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한국교회 목회관은 건강한가?
모성적(母性的) 목회와 부성적(父性的) 목회
장창수 목사_총회 러시아 선교사
사도 바울은 믿음의 역사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말하면서(살전 1장) 자신의 목회 방식을 설명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라 오직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
게 하려 했다(살전 2:4). 바울은 이런 목회 자세에 대해 로마서(롬 15:1-
2), 고린도전서(고전 10:33) 그리고 갈라디아서(갈 1:10)에서도 말했다.
목회에 대한 그의 언급은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바른 목회 방법이 무엇이며
아울러 당시 많은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사람을 기쁘게 하려 했음
을 잘 설명한다.
1. 목회자는 아첨과 탐심의 탈 벗어야
교회의 강대 상에서 복음을 말하지만 목회자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기쁘
게 하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복음
을 전하는 자의 마음을 살핀다고 말함으
로 목회자들을 경고한다. 또 다시 사
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
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살전 2:5).
목회자가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마음에 아부하려 할 수 있다. 인기를 얻기
위함이다. 자연스럽게 그는 신자들의 감성(感性)에 초점을 맞춘 설교를 하려
는 유혹을 늘 받는다. 결국 이 유혹은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고 복음
을 말하도록 목회자를 늘 시험한다.
실상 이런 목회자의 설교는 복음이 아니다. 복음의 형태로 잘 포장된 탐심
이 가득 찬 인간의 아름다운 말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예수
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보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더 탐할 수 있다(요 5:44). 정말 삼가지 않으면 목회자는 자신도 모
르게 하나님의 일을 핑계하며 사람의 일을 추구한다.
여기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하나님 앞에 마음의 동기가 잘못되었지만
목회자가 사람 앞에서 복음 전파에 열심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사역 자세만
으로 목회자의 진실성 여부는 알 수 없다. 둘째, 목회자는 복음을 핑계하며
사
람들의 존경과 영광을 얻으려는 유혹과 시험에 항상 빠진다. 셋째, 진실
한 목회자라면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억지로 구하지 않는다.
2. 목회자는 유모와 같아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마땅히 받아야 했다. 그
러나 그는 그런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살전 2:6). 그 이유를 이렇게 그는 말
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
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
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 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 2:7-8).
여기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목회자가 교인들을 진정 사랑한다면 교인에게
서 영광을 구하기보다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기를 즐겨 한다. 교인들
을 출세의 기반으로 삼지 않고 양육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를 자세
히 설명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목회를 유모의 생활과 비교한 것은 몹시 흥미
롭다. 유모는 누구인가? 유모는 종으로서 주인의 자녀를 맡아 친어머니처럼
자신의 젖으로 먹여 기른다(출 2:7-9). 유모는 주인의 자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유
순함이 유모의 특징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인 유모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자들을 자신의 자녀
처럼 양육한다. 목회자도 신자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목회자에게도 유모
의 유순함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유모처럼 언제든지 신자들에게 젖을 물
릴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유모 같은 목회자는 조심스럽게 음식을 가려가며 충분히 먹는다.
그의 젖은 성장에 유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모는 따뜻한 젖을 먹이
기 위해 항상 몸과 손을 따뜻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도 영과 마음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따뜻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목회자의 이런 노력과 헌신이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알려져야 한
다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살전 2:9-10). 목회자의 이런 헌신과 봉사가 교회
의 공동의회를 통해 공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3. 목회자는 아버지와 같아야
사도 바울은 모성적 목회만 말하지 않는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
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
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
이 행하게 하려 함
이니라”(살전 2:11-12).
어머니가 사랑의 화신(化身)이라면 아버지는 권위의 화신이다. 유모 같은 목
회자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을 잘 양육해야 한다(요 21:15-
17). 다른 한편 목회자는 아버지로서 어느 정도 자란 성도들을 말씀으로 가
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그 목적은 하나님께 합당이 행하는 성숙한 하나님
의 아들로 세우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목회자를 교사로 세웠고 그
에게 영적 권위를 주었다.
부성적 목회의 영역은 셋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며 경계한
다. 목회자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행하도록 권면한다. 행함
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 목회자는 신자들을 위
로하여야 한다. 행함에 있어 성도들이 실패하여 실망하거나 좌절할 수 있
다. 이 때 목회자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다시 세워주어야 한다. 그리고 신자
들은 늘 순종하지 않는다. 이 때 목회자는 신자들을 책망하고 경고해야 한
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으로 목회자는 책망해야 한다. 부성적 목회도 사랑
에 근거한다.
4. 목회는 치우치지 말아야
모성적 목회와 부성적 목회,
이 두 가지 방법으로 바울은 사도 역할을 수행
했다. 이들 방식이 모두 한 본문에 함께 언급되었다. 목회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목회자는 어머니 같은 사랑과 아버지 같은 권위
를 동시에 가져야 한다. 목회자는 둘 중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하면 안 된다.
