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이원론(二元論)적 사고(思考)에서 벗어나라! _장창수 선교사

0
337

 

 
긴 | 급 | 진 | 단

이원론(二元論)적 사고(思考)에서 벗어나라! 

장창수 목사_총회선교사(러시아)

이원론과 그 사고 방식이 지금까지 인류 사회와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이원
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주론적인 이원론(cosmological dualism)으
로 본질적으로 대등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갈등 관계에 놓여 있는 서로 적
대적인 두 신(神), 즉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우주(宇宙)에 함께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적인 이원론(metaphysical dualism)으로 천상적(天上
的)인 영혼과 물질적(物質的)인 육체라는 전혀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본질
이 인간(人間)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전자는 종교적(宗敎的)인 이
원론으로, 후자는 윤리적(倫理的)인 이원론으로 각각 발전했다. 
이원론은 비성경적인 사상이다. 이점을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
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
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
으리로다. 아멘!”(롬 11:36). 이런 점에서 이원론이 
어떻게 기독교 교회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알아내야 기독교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문자 그대로 성경의 원리대로 신앙
의 삶, 즉 성화(聖化)를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1. 일원론을 말하는 성경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天地)와 그 가운데 만물들을 창조했다고 기록한다(창 
1:1; 느 9:6). 다시 말해 이 우주에 창조주 하나님만이 유일무이(唯一無二)
한 최고의 존재임을 성경은 말한다. 이렇게 성경은 일원론(一元論: nonism)
을 분명히 주장한다. 에덴 동산에서 이미 존재하며 뱀을 통해 자신의 정체
를 드러낸 사단(창 3:1-15)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단과 그
의 활동은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인다(욥 1:12; 2:6). 
사단의 존재와 활동은 창조주 하나님의 허용(許容)으로 인해 가능했다. 이
를 위해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를 비우고 낮췄다. 창조 기사에 이미 하나님
의 자기비하(自己卑下)가 보인다. 물론 하나님의 낮춤은 자신의 선한 목적
을 위한 자기부정과 내려놓음이었다. 그 덕분에 사단은 선한 신(神)인 창조

주 하나님(God)과 대등한 악한 신(神: god)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허용
은 한시적(限時的)이며 일시적(一時的)이다. 주인은 자신의 소유물을 자신
의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주론적인 이원론은 기독교 성경의 창조 기사에서 일시적으로 암시
되었다. 그리고 이원론은 타락 사건(창 3장)을 통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
었다. 타락 이후 인류는 선한 신인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사단을 자신의 신
으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영적 세계에 중립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원론은 하나님의 일시적인 허용과 인류의 타락 결과 나타난 것으로 기독
교 성경이 암시했지만 성경의 일관된 주장은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이원론도 성경의 주장은 아니다. 하나님의 생기(生氣)가 흙으
로 지어진 사람 몸의 코에 불어넣어지자 몸 안에 동물적인 생명이 나타났고 
아울러 인간 영(靈)과 정신(精神)도 생겼다. 이들 전체를 합해‘생령’
(living soul) 즉 ‘살아있는 혼’이라고 성경은 말한다(창 2:7). 
이렇게 히브리인의 사고에서 볼 때‘혼’인 인간은 몸의 본질인 흙이라는 물
질과 생명, 정신과 영을 모두 합한 것
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영이 근본
적이다. 인간의 영이 떠나면 정신도 그리고 몸의 생명도 함께 사라진다. 그
렇게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히브리인의 인간 구조론이다.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유기체적인 존재
로 본다. 이 점에서 히브리인의 인간론은 헬라인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헬라인의 이원론에 근거한 인간론인 이분법(二分法: dichotomy)이나 삼분법
(三分法: trichotomy) 또한 비성경적인 이유이다. 
2. 이원론의 영향 아래 놓인 기독교 

