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들의 성경관과 묵상 생활_조엘비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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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들의 성경관과 묵상 생활

조엘비키 박사_청교도 개혁신학원 학장

“청교도들은 이웃을 섬기며 교회의 질서를 중요시해”
“성만찬 통해 그리스도에 초점맞추고 헌신에 역점둬”

“은유적 성경해석 거부하고 구속의 메시지에 강조둬”
“흥미위주의 설교 대신 변화된 삶 위한 묵상 즐겨해”

2008년도 합신 목회대학원 여름강좌에서 ‘청교도의 신학과 설교’에 이어 
‘청교도의 성경관과 묵상생활’라는 주제 아래 진행된 조엘비키 박사의 강
의 중 일부를 요약쪾발췌한다. -편집자 주-

I. 퓨리턴의 역사

엘리자베스가 집권했을 때, 망명을 갔던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다. 
개혁을 이룰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실망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
교였는가? 맞지만 그 사고는 진보적이지 못했다. 당시의 개신교의 정황에 대
해 만족을 하고 있었고 왕직에 올랐을 때 엘리자베스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
다. 
그것은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1563년도에 39개 신앙
조항을 수용했다. 청교도라 불렸던 사람들은 이렇게 미지근한 개혁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삶을 빼앗기기
도 했고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장로교적인 교회 정치를 수용하고자 했기에 면
책을 받았다.
1603년에 제임스 1세가 왕좌에 올랐다. 그러자 청교도들은 확실한 개혁을 
희망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제임스가 엘리자베스보다 신학적으
로 더 자유로웠다는 점이었다. 제임스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이 “퓨리턴
은 분리주의적인 사람”이라 했다. 
1604년도에 퓨리턴들은 새로운 성경번역을 제안했는데 이 때 제임스가 조건
을 걸었다. 그것은 온전히 번역만 하는 것이지 주해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
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제네바 성경에 대해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제임스에 이어 찰스가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나라를 망가뜨리는 장본인
이었다. 그리고 그의 결혼 문제로 더 어려워졌다. 그는 카톨릭에 더 마음이 
있었다. 1636년도에 그는 스코틀랜드에 성공회 기도문을 사용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여기서 일이 더 나빠졌
다. 아일랜드에서도 이런 일이 계속되었고 그
는 의회의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의회는 찰스의 요구를 비난하며 도리어 왕에게 충고했다. 그래서 의
회를 중심으로 한 군대가 만들어져 왕당파와 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
로 청교도 전쟁이었다. 계속된 전쟁 동안에 의회는 이제 청교도 운동에 마음
이 열려져 있는 크롬웰에 의해 지도를 받았다. 바로 이때 1640년대에 웨민신
앙고백서가 기록되었다. 청교도뿐 아니라 그곳에 모였던 신학자들이 5가지 
중요한 것을 기록했는데 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장로교 정치모범 
등이 그것이었다. 
결국 의회파가 왕당파를 이겼다. 찰스는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그대로 받
아야 했다. 결국 찰스는 참수형을 당했다. 크롬웰은 종신 호국형으로 선출
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1658년에 죽었다. 크롬웰의 아들 리처드가 뒤를 이
었지만 아버지가 가진 은사가 그에게는 없었다. 
이즈음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 받았다. 그
는 카톨릭 신앙에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성바돌로메 축제일에 모든 설교자
들이 기도문에 모든 것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런 법에도 불
구하고 2000여명이 동의하지 않았다. 이들은 교회를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어떤 청교도들은 국교도가 되었다. 청교도 운동의 참혹
스러운 경험이었다. 이제 많은 청교도들은 강의하고 책을 쓰곤 했다. 감옥
에 갇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통해 많은 청교도들이 핍박, 순교를 
당해 약해졌다. 
그후 윌리엄 메리가 왕위에 올랐을 때 관용령을 반포했다. 청교도들은 자신
들이 원하는 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1686년도 즈음 청교도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많은 지도자들이 떠났지만 새로운 지도자들은 세워지지 않았
다. 결국 1700년대에 청교도 운동은 사라지고 말았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마
지막 청교도로 불려진다. 그는 1758년까지 살았다. 
요즘에 다시 청교도 운동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적어도 그들이 썼던 글을 
통해서 붐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50년 간 700종류의 책이 재출판되었다. 이
것은 150여명의 청교도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전체의 1%도 안 되
는 책이다. 역사적인 운동으로서의 청교도 운동은 사라졌지만 요즘에도 큰소
리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II. 이상적인 청교도
의 모습

