당신 자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을 다 분별없이 허락하지는 않으셨다. 성
장 과정에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 역시 집사할 사람으로 일곱을 선택하여 세
웠다. 예루살렘 교회가 7명의 일군을 세울 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
로 세웠다는 말씀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바울이 선교하면서 각 교회에 장
로를 세웠으나 분별없이 세운 것은 아니었다(행 13:23, 20:17-35), 교회가 
아무나 원한다고 해서 다 사역자로 세우면 교회가 손해를 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부패이다. 
중세에 있었던 ‘평신도 서임권’은 교회 부패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즉, 8
세기경부터 황제나 왕이 대주교를 임면할 권한을 갖게 되면서부터 자격을 갖
r
추지 못한 왕족과 귀족 출신들이 대거 교회의 고위 성직자가 되면서 교회의 
세속화는 가속되었다. 
11세기 중엽에 교황 그레고리 7세가 그 폐해를 통감하고 성직자 임면권을 도
루 찾음으로써 교회를 쇄신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왕들의 반대에 부딪혔을 뿐 아니라, 정치권력을 등
에 업고 있는 고위 성직자들이 불복함으로 말미암아 좌절되었다. 공로주의 
사상으로 찌든 중세 교회는 구조적으로 개혁이 불가능한 상황에 있었다. 성
직 매매가 성행하게 되었는가 하면 지역 교회의 목회자들은 무지한 가운데 
방치되었다. 

목사후보생 엄선 교회 전통

교회를 개혁하려고 일어선 종교개혁자들은 신자들의 신앙교육을 위하여 
‘소 요리문답’을 만드는 한편 평신도를 교육할 목회자들을 위하여 ‘대 요
리문답’을 만들었다. 그들 교회의 신앙고백에 보면 목사의 직능과 목사 후
보생을 엄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1536년의 제1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교회에 대한 고백에서 교직자
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한다. 그것은 칼빈의 가르침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인
데, 제12조에 
“복음적 교리의 목적에 관하여”라는 제목 아래 교회가, 즉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가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지를 말하며, 제14조에서
는 교회에 관하여 간단히 서술하고, 제15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
들과 그들의 사역의 열매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목사들은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들을 통하여 당신을 믿는 자에게 당신
에 관한 지식을 주시고 죄 사함을 주시며, 사람들을 회개시키시고 경건하게 
하시며 위로하신다. 그런가 하면, 그들을 경고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런데 우
리는 이 모든 효능과 능력을 주 하나님께만 돌려야 함을 알아야 한다. 이러
한 능력과 효능을 피조물은 소유하고 있지 않음이 확실하다. 다만 하나님께
서는 그의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그가 택하신 자들에게 위임하신다.”
제16조에서 “교회의 권위에 관하여” 말하면서 직분자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한다.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그 직분
에 적합하고 자격을 구비한 자로서 교회의 임원회가 주의 깊게 살핀 후에 지
명 선발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
한다. 
이어서 제17조에서는 “교회의 사역자들의 선임에 관하여” 신중을 기할 것
을 말한다. 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경과 하나
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풍부하며, 경건하고 순결하게 생활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열심이 있고 부지런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1896/7년 초기 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W. D. Reynolds)와 스왈른(W. L. 
Swallen)이 장차 한국 교회를 이끌어 갈 목사 후보생의 선발과 교육에 관하
여 쓴 글도 이런 교회의 전통을 잘 대변하는 것이다. 
레이놀즈는 교육을 받을 사람은 소명감이 투철하고 희생적이며 진실하고 자
존심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믿음을 얻은 선량한 기독 신
자라고 하여 너무 성급하게 목사 교육을 받도록 추천하는 것은 삼가야 하
며, 오랜 시일을 두고 살펴보며 시험해 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기다려
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한 목사가 될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 진리의 중요한 사실에 근거한 신앙을 가진 자라야 하고, 예
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떠한 고난도 이겨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반 지식
도 갖추어 교회의 지도자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
다.