한국의 목회자들 대부분은 모성 목회보다 잘못된 부성 목회에 치우친다. 어
릴 때부터 유교의 가부장적 문화에 몸에 젖어 있어 권위만 추구한다. 그러
나 목회자의 권위는 직분이 주는 권세나 권위보다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자녀
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봉사와 섬김의 자세에 있다(마 20:28; 엡 4:11-
12). 목회자는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거나(고후 1:24), 주장할 수 없기 때
문이다(벧전 5:3). 이 일들은 오로지 하나님 또는 예수님께만 속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목회자들은 영적 권위를 불의하게 사용한다. 이 때문에
목회자가 마치 교회의 왕처럼 또는 독재자처럼 보인다. 이런 목회자는 어느
누구의 견제나 제동을 받지 않는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의 부활체인 교회
를 자기의 개인 기업체처럼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많은 한국 교인들은 이런 스타일의 목회자를
더 좋아하고 잘 따
른다. 그에게 있는 카리스마를 좋아한다. 유교 문화권에서 한국인이 항상 지
도자 아래 피동적으로 살아온 결과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지적대로 목회
자의 영적 권위는 성도의 양육과 훈육에 한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이 이외
함부로 권위를 사용해선 안 된다. 목회자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
로써 다른 교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아 똑같이 하나님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부성적 목회의 상실로 인해 한국 목회자들의 치리(治理)는 그 힘을 잃
고 있다. 교인들이 잘못 가도 목회자들은 책망하지 않는다. 책망들은 교인들
이 다른 교회로 갈 것을 겁내기 때문이다. 이의 잘못은 무엇인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의 성숙한 지체로 자라도록(엡 4:12) 가
르치고 권면하며 위로하고 책망하는 목회자의 근본적인 사명이 망각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양적 성장만 고려하여 이런 사명에 따른 의
무와 책임을 게을리 한다. 결국 이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자신을 부르
고 사명을 준 하나님을 무시하는 거짓 목자가 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모성적 목회 자세가
있는가? 위에서 말한 유
모의 목회 자세는 찾기 힘들 것이다. 맡겨진 양들인 성도들을 영적으로 살찌
게 하기보다 자신을 살찌우기에 더 바쁘다(겔 34:2~3). 양적 교회 성장만 목
표하는 교회 성장론의 위험성이 여기 지적된다. 그리고 목회자는 음식을 잘
가려먹고 잘 씹어 소화시켜 성도들을 위해 양질의 젖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바른 신학에 바탕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 목회자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때 비로소 성도들
을 살찌울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한 목회 프로그램에 몰두
하면 신학을 쉽게 무시한다. 그 결과 목회 프로그램에 바빠 하나님의 말씀
을 깊이 묵상할 틈을 얻지 못 한다.
이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목회자 자신이 영양실조에 영적 빈혈 증세
를 보이고 차례로 교인들도 영양실조에 걸린다. 이를 해결하려고 목회자는
성경보다 세상 철학과 사상에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찾아 손쉽게 설교하
려 한다. 그러나 말과 지혜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이 세상 철학과 사상은 초
등학문에 지나지 않는다(골 2:8). 이렇게 교회는 복음을 상실한다. 겉으로
는 교회에 양식이 풍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신자들이 굶주린다.
어떤 비극과 불행이 이런 교회에 오는가?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이 신봉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사이 어떤 차이도 찾지 못한다. 이미 오래된 한국 교
회의 정체(停滯) 현상과 최근 10년 간 카톨릭 교회의 급성장이 이를 잘 증명
한다. 그리고 교회가 영적으로 메마르면 목회자의 가부장적인 권위 의식은
종교적인 형식주의나 율법주의와 쉽게 어울리며 더 안주하려 한다. 이런 것
들이 영적 생명력을 잃은 교회와 신자들에게서 보여지는 현상들이다.
5. 전통적인 것도 지켜야
이 모두 하나님이 아닌 신자나 목회자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복음을 잘못 전
한 무서운 결과이다. 처음 조그만 차이라고 쉽게 무시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차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목회 방법에 대한 바른 지식과 방법상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 중
요하다. 현대적인 목회 방법도 필요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했고 우리
가 전해 받은 목회 방식을 지키는 것도 더 필요하며 너무나 중요하다. 데살
로니가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이를 잘 증명한다(살전
1장).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침체 현상은 사도 바울의 목회에서 멀리 벗어났음을
잘 증언한다. 목회자가 교회 성장만을 목표하지 말고 성경적인 바른 목회를
지향한다면 사도 바울이 목회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한국 교회도 부흥할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