하나님을 섬기고, 이것을 근거하여 이웃을 섬기는 이상적인 청교도는 하나님
의 집에서 질서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무질서
한 것을 거부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성공회 기도서에 나와 있는 부분들을 부
정했고, 진정한 개혁주의 신학보다 로마 카톨릭의 유형을 따라가는 것들을 
끊으려했다. 
예를 들어 성찬을 받을 때 강단에서 엎드리는 것을 부정했다. 이러한 행동
을 통해 성찬에 참여하는 자가 떡을 숭상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
고 성직자가 찬란한 가운을 입는 것을 부정했다. 그래서 청교도는 평범한 옷
을 입어야한다고 했다. 나아가 모든 성도들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
을 믿었다. 세례를 받을 때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의식도 거부했다. 이러
한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청교도는 기도에 몰두한 사람이었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
로 마쳤다. 옷장 안에서 기도하기도 했다. 기도를 위한 독립적인 공간을 청
교도들은 가지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모든 사람이 소리를 크게 내어 기도
하기를 권장했
기 때문이다. 침묵하며 기도하면 잡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는 ‘나는 내 원수 마귀가 듣도록 하기까지 크게 기도할 것’이라
고 말했다. 그들이 소리내어 기도할 때 다른 가족 식구들이 듣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렇게 들리는 것이 자녀들에게 큰 유익이 되었다. 
그들은 각 가정이 교회의 모형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가정에서는 마치 교회
에서 목사들이 섬기는 것처럼 아버지가 목사가 된 것처럼 섬겨야한다고 했
다. 가정에서 기도할 때, 아버지가 기도를 시작하고 다른 식구들이 연이어 
기도하고 마치기도 했다. 기도한 후에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기도할 
수 있을까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공중기도도 강조했다. 
가장 좋은 설교자의 특성 중 하나는 명확성이라 했다. 상대방이 잘 알아듣도
록 설교해야 한다고 했다. 열정과 잘 외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염두
에 두고 항상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에 이야
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잘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머물
러 있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감동을 받아야 한다. 이 주제에 대
해 조나난 에드워즈
는 많은 글을 남겼다. 
주일에 청교도들은 신적인 규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안식을 취하는 것은 
이 일을 통해 거룩을 더 이루기 위해서다. 안식일은 전적으로 주님께 돌려드
리는 날, 즉 예배, 성도의 교제, 하나님을 위해 그 날을 잘 보내는 것이다. 
바로 그 날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이다. 
주일을 평범한 날과 다르게 생각했다. 바로 이것을 근거로 해서 성공회와 많
은 마찰을 일으켰다. 제임스 왕은 오락 책을 제작했는데 주일에 오락을 해
도 가능하다는 내용이었고 이것을 강요했다. 바로 이 부분을 성도들에게 읽
히도록 했다. 하지만 이것은 청교도의 양심에 거스르는 것이었다. 주일은 거
룩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유아 세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침례교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청교도 중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적 인물로 존 번연이 있다. 그는 유아 세례가 믿
음에서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 했다. 
유아 세례를 받은 성인은 후에 회심이 있어야 한다. 언약의 자손임에도 불구
하고 회심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나님을 향한 세례를 가르쳐 준다. 이
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 
나는 구원이 필요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
님께서는 믿는 자의 자손을 보존시키신다 하였습니다. 내 영혼을 구하소
서.” 바로 이것이 유아 세례 받은 자의 특권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성찬식을 영적 양식으로 이해했다. 먹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식탁에 
임해야 한다고 했다. 청교도는 성찬식을 중시했다. 그래서 대부분 청교도 교
회는 한 달에 한번, 석 달에 한 번씩 성찬식을 거행했다. 받기 전 준비 설교
를 했고 이 설교를 통해 성찬에 참여할 자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
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징표를 확인 받았다. 
은혜의 징표는 마태복음 5장, 갈라디아서 6장에서도 볼 수 있다. 성찬을 받
은 후의 설교도 있었다. 그래서 결국 성찬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내 자신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 점검할 수 있었다. 
어떤 청교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결혼식을 위한 옷을 잘 준비했는가
를 살펴볼 뿐 아니라 예수님과 만났을 때 입을 결혼 예복을 잘 준비했는가
도 생각해야 한다.” 성찬을 받을 때 그들은 성찬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
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성찬을 준비할 
때 같은 주제의 좋은 글들을 읽었다. 다시 한번 재 헌신하는 기회를 가졌
다. 그들은 ‘성찬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하는 잔치’라 생각했
다. 성찬은 사랑의 잔치라 믿었다. 
이상적인 청교도는 성도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에 대해 심각성을 가지고 고
려해야 한다고 했다. 위대한 성도는 위대한 남편이어야 한다. 최선의 부인, 
최선의 아이, 최선의 왕족들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모든 영역에 있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옷 입는 것, 말하는 것, 
사랑, 생각 등 이 모든 행위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이상적인 청교도의 삶은 영적 전투에 임하면서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가 대장되신 영적 전쟁의 무기는 기도와 눈물이며, 깃발은 그리스도의 십자
가다. 예수님께서 이기시고 고난 받으신 그것이 영적 전투의 모형이다. “정
복하는 자는 고난을 받는다.” 