목사후보생 엄선 포기 경위 

한국 교회와 신학교는 이러한 원칙을 지켜 왔으나 장로교의 경우 분열한 교
단들이 교세 확장을 위한 경쟁에 돌입하면서부터,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신
학 지망생이 많아지게 되자 목사 후보생을 엄선하는 일이 흐려졌다. 1965년
도의 복음화 운동이 시작될 무렵에 교파 교회들은, 특히 장로교회의 분열된 
교단들은 5000 교회 운동 혹은 10.000 교회 운동을 선언하였다.
교회성장과 더불어 있었던 분열 또는 분열의 와중에 있게 된 교회 성장으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는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을 배태하게 되었다. 교회 분열
이 교세 확장 경쟁을 유발하여 교회 성장의 촉진제가 되었다고 보기도 하나 
교회가 서로 싸우거나 경쟁한다는 그 자체가 비윤리적인 것이다. 
교회는 교세 확장의 경쟁 속에서 권징을 시행하지 못하는 교회, 즉 교인들
을 윤리적으로 지도하는 일을 포기한 교회가 되었다. 장로교도 감리교회나 
마찬가지로 교구 교회 제도를 유지해 왔으나 교회 분열로 말미암아 그러한 
제도가 와해되
었다. 
개 교회들과 교단들이 존립과 발전을 위해 경쟁하게 되었으며, 제가끔 개교
회주의 성향을 갖게 되었다. 분열한 교단들 틈에 이단들이 서식하여 준동하
게 된 일은 그 중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교회가 목회자의 교육과 수급을 통
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도 유감스런 일이다. 
1980년대에 이르러 점차로 고조된 세계 선교의 비전은 그러한 명분을 더 확
인시켜 준 것이다. 큰 교단의 신학교들은 문교부에서 인가한 정원을 훨씬 초
과하여 목사 후보생을 선발하였다. 문교부가 한창 성장하는 교회나 교단들
의 각기 다른 크기를 감안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정원수를 정해 준 것은 무지
하고 불합리한 행정의 소치였다. 
큰 교단 신학교들은 그런대로 신학 지망생들 가운데서 목사 후보생들을 전형
을 거쳐 선발하고 있다. 그러나 큰 교단들의 지방 신학교들과 군소 교단의 
신학교들이 있어서 신학지망생들을 위한 문은 넓게 열려 있다. 

신학교의 재정자립이 화근

신학교는 독립적인 이념을 가지고 교육하는 기관이 아니고 교회가 세운, 교
회를 위한 학교이다. 그러므로 신학교는 임의로 학생 모집을 하기보다는 교
회가 
추천하고 위탁하는 목사 후보생을 맡아 교육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노
회가 목사후보생을 추천하고 그들의 교회 봉사 생활을 관리하는 일을 두고 
신학교와 긴밀한 유대를 가지며 수행하지 않고 있는 것은 유감스런 일인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다.
큰 교단 신학교의 경우이다. 늘 재정난을 겪어왔던 신학교가 1970년대 후반
에 이르러 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임으로써 재정적으로 거의 자립하는 학교가 
되었다. 신학교로서 그것은 자축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학생 수에 의존하
는 재정적인 자립은 해독일 수밖에 없다. 신학교는 교회의 학교이므로 교회
가 재정을 담당해야 하는데 학생들의 등록금에 의존하는 신학교의 재정적인 
자립은 오늘 논의하는 목회자 수급 불균형을 초래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이
다. 
재정적으로 자립을 하게 된 신학교는 교회 사역자의 실제적인 수요와는 관계
없이 학교 운영과 존립 또는 발전을 위하여 학과를 증설하거나 정원수를 늘
려 학교를 확장하려고 한다. 그것은 자립하는 모든 학교들의 속성이기도 하
다. 
학생 수에 의존하는 신학교의 재정적인 자립은 그밖에도 교회와 신학교를 위
해하는 또 다른 
요소를 유발할 수 있다. 자립한 신학교는 교회의 영향을 덜 
받거나 거의 받지 않는 학교가 되고, 따라서 교회를 별로 고려하지 않는 학
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신학교의 재정 자립은 영적인 면에서도 교회와 신학교를 위하여 유익하지 않
다. 교회가 신학교에 애정을 가지고 돌보고 기도해야 하는데, 애정 어린 관
심과 기도는 교회의 재정적인 지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증감된다. 그리고 나
아가서는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도 위해를 받을 수 있다. 
신학교가 목회자 양성 기관이기보다는 신학 연구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다하
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면 대학의 신학과와 방불하게 된다. 신학교의 재정
적 자립(‘free’하게 되는 것)은 얼마든지 신학의 자립(자유)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다. 