학자들에 의하면 구약 시대에는 이원론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언제부터 이원론이 기독교에 침투되었는가? 이 침투는 두 번에 걸쳐 일
어났다. 
주전 6-7세기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그리고 남방 유다는 바벨론 제
국에 의해 각각 멸망당했다. 영적 또는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선민 이스라
엘의 멸망은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가 바벨론의 우상 신들에게 패한 것을 뜻
한다. 하나님 나라가 인간 나라에 의해 망했다. 하늘 나라가 땅의 나라에 망
한 꼴이었다. 
철학과 사상의 관점에 말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주장하는 히브
리인의 일원론
적인 사고 체계가 선신과 악신을 동등하게 보는 이방인들의 이
원론적인 사고 체계에 의해 무너진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남은 자
들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다(단 3
장). 이들은 이원론이 득세한 세상에서 일원론적인 신앙 체계를 고집한 진정
한 의인들이었다. 
주후 33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것은 구약 시대의 종말을 뜻했다. 일원론적인 히브리 사상도 함께 종말을 고
했다. 신약 시대 세상과 문화는 이원론적인 사고 체계를 보이는 헬라 문화
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했다. 이 때 신약 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신구약 성경 사이의 내용상 동질성이 인정된다면 신약 성경도 헬라어의 도움
으로 히브리인들의 사상인 일원론을 당연히 주장한다. 즉 이원론적인 헬라 
문화와 언어라는 그릇에 히브리인의 사상인 일원론이 담겨있는 셈이다. 헬
라 철학의 이원론의 도움으로 히브리인의 일원론이 재해석되어야 했다. 당연
히 이 둘 사이 혼란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헬라 문화권에서 이원론이 히브리인들의 사고인 
일원론을 
서서히 대체해 나갔다. 초대 교회에 이원론에 근거한 성경 해석과 
그에 따른 신앙 전통이 생겨났다. 이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을 통해 헬라인의 이원론과 그 가르침을 공
박했다(골 2:8, 20-23, 히 1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후 기독교 교회는 
거의 2천년 동안 헬라 철학과 문화에 계속 노출되었다. 
초대 교회 이후 교부(敎父)들은 철학의 도움으로 신학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고 노력했다. 시간이 흐르며 헬라 철학은 성경의 해석 방법으로 자리 잡았
다. 그리고 헬라 철학은 서로 상이한 기독교와 함께 서구 문화의 뿌리가 되
었다. 반면 교회는 헬라 철학의 나쁜 영향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노력도 했
다. 서구의 기독교 신학과 교리는 헬라 철학과의 타협과 배격이라는 이중 작
용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럼 헬라 철학의 문제는 무엇인가? 헬라 철학의 특징은 이원론에 바탕을 두
고 있는 이분법적인 사고 체계이다. 우주론적인 이원론의 영향으로 기독교 
교회도 선한 신과 악한 신을 나누어 생각했다. 이 종교적인 이원론은 형이상
학적인 이원론과 함께 철학자나 신학자들로 하여금 항상 대립
적인 개념으로 
사물들을 보고 사고하도록 만들었다. 
다시 말해 헬라인들은 히브리인들과 달리 일원론적인 구조 아래 사물들을 통
합적으로 보지 못했다. 이들은 사물들을 쪼개 나누어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이 우주와 세상은 선한 신과 악한 신에 의해 나누어지며 이에 따라 세상과 
사람들도 윤리적으로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고 사람 안에서도 이런 분리 현상
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 사고 덕분에 헬라인들은 사물들을 더 자세히 연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통합적인 진리를 배울 수 없었다. 이 당시 철학자나 신학자는 이를 전혀 깨
닫지 못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헬라인의 이원론은 논리적으로만 가
능한 주장으로 실제로 히브리인의 사고인 일원론에 따라 우주와 세상이 운행
됨을 이들은 전혀 알지 못한 데 있다. 즉 이들은 논리적인 이원론을 역사적
인 것이라 믿고 일원론적인 우주와 세상을 억지로 또는 인위적으로 나누기
를 좋아했다. 이렇게 이원론은 이분법적인 사고 방식을 제공했다. 
이원론에는 장점도 있다. 이원론은 대립적인 것들이 무엇임을 알게 함으로 
사물을 더 잘 설명해 준다. 사물들에서 서로 다른 것들을 발
견하여 연구함으
로 사물들의 양면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 양면을 대립시킨다. 이 
둘 사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이 덕분에 논리적으로 사물을 더 잘 연구
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서구의 철학계와 과학계의 연구 방법이었다. 
이것이 이들 학문 방법의 패러다임이었다. 예컨대 헬라인들의 대화법이며 헤
겔이 주장한 변증법(dialectic)이 이를 잘 증명한다. 
그러나 이 장점은 곧 단점이기도 하다. 헬라 철학은 기독교 성경이 주장하
는 일원론적인 우주관과 세계관 그리고 역사관을 버렸다. 그 결과 사물들을 
통합적으로 또는 통전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연구 방법을 잃었다. 이 철학
은 분리분석만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잘못은 역사적인 것을 논리적인 것으
로 착각한 결과였다. 즉 역사적인 현상들은 논리적으로 나눌 수 있지만 실제
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임을 이들은 잊었다. 이런 철학적인 실수와 잘못은 