III. 청교도들의 성경관과 묵상 생활

1. 청교도의 성경관

존 코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라”했다. 이를 위해 배고픔을 가져야 한
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있는 그대로 믿었다. 하나님이 만
일 진실로 말씀을 기록한 장본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거짓을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속일 수 없고 그것은 오류가 없고 그것은 무오하
다. 거기에는 오류도 없고 상충되는 내용도 없다. 하지만 만일 오류가 발견
된다면 오리지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번역가운데 나타난 오류라 믿었
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종교적인 진리를 증거하는 기준이 된다. 사무엘 러더
포드는 “구약과 신약에는 도덕적 삶의 기준이 담겨져 있다”고 했다. 교회 
정치에 관한 내용도 담겨 있다고 믿었다. 교회의 교과서였다. 하나님의 교회
가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 안에만 있다면 교회들은 여러 문제를 피해갈 수 있
다.
우리가 매일의 삶 가운데 결정하는 데도 필요하다. 모든 상황에서 제시하지
는 않지만 모든 상황에 적용하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성도
가 죄에 넘어질 수 있는 환경에 있는 것은 아니라 했다.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일반적 규범은 성경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일반
적 규범’은 그들
에게 중요했다. 
청교도 설교자가 설교할 때의 원리는 원문을 연구하되 단어 하나 하나를 중
요시 여기고, 뿐만 아니라 본문의 정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본문과 상황
이 다른 성경의 내용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청교
도들이 가진 것은 ‘믿음의 유추’라 했다. 
존 오웬은 “성경의 내용에는 믿음의 구조가 있는데 그 구조가 다른 것과 상
충할 수가 없다”고 했다. 가급적이면 은유적 해석은 거부해야 한다고 했
다. 힘든 본문은 유사한 것 가운데 이해하기 쉬운 것을 통해서 해석하도록 
했다. 해석 시 난해한 부분이 있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속의 
메시지를 듣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강조했다. 본문과 문맥을 잘 공부하면 좋은 설교
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 자
신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
문이다. “교황이 아니라 성령께서 수문장이시다”라고 말하는 청교도도 있
었다. 뿐만 아니라 청교도들은 다른 사람이 제작한 주석을 통해서 도움을 