신학교 운영 개념이 바꿔야

한국 교회가 신학교 운영에 소극적인 원인은 해방 이전까지 신학교의 운영
을 선교사들이 맡아 했던 점에 있다. 장로교의 경우 장로교공의회가 신학교
를 전국 장로회 신학교로 세우고 합력 담당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하고 있는
데, 이는 재정을 모든 교회로 하여금 분담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고 네 
장로
교 선교회가 분담한다는 뜻이었다. 
즉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호주와 캐나다 장로교의 네 선교회가 각기 인
원 수 비례로 경상비를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신학교가 
교회의 관여 없이도 잘 운영되어 오던 것에 익숙해 있었으며, 신학교가 일
반 학교와는 달리 교회의 학교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
다. 
신학교는 독립적인 이념을 가지고 교육하는 기관이 아니고 교회가 세운, 교
회의 학교라면 교회가 운영의 책임을 저야 한다. 그렇다면 총회 차원에서 말
하는 신학교를 위한 보조금 혹은 후원금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총
회 차원에서는 신학교 운영비라고 해야 하고 지역 교회 차원에서는 후원금
이 아니라 분담금이라고 해야 한다. 

학교운영면으로 본 해결방안

한기총 차원에서 산하의 이단 대책위원회를 통하여 교회들이 이단에 공동으
로 대처하듯이 신학교 협의체를 구성하여 목회자 수급 문제에 대처할 수 있
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
닐 것이다. 공동의 적인 이단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교
세 확장 
및 경쟁 등 복합적인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교파와 교단 교회들이 
목회자 수급 문제를 두고 합의점에 이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장로교의 경우, 분열된 교단들이 통합을 이루는 것이 목사 후보생의 적정수
를 유지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기는 하나 교단 통합은 당장 이
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현실성이 없는 이상론이다. 그러나 신학교 협
의체에 속한 신학교들이 그렇지 않은 신학교들과 차별화함으로써 신학교의 
교육의 질을 높이고 유지하는 일을 두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협조하는 것
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인 방안으로는 교단 교회가 산하의 신학교가 직영 신학교
이든 인준 신학교이든 정원을 통제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려면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교단 차원에서 신학교의 재정 운영을 전적으로 담당해야 한다. 

신학교 교육에 대한 반성

오늘의 신학교가 신학교 학생 선발에서부터 교육 과정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점을 교육 이념으로 갖고 있으며 거기에 충실한지 
반성해야 한다. 
1970년대 이후부터 대형 교회들이 많이 생겨 나면부터 신학 교육을 위한 교