그대로 기독교 교회에 두 가지 나쁜 영향을 주었다. 
첫 영향 때문에 신학자들은 성경 전체를 주제(主題: theme)라는 작은 부분들
로 나누어 논리적으로 해석하게 했다. 조직신학이 이를 잘 증명한다. 신론
(theolog
y), 인간론(anthropology), 기독론(Christology), 구원론
(sotereology), 교회론(ecclesiology) 그리고 종말론(eschatology)이라는 6 
가지 각론들로 나뉘어 성경은 오랫동안 연구되었다. 
그러나 이들 각론들은 한 성경에 모두 함께 기록된다. 이들이 함께 섞여 한 
사건에 기록되기도 한다. 예컨대 창조 기사(창 1-2장)는 이들 각론들을 모
두 함께 말해 준다. 그러나 조직신학은 창조 기사를 소주제 별로 나누어 연
구한다. 그 결과 창조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신학적인 주제를 놓친다. 이런 
단점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 사이 어떤 논리적인 연결성이 있는가를 연구
할 때도 똑같이 드러난다. 
극히 논리적인 조직신학은 성경을 통합적으로 해석할 줄 몰랐다. 그러나 통
합된 해석이 바로 성경 저자인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결과는 
논리성(論理性)을 위해 역사성(歷史性)을 쉽게 무시하는 이원론 자체가 갖
는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잘못은 각론 안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교회론에서 교회를 이렇게 나눈다. 승리한 교회와 전투 중인 교회,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 그리고 보편적 교회와 지역 교회 등등이다. 이
들 짝
들은 논리적으로 나눌 수 있지만 실제로 나눌 수 없다. 이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은 신자의 구원을 9단계로 나누어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이 논리에 의하면 칭의(justification) 다음 성화
(sanctification)가 온다. 그러나 실제 신앙의 삶에서 칭의와 성화는 절대
로 구분되지 않는다. 칭의는 성화의 출발점이며 성화는 칭의 결과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 사이 관계에 대한 심각한 논쟁은 논리성과 역사
성 문제를 기독교 교회가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둘째 영향 때문에 신학자들은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의 도움으로 성경을 연
구했다. 헬라 철학처럼 이들은 선한 신(神)이 영계(靈界)를 그러나 악한 신
이 물질계(物質界)를 주관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신구약을 대립
시켰다. 구약은 저급한 물질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을 말하지만 신약은 이 저
급한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말하는 하나님을 말한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창조 기사가 가진 신학적인 가르침들이 충분히 개발되지 못한 이유도 여기
에 있다. 타락 이후 구원에만 교회가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창조 
신학(창조의 영성)은 구원론(구속의 영성)의 내용과 방향을 제공하기 때문
에 아주 중요하다. 
선한 신과 악한 신 사이 대립과 투쟁은 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민족과 사람 
사이 성전(聖戰: holy war)의 정당성을 확립해 주었다. 영과 육 사이, 선민
과 이방인 사이, 의인과 죄인 사이, 선과 악 사이, 복음과 율법 사이, 교회
와 정부 사이, 믿음과 행함 사이, 은혜와 저주 사이, 생명과 사망 사이 그리
고 교회 안과 밖 등등 대립 구조의 도움으로 이들은 성경을 해석하고자 했
다. 
바로 이런 이분법적 사고 방식 때문에 교회와 인류 사회는 쉽게 분열되었
다. 신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둘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한 후 다른 쪽을 무
시하거나 멸시하거나 버려야 한다. 이 때문에 사상과 가치관 그리고 사람들
의 공동체에 구조적인 갈등이 생긴다. 
예컨대 신자들은 이방인들이나 불신자들을 무조건 미워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인 이방인들도 사랑했다. 성전(聖戰)의 정당성 때문에 교회도 
사람을 쉽게 상해하거나 죽일 수 있다. 중세 교회의 종교 재판과 십자군 운
동이 이를 잘 증명한다. 경직된 율법주의나 자유분방한 율법
폐기론도 사실 
이원론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다. 마찬가지로 쾌락주의나 금욕주의도 모두 이
원론의 산출물이다. 
사람들은 행복과 성공과 형통은 긍정적으로 보지만 불행과 실패와 고난과 환
란을 부정적으로 본다. 이것도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이다. 이에 따르면 사망
이나 질병이 하나님의 은총과 생명에 이르는 관문임을 모른다. 이원론적인 
사고가 기독교 교회에 기복주의 신앙을 삯 트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원론과 그에서 나온 이분법적인 사고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통합적
인 사고를 못하도록 막는다. 이것은 사단의 전략이다. 하나님의 일원론적인 
세계를 분열시켜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것이 사단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원론은 비성경적인 사고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는 이를 인식하
지 못한 체 오랜 동안 이원론의 포로 아래 놓였다. 이를 ‘신약 교회의 신바
벨론 포로기’라고 우린 명명할 수 있다. 

