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2| 예배 찬송으로서 ‘시편 찬송’의 유익_서창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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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2

예배 찬송으로서 ‘시편 찬송’의 유익

서창원 목사

총신대학원 교수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 대표
삼양교회

예배 찬송으로서 ‘21세기찬송가’의 사용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 가
운데 지난 5월 29일 ‘시편찬송가공청회’가 열렸다. 역사적으로 개혁교회에
서는 예배 시간에 시편 찬송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는 점에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 호 “개혁교회 예배 음악과 시편 찬송”에 이어 서창
원 목사의 “예배 찬송으로서 시편 찬송의 유익”을 연재한다.<편집자 주>

1. 시편 찬송에 대한 미국 정통장로교회의 견해 

1947년 미국 정통장로교회 총회 석상에서 공예배 음악에 대한 보고서에서 당
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존 머레이 교수는 영감되지 않
은 것으로 노래하는 것과 영감된 말씀인 시편 찬송을 부르는 것에 대한 논증
을 특히 신약성경의 여러 사례를 연구하여 이렇게 발표하였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
을 찬양하고.” 머레이 교수의 지적에 의하면 이 본문은 오늘날 사람들이 잘
못 이해하고 있는 현대적 의미의 찬송과 복음송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아
니다.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용도를 보면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의 말씀은 
분명 시편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 방식임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1)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서 시편

시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다. 신약과 구약에서 사용
된 ‘시’라는 단어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서 발견하였듯이 그 단어들은 
한결같이 다 시편을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사용된 단어들의 
참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히브리어 ‘미스모르’를 번역한 사례들 대부분
이 시로 번역되었고 극소수만이 다른 히브리어 단어를 시로 사용하기도 했
다. ‘살모스’라는 뜻은 ‘찬미의 노래들’이라는 말이다. 
시편의 제목들에 자주 등장하는 ‘시’라는 말은 시편을 70인역에서 ‘살모
이’(PSALMOI)로 부르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의 히브리어는 
‘tehillim’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기자들이 헬라어로 된 구약 성경에 
친숙한 그들로서 ‘살모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의 마음에 구약의 시
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약의 사용된 단어 시
편들(살모이)이라는 말이 분명히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 시들을 시편
으로 불렀다. 
따라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사용된 시가 영감되지 않은 노래들을 가리
키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사례들이 다 영감
된 것으로 하나님을 노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시’라는 말은 
다 영감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린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처럼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
는 것이다. 
‘힘노스’라는 말도 70인역에서 17번 사용되었다. 그 중 13번이 시편에 있
다. 그 중 대 여섯 번이 히브리어 ‘네기노쓰’(Neginoth) 혹은 ‘네기나’
(Neginah)에서 번역되어 시편 제목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의 본문에 
언급된 대부분의 찬미라는 단어가 쓰인 사례들은 시편을 가
리키는 히브리어 
테힐림이라는 단어에서 번역된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시편이 찬미로 찬미가 시편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시편과 찬미가 서로 다른 분류의 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
의 시는 단순히 시만을 의미하지 않고 찬미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성경
에 사용되고 있는 찬미라는 말 자체가 영감되지 않은 어떤 노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오데’ 역시 힘노스보다도 더 많이 시편의 제목들에서 사용되었다. 36번이
나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대부분이 ‘삼노스’를 가리키고 있다. 이같
은 사례에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구약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단어
들이 여러 시대 여러 장소에서 영감 받아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에 의해 사용
된 시를 말하고 있다. 구약의 시편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구성된 
유일하고도 독특한 찬양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말하고 있는 것은 구약의 
시편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단어들이다. 더구나 신령한 노래라는 말을 사용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 즉 영감되지 않은 것에 
신령한 것
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적인 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2) 찬양의 세 가지 유형으로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는 말은 찬양의 세 가지 다른 유형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를 결코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 더 놀라운 것은 시편
의 몇몇 제목들에 보면 세 가지 단어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
라서 음율적인 작품들이 시와 찬미와 노래로 동시에 불려진 것이다. 
물론 이 세 단어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노래의 다양함과 풍부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즉 예배
에 있어서 하나님께 사용될 찬양의 풍부함을 나타내고 있는 세 가지 유형의 
표현이다. 