n회의 요청이 달라지고 있다. 대형 교회들이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사역할 전
문적인 사역자들을 요청하는 경향 때문에 온전한 인격을 갖춘 목회자를 지향
하는 목사 후보생보다는 맡은 부서 일을 잘 해 나갈 수 있는 기능인으로 양
성하는 일에 더 관심을 쏟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사역자들이 맡는 부서도 사람들의 모임이며 그 모임의 구성원이 어리거나 나
이 들었거나 다 인격과의 만남과 사귐으로 사역이 진행되는 것이므로 사역자
는 역시 기능공과 같은 기능인이기보다는 선생으로 존경받는 인격적인 목회
자일 수밖에 없다. 
목회자들이 근래에 와서 신학교에 실천신학 교육을 강화할 것을 요청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학교 3년의 과정은 기초적인 신학 과목을 이수하
기에도 벅찬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요청에 부응하려다 보니까 기초 신학 과
목 신간을 할애하여 실천신학 시간을 늘릴 수밖에 없게 된다. 
기초 신학과목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분명 건전하지 못하다. 실천신학 분야
는 다른 학과목과의 균형을 고려하는 가운데 실천의 중요성과 가장 기초적
인 원리만 교수하는 것으로 족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실천은 
교실에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실천하면서 배워야 제대로 하는 학습일 
수 있다. 신학교 교수의 자격 요건으로 목회 경험을 중요시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7세기 이전의 교회 감독이나 오늘의 구미의 목회자들처럼, 교
회 목회자들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사역자들이 신학교에서 다 배웠기를 기대
하지 말고 이제 목회 학습을 시작한 수습목사로 여기고 실천을 지도하며 가
르쳐야 한다. 그것은 담임 목회자의 특권이요 기쁨이다. 
단독으로 목회하든 부교역자로 교회를 섬기든 신임 교역자는 자신들이 수습 
목사임을 자각하고 선배 목사에게 겸손히 배워야 한다. 신학을 하고 교회를 
배우고 섬기는 일은 평생을 두고 해도 못 다하는 과정이니 말이다. 
요즘 대학들이 경영의 논리에서 실용적인 학과를 장려하고 인문학과 기초과
학 분야는 등한시하는 경향이다. 신학교가 실천신학 분야의 시간을 대폭 늘
리는 것도 그러한 추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교육의 이
러한 변화에는 교육부의 규제와 간섭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신학교들이 정원을 늘리는 방법으로 선교학과를 증설하기도 한다. 그런데 선
교학과를 신학과 또
는 목회학과와 버금가는 독립된 전문학과로 간주하여 학
생들로 하여금 종래의 필수 과목 시간을 할애하여 전공을 이수하도록 하는 
것은 재고해야 할 일이다. 선교의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면 선교사는 
목회자가 갖는 지식과 소양을 갖추기 위하여 다른 목사 후보생들과 마찬가지
로 먼저 신학 교육을 받아야 하고 선교에 필요한 지식은 덤으로 이수해야 
할 것이다. 

글을 맺으면서

위에서 목회 후보자 수의 과잉의 요인으로 교회분열로 인한 교단들의 교세 
확장 경쟁 및 교단마다 신학교를 가져야 하는 상황에서 있게 된 신학교의 난
립, 신학교가 학생 수에 의존하는 경영, 교단과는 무관한 독립된 신학교들
의 증가 등을 곱으면서 그에 부수된 신학교육의 과정과 내용을 간단히 살펴
보았다. 
교회는 목회자 후보생의 수를 통제할 수 있기 위해서 뿐 아니라 후보생들의 
바람직한 지적이며 신앙적 교육을 위해서는 신학교의 경영을 책임져야 하
며, 신학교의 신학 노선이 교회의 신앙고백과의 일치를 유지하도록 배려하
고 보살펴야 한다. 
민족의 복음화뿐 아니라 세계 선교에 비전을 가진 교회로서는 목사 후보생
의 적정
수를 산정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 교회의 성장과 위상 및 사명을 감
안할 때 목사 지망생이 많은 것은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신학교가 경영 문
제 때문에 엄선의 원칙을 흐리는 일은 지양해야 할 일이다. 
교회와 신학교가 엄선은 하되, 목사 후보생 수가 모자라는 것보다는 여유가 
있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북한 선교
의 문이 열리는 날이면 목사 후보생이 남아도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하튼 교회와 신학교는 목사 후보생의 과잉을 우려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도 “일군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긴장
관계에서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역자를 양성하는 일에 함께 지혜
를 모으고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