3. 일원론으로 돌아가야 할 기독교 

하나님은 사단의 존재와 활동을 통해 이원론이 인류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
이 되도록 잠시 허용했다. 인류 사회와 기독교 교회를 시험하기 위함이었
다. 아담의 타락 이전 
사단의 존재와 활동(창 3장)을 허용한 목적이 시험이
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원론이 지배하는 헬라 문화권에서 신약 교회와 신약 성경이 각각 
탄생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의 일원론이 세상에서 풍미하는 이원
론에 의해 무너지도록 하나님은 잠시 허용했다. 마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
호와가 바벨론의 우상 신들에게 패했던 것과 같다. 
그 당시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이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우세하
게 보였다. 그러나 이 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
다(단 3장). 마찬가지로 신약 교회는 이원론에 굴복하지 말고 일원론을 고집
했어야 했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는 거의 2천년 동안 이원론의 포로가 되었
다. 
예수님의 재림 사건은 신약 교회의 오랜 포로기를 끝낼 것이다. 그 때 일원
론이 다시 승리할 것이다. 이 승리는 영원할 것이다. 이 승리를 믿고 확신하
며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신약 성도들은 일원론에 바탕한 신앙고백적
인 삶을 재림 전까지 살아야 한다. 여기서 기독교 성경의 일원론을 다시 살
펴야 한다. 
구약 시대 다윗은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여호와
여! 광대하심
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
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 29:11). 다윗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만
유의 머리’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잘 설명한다. 여기 만유(萬有)는 하나님
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들을 뜻한다. 
머리라는 단어는 몸을 전제한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종속적(從屬的)이다. 
몸은 머리의 통제 아래 머리를 위해 존재하고 일한다. 만유로 지칭된 하나님
의 모든 피조물들은 바로 이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다. 몸의 지체들은 서
로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들 지체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도 그
리고 활동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은 사람의 몸과 같이 하나의 큰 유기체적
인 구조(organic system)를 이룬다. 그 안에 사단도 포함된다. 악인들도 의
인들과 함께 포함된다. 선민과 이방인들이 함께 존재한다. 교회와 정부도 함
께 위치한다. 즉 이원론에서 서로 대립적으로 본 것들이 이 시스템 안에서
는 전혀 대립적이지 않고 서로 돕는다. 이들은 이 구조 안에
서 머리인 하나
님의 뜻과 작정과 목적 또는 의지에 따라 존재하고 활동한다. 이들은 만유
의 머리인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따라 맡겨진 직분을 각자 나름대로 수행하
고 있다. 
그렇다면 이원론적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해석된 모든 것들은 일원론적 관점
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성공과 실패도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따라 성도의 
유익을 위해 발생하기 때문이다(롬 8:28). 일원론적인 사고에 따르면 교회
와 정부는 전혀 대립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
해 각각 일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서로 존중하며 하나님의 일을 잘 수행하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즉 서로 넘보지 말고 가진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를 영역주권사상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로마의 가이사는 하나님의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 맞다(마 
22:21). 
이원론의 세계에서 대립적인 것들은 일원론의 세계에서 하나도 대립되지 않
는다. 종국적으로 선과 악 그리고 하나님과 사단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사단과 악이 통제되기 때문이다. 사단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따
라 교
회를 대적하고 해치려 한다. 그러나 사실 사단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일할 뿐이다. 이 때문에 교회는 사단과 악과 싸워 이기려 노력하여야 하지
만 사단이나 악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을 절대로 미워하지 않는다. 