3) 성령께서 주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신령한 노래’(ODAIS PNEUMATIKAIS)라는 노래의 특성을 눈여겨보자. 우리
가 잘 아는 대로 페뉴마티카이스라는 말이 신약에서 성령을 지칭하고 있는 
단어이며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을 뜻하고 있는 단어다. 이것은 영적
인 사람들이 작사한 
것이나 영적인 분위기에서 주어진 것들과 같은 것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F B Meyer의 지적대로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 즉 ‘theopneustos’를 의미한다(엡 5:19절 참고). 
이 문맥에서 신령한 노래라는 말은 ‘성령에 의해서 지어진’ 것을 의미한
다. 마치 고린도전서 2:13에 있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서 영감된 말씀과 성령
에 의한 가르침과 같다. 물론 여기에 한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페뉴마티
코스’라는 말이 시나 찬미라는 말에는 붙지 아니하고 ‘오다이스’(노래)라
는 단어에만 붙었는가? 이다. 이 질문에 합당한 답변은 이것이다. ‘페뉴마
티카이스’는 모든 세 여격 명사에 해당되나 그 여격 명사의 성(여성명사)
은 그 명사와 제일 가까운 명사의 성에 끌리는데 기인한 것이다.
골로새서와 같이 접속사를 빼고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신령한 노래는 
시와 찬미와 같은 유형에 속한 형태의 노래로 보는 해석이다. 이것이 마이
어 목사의 견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시와 찬미와 노래들은 다 신령한 
것들이라는 말이다. 즉 성령에 의해서 감동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령에 
의해 영감되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사용될 수 있다는 주
장은 근거가 없다. 
문법적으로 ‘신령한’이라는 단어가 노래에만 해당된다고 할지라도 그 말
이 성령에 의해서 감동된 것 혹은 성령에 의해서 지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
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시와 찬미는 신령한 것이 아니라도 괜찮으며 오직 노
래만 신령한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와 찬미도 다 하나님의 감동을 주어진 성경의 시편을 의미하는 것
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시와 찬미를 한 종류로 신령한 노래를 다
른 종류로 분류해서 설명한다고 말할 수 없다. 시도 찬미도 영감된 것이며 
노래도 영감된 것인데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지어진 신령한 것으로 특징지어
지기 때문이다. 

4) 예배 찬송으로 합당한 시편

이상의 논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영감되지 않는 노래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영감되지 않은 노래들을 부르는 것에 대
한 성경적 근거가 없다.
둘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다 성령에 의해 감동된 것들임을 명백하
게 증
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예배에 있어서 영감된 말씀으로 찬양하는 것
이 마땅하다.
셋째, 시편이 우리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도와준다. 에베
소서 5:19과 골로새서 3:16은 바로 시편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감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
서 찬양해야 함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예배에 있어서 무엇을 사용
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것은 반드시 성경에 한정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2. 시편찬송의 유익

칼빈은 시편 찬송을 부르는 목적을 세 가지로 언급하였다. 하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둘째는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과 셋
째는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기를 기도하기 위
한 것이라고 했다. 실지로 칼빈은 찬미의 제사를 올바르게 드리는 올바른 방
법에 관해서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원칙이 시편에 있다고 믿었다. 이 부분
과 관련하여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히브리서 13:15에 나오는 “찬미
의 제사”(thusian ainesews)라는 표현이다. 