었다. 초대 교부의 글에서 도움을 얻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도 성령께서 하
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것에 순복해야 함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성경해석학의 원리들은 우리의 생각 가운데 이미 표준으
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 생소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청교도들
이 우리 성경해석학의 원리를 제공해준 장본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다. 
그들은 흥미 위주의 설교자들이 아니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죽어가
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성경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이 가질 수 있는 실수 중 하나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
를 강조하면 다 될 것이라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청교도들은 그렇게 말
하지 않는다.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2. 묵상의 의무와 필요성

6가지 이유로 묵상이 필요하다. 

1)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명령하셨다. 충분 조건이다. 
증거자료서 신명기 6:7; 시편 19:14, 119장; 요한 4:24; 엡 1:18 등 이외에
도 많이 있다. 여호수아와 모세와 다윗이 그랬다. 신
약에서는 마리아, 바울
과 디모데가 그러하다.

2) 말씀을 읽을 때 직접 쓰신 편지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시 119:48에 근
거한다. 어떤 친구로부터 편지 받게된다면 아마도 다른 것을 옆에 두고 그것
을 읽는다. 친구로부터 편지 받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다. 거듭해 읽기도 
한다. 말씀이라는 것은 편지이기 때문에 흥미 있게 읽어야 한다. 말씀하시
는 그것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다. 

3) 묵상하는 성도는 견고한 성도이기 때문이다. 묵상하지 않으면 말씀에 고
갈 되 약한 성도가 된다. 시 119:1에 다윗이 자기가 묵상하지 않으면 고통
에 의해 죽어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고통 속에 집어넣
을 때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주권적인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망
하고 만다. 묵상한다면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얻는다. 그래서 이사야가 하나
님께 마음을 고정한 자는 견고하게 설 수 있다고 말했다(사 26:3).
토마스 왓슨은 “묵상하지 않은 성도는 무기가 없는 성도와 같다. 대장장이
가 도구가 없는 것과 같다. 묵상 없이는 어느 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한
다. 

4) 설교된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도록 묵상해야 한다. 만일에 설
교를 들었지만 묵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음식을 먹을 때 씹지 않고 삼키는 
것과 같다. 제대로 소화시키려면 잘 씹어야 한다. 설교를 잘 섭취해야 한다.
와이처는 “묵상 없는 천 편의 설교보다 묵상 있는 한 편의 설교보다 낫다”
고 말한다. 

5) 묵상은 우리의 기도 생활을 묻는다. 말씀을 읽는 것과 묵상은 기도의 반 
정도가 끝난 것과 같다. 기도의 효과는 말씀을 읽은 다음에 효과적인 기도
가 나타난다. 읽다보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주신다. 청교도들은 
묵상의 바른 방법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라고 충고한다.

6) 진리를 변호하기 위해 묵상해야 한다. 묵상은 우리의 중추 등뼈와 같다. 
묵상을 하지 않은 성도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지식
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배우는 모든 것에서 발견되는 것이 진리이다. 

새가 둥지를 떠나면 알이 차가워져 새 생명을 태어날 수 없다. 우리가 매일 
묵상하지 않으면 영적 애정이 식어진다. 갑작스럽게 교회 주일에 가면 세속
적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니다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정해서 지켜야 한다. 정신이 가장 깨어있는 시간을 정하라. 어떤 분
은 아침에 강하고, 어떤 이는 저녁을 선호한다. 언제 묵상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정신으로 묵상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좀더 많은 묵상은 주일에 적용된다. 하나님은 그 날 영적인 훈련을 하도록 
부르셨다. 교회에 다녀 온 후 집에 와서 설교 노트를 계속 숙고하며 묵상하
라. 특별히 가족과 함께 하라. 

<정리 | 주재형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