결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고려하는 일원론적인 사고만이 당연히 우주와 세
계 그리고 사물들을 통합적으로, 전체적으로, 유기적으로 그리고 통일적으
로 보도록 돕는다. 이 점에서 일원론은 이원론과 완전히 다르다. 일원론이 
성경적인 이유이다. 
최근 과학계에 통합의 바람이 불고 있다. 서구 과학계와 철학계는 종래 분리
분석 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동양 철학의 특징인 전체적이며 종합적
인 과학 방법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분법적인 사고를 제공하는 이원론적인 
방법만으로 불충분함을 이들이 깨달았다는 뜻이다. 일원론만이 통합적인 사
고를 제공한다. 
그러나 문제는 일원론이 창조주 하나님이나 부활의 주 예수님이 아닌 물질
에 근거한다면 기독교 교회는 또 다시 새로운 무신론과 충돌할 것이다. 현
재 자본주의가 득세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는 자본주의
라는 새로운 금신상
에 절대로 절하면 안 된다. 바벨론 제국을 건설한 느부갓
네살의 금신상처럼 하나님에 의해 일시적으로 허용된 거짓 우상에 지나지 않
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기독교 교회와 성도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새로운 금신
상에 절대로 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에 함몰되
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
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
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바울은 일원론이 주는 진정한 자유를 알고 느끼며 누렸던 사도였다. 성공과 
실패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하나님의 선한 뜻에 따라 하나님 자신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도의 개인 삶에 얼마든지 발생한다. 성도가 성공과 행복에 지
나치게 기뻐할 이유가 없으며 실패와 불행에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절망할 이
유가 없다. 이와 무관하게 성도는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주께 충성해야 
한다. 이
것을 확실히 깨달은 기독인이야말로 전천후 신자가 된다. 그가 바
로 믿음으로 사는 진정한 의인(義人)이다. 
이런 성도의 사고 체계에는 구조적인 갈등이 전혀 없고 항상 통일성이 있
다. 그에게 복음과 율법 사이 또는 믿음과 행함 사이 어떤 갈등도 없다. 이
들 사이 논리성과 역사성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 율법주의 또는 율법폐기론이
라는 양극단을 피할 수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획기적인 사건
들로 인해 초래된 성취된 구원과 완성된 구원 사이 또는 성취된 하나님 나라
와 완성된 하나님 나라 사이 어떤 충돌이나 갈등도 그는 전혀 느끼지 않는
다. 이들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유익은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에 근거해 사고할 때 얻어진다. 일원론
만이 신자에게 진정한 자유를 준다. 그리고 일원론에 의해서만 성경 자체 안
에서 모순되게 보이는 성구들이 통일성을 보이며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조하는 일원론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기독교 교회
를 신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