1) 찬미의 제사에 대한 이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항상 우리 하나님
께 드려야 한다. 히브리서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신약
의 성도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음을 논증한다. 그러나 여전히 신약
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는 제사가 있다면 하나님을 찬미하는 제사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이미 송아지를 잡아 제사하는 대신 
우리 입술의 제사를 주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호 14:2). 
칼빈은 이 사실을 그의 주석에서 말하기를 ‘신약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
장 적절한 방법은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정직
하게 부를 입술이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히
브리서 기자가 상기시켜 주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찬양을 부
르는 일은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칼빈은 찬미의 제사가 
다른 제사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율법 아래에서 사용
되고 있는 모든 외형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임을 
지적하였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이 부분을 강해하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인하
여 복음에 순종하는 삶에는 반드시 감사가 포함되는데 이처럼 순종과 감
사를 다 포함하여 찬미의 제사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제사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볼 때 제사는 반드시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집전되어야 한다. 
때문에 찬미의 제사 역시 사람들의 고안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노래되어져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즉, 반드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에 근거하고 있는 찬양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임의
로 지어내서 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보다 이미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인지 계시의 말씀
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행해지는 찬양이 주님의 교회에서 
불러져야 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제사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불로 분향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을 받
은 아론의 두 아들들(나답과 아비후의 사건, 레 10:1-3)의 경우처럼 비록 우
리들이 주님이 합당치 않게 여기는 것들로 하나님을 찬양해도 당장 징벌하
지 않는다고 해서 시편찬송이 없어도 된다고 할 수 없다. 가장 
성경적인 찬
양은 무엇보다도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반드시 개혁주의의 바른 신학과 신
앙을 담고 있는 합당한 가사여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부름받은 백성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으시고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
을 이렇게 단언하셨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
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어 ‘테힐라
티’(Tehilati, my praises)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시편을 가리키는 테힐
림에서 나온 단어로서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공적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들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찬양을 불러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백성이 되도록 지음을 받았다. 찬양은 
그들이 지은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찬양을 불러야 한다. 이 말과 가장 가
까운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은 E. J. Young박사가 이사야서 주석
을 쓰면서 언급한 것과 같이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
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
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 

여기서 대다수의 영어 성경은 우리말에 덕으로 번역된 ‘아레아테스’를 하
나님의 찬송들로 번역하였다. 즉 하나님께 가장 영광을 돌리는 길이 무엇이
겠는가? 그의 하신 일들을 온 땅에 선포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
는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도록 지음을 받았고 우리의 택함과 구속함의 목적 역
시 주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성도들의 삶에서 이루
어져야할 특별한 것이라면, 성도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음악
에 있어서 하나님의 찬송 즉 시편을 부르는 것이야말로 마땅한 일이라고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3. 교회는 시편 찬송으로 하나님 찬미해야

시편찬송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이해가 충분하지 못할지라도 한국교회 특히 
정통보수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개혁교회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
님을 찬송하라고 주신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우리의 
신학
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와 정반
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까지도 아무런 제재가 없이 허용되어지고 있다
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맡은 지도자로서 회개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국 교회 안에 시편찬송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몇몇 교회들에서 개별적으
로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는 시점에서 교단이 이 일에 앞장서 보급한다면 하
나님의 진리가 온 성도들의 입술과 가슴에 새겨지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동시에 교단의 경제적 수익성 측면도 크게 기여하리라고 본다. 같
은 신학과 신앙을 가진 교단들과 그 외의 성도들이 시편 찬송가에 대한 관심
이 지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본 논고를 마치면서 교단적으로 시편찬송가 편찬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국 교회에서도 시편이 예배 음악으로 시편이 불려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날이 속히 오기를 열망하는 주님의 뜻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기도한
다. 더욱이 우리 교단의 헌법에 실려 있는 예배 모범에서도 주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다루면서 시편을 부르라고 권장하고 있는 것같이 시편 찬송가
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는 주
의 백성들의 손에 쥐어줄 수 있기를 소
망한다.

끝으로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시편이야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올바른 방식을 완벽하게 가르치는 책’이라고 했다. 그 안에서 ‘우리
의 종교적 의무를 바르게 수행하도록 강력하게 자극한다’고 했다. 뿐만 아
니라 ‘어떻게 하나님과 교통할지를 가장 정확하게 지도해 준다’고 했다. 
이 놀라운 시편의 능력을 온 성도들의 입속에서 경험되어지며 삶에서 배어나
게 하는 신학교육적 효과를 만끽하는 날이 오게 되길 기대한다. 시편찬송을 
통해서 경건과 거룩과 의로운 삶을 형성하며 날마다 져야 할 십자가를 우리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감당케 되는 참 성도들로 가득한 조국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