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의 “목사의 딸”에 대한 유감
< 허순길 목사, 전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
“혜란이 말한 것 가운데 혹 어떤 것은 사실일 수 있다. 목사요, 신학자 박윤선이라고 무흠할 수 없다. ‘이 생애에서 우리의 최상의 선행조차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 하지만 주님은 이런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교회건설을 위해 써 주심에 감사한다”
“헤란은 그의 아버지를 유교적 칼빈주의자라고 하며, 그의 신학이 남존여비, 충효 사상에 영향을 받은 신학이라고 하며 배척한다. 그는 가능한 한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그의 아버지의 신학을 폄하하고 있다. 거기에는 극한 자만과 여자로서 목사 안수 받은 여권에 대한 자기 변호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칠순을 넘어 할머니가 된 그가 결혼생활이 불행하였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현재 살아있는 남편의 결점을 낱낱이 들추어 활자화하여 온 세상에 공포하였다. 이런 아내, 이런 여자가 세상에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이를 볼 때에도 그가 그의 아버지에 대해 그려 놓은 회화가 조작이요, 악의에 찬 소설임이 분명하다”
시작하는 말
나는 최근에야 박혜란이 쓴 “목사의 딸”이란 책을 접했다. 그동안 이 책을 읽은 분들은 딸이 그의 아버지 박윤선 목사에 관해 쓴 글이기에 놀랐을 줄 안다. 내가 놀란 것은 그 책에서 보여준 그의 자만한 품격과 내용 대부분이 허구이기 때문이다.
혜란은 파격적인 자기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예순아홉 살’이 되던 2009년 4월에 “김상복 목사의 권유로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KALCAM)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라고 자랑한다.
그는 미국 시민권소유자이다. 거기에선 65세가 되면 일반적으로 은퇴한다. 하지만 ‘예순아홉 살’에 목사 안수를 받고 “비로소 내가 서야할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교회 역사상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일로 보인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이런 문제를 거론하려는데 있지 않다. 책의 내용 대부분이 허구요, 이것이 주님의 교회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50년대 박윤선과 그 가정을 조금은 알고 있다. 1954년 고려신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7년을 고려신학교 경내에서 지냈다. 대학부(칼빈학원) 4학년 때 박윤선의 셋째 딸 은란의 과외교사로 한 학기 동안 그의 집에서 밥을 먹고 지냈고, 이어 신학교 본과에 들어서면서 그의 조교로서 졸업 때(1959)까지 3년 동안 풀타임으로 그의 주석 원고를 정리하고 도왔다. 이때 박혜란은 경남여고를 다녔고 이어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박혜란은 한국 교회가 자기 아버지의 신학과 생활을 바로 판단하도록 글을 쓴다고 했다. 그 책의 핵심 내용은 그의 아버지 박윤선의 신학이 바르지 못하고 그의 생활도 잘못되었다고 아버지를 비하(卑下)하며, 이제 그가 남긴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 그 이름을 잊어버리자는 요구이다.
그의 아버지 박윤선은 50대 전후 생의 황금기 13년 동안 고신의 개혁주의 신학을 주조했고, 만년에 합신에서 개혁신학교육에 봉사함으로써 평생을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건설에 헌신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 종이었다.
혜란이 말한 것 가운데 혹 어떤 것은 사실일 수 있다. 목사요, 신학자 박윤선이라고 무흠할 수 없다. “이 생애에서 우리의 최상의 선행조차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 하지만 주님은 이런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교회건설을 위해 써 주심에 감사한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그의 아버지 박윤선을 단순히 변호하려는데 있지 않다. 혜란이 아버지가 전처 자식들에게 무관심하고 새어머니가 그들을 홀대했다는 데 대한 증오로 허구한 화상을 그려 주님의 교회에 무서운 해악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잠잠할 수 없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 사랑을 말하지만 용서 없는 그의 위선
어머니를 잃고 계모를 갖는다는 것은 큰 불행이다. 계모가 아무리 전처의 자녀들에게 잘해도 칭찬을 듣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이화주 사모는 체격이 크고 외모가 여성보다 남성스럽게 보이는 분이다. 그래서 어린 전처 자녀들에게 섬세함이나 온화함을 느끼게 하는 데에는 결핍할 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혜란이 말한 대로 그가 항상 전처 자녀들에게 ‘배은망덕한 전처 자식’이라고 하며 박해를 가할 분은 전혀 아니었다. 그런 분이었다면 전처 딸 은란이를 위해 어떻게 과외교사를 둘 수 있으며, 서울대학에 입학한 혜란의 등록금을 댈 수 있었겠는가?
박윤선 교장은 정말 돈도, 살림도 모르는 분이었다. 혜란은 이화주 어머니의 배려를 고마워했어야 한다. 이화주 사모는 등록금을 보내고 나서 월급날을 기다릴 수 없어 돈을 빌리러 부산 중구 남포동에서 외국 잡지 노점상을 하는 혜란의 큰아버지에게 나를 보낸 적이 두 번 있었다.
혜란이와 남매들이 새어머니로부터 좀 홀대를 받고 심적으로 박해를 받았다고 인정하자. 그도 분명 새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간혹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아무튼, 오랜 세월 후에 모두 미국에 살면서 서로 만나 “어머니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했고, 이화주 어머니도 “피차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함으로 서로 용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 L.A.에 있는 새어머니를 방문하여 한 방에 같이 자게 된 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처음 한 방에 같이 자면서 지나온 삶을 자유롭게 말씀드릴 수 있었다. 새어머니는 당신의 침대를 내게 주시고 당신은 방바닥에서 주무셨는데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라고 했다(p.161). 모녀가 서로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으므로 어두운 지난날을 다 청산했다.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혜란은 새어머니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았다. 지난날의 일들을 잊거나 버리지 않았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기억하여 글로 옮기고 그의 새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곧 기다린 듯이 세상에 책으로 펴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신다”(시103:12, 사38:17)라고 하며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라고도 했다(미7:19). 주님의 자녀인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는 용서를 말하면서 용서하지 않았다. 무서운 위선자이다. 글로 사랑을 말하면서 마음에는 미움의 독을 그대로 간직해 왔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 박윤선의 자녀로 누린 특권을 외면
혜란은 그의 아버지가 전처 자녀들에게 무관심하여 큰아들 춘호, 미국에 간 춘자와 요한을 돕지 않았다고 원망했다. 6.25 전쟁 직후 우리 모두가 끼니를 채우지 못하던 어려운 1950년대에 그는 훌륭한 아버지 덕에 남들이 꿈도 꾸지 못한 특권을 누린 사실을 전혀 잊고 있다.
춘호는 1953년에 결혼하여 가정을 이뤘다. 혜란이 말한 대로 그는 영어도 잘하고 똑똑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가정을 외면하고 술을 마시고 방탕한 길에 들어섰다. 성년이 되어 가정을 가졌으면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가정을 돌봐야 했다.
그 시절에는 정말 죽기 살기로 일해야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그는 늘 술에 취하고 방탕한 생활을 계속했다. 혜란도 그의 방탕한 생활을 언급은 했다. 그러나 춘호가 부모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었는지는 말하지 않고 숨겼다. 단지 부모가 그를 도와주지 않은 것만을 원망했다.
그는 종종 밤에 만취되어 아버지 집에 찾아와 돈을 요구하고 문을 부수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니 부모로서도 그가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혜란은 자기 오빠가 아침에 밖에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부모로서 만취해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기에 학생들을 시켜 그렇게까지 하였겠으며, “모든 것을 다 접고 시골에 가서 글이나 써야겠다”라고 말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그 어려운 현장의 목격자이기도 하다. 혜란은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않고, 독자를 오도하고 그의 아버지를 잔인한 분으로만 부각시키고 있다. 정직하지 못하다.
그리고 미국에 유학 간 춘자와 요한이 아버지에게서 어떤 경제적인 도움도 받지 못한 것을 원망했다. 1950년대에 외국에 유학한다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우리 같은 평범한 가정의 자녀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미국에 특별한 인연을 가진 분이 없는 한, 혹은 선교사들의 도움이 없는 한 미국에 갈 수 없었다.
춘자는 그의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된 한 미국 가정의 호의로 고등학교를 마친 후 바로 1953년에 미국 유학을 할 수 있었다. 누구든 미국에 가면 장학금을 받아도 일하여 고학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시간을 내어 남의 집 정원에 풀을 깎거나, 집이나 사무실 청소를 하거나, 식당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어 공부했다. 한국은 당시 보내줄 외화도 없었고 돈이 있어도 보내 줄 길이 없었다. 그런데 혜란은 그의 언니 춘자가 돈이 없어 석사 논문을 쓰지 못했다면서 아버지를 원망한다.
요한을 양자로 보낸 것도 미국에서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아버지의 목적이었다. 당시에는 어떤 길이라도 미국에 가는 것이 모든 젊은이의 소원이었다.
혜란은 자기들이 아버지, 박윤선의 자녀이기 때문에 남다른 특권을 누려온 사실을 조금도 생각지 않고 그의 아버지와 계모 이화주가 전처 자식에게 무관심해 도와주지 않았다고만 원망한다. 칠순이 지난 딸, 혜란의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는 것이 안타깝다.
- 아버지의 딸, 한 남편의 아내로서의 행태
혜란은 거의 30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 박윤선에 대해 가능한 극단적인 모든 표현을 동원하여 매장하려 한다. 그의 아버지를 의처증을 가진 분이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손찌검까지 한 적이 많다고 하다가, 점점 강도를 높여 마침내는 “상습적으로 구타했다”라고 한다.
물론 부부가 다투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잉꼬부부라 해도 서로 자란 배경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므로 가끔 서로 다툴 수 있고, 밀고 당기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목사 박윤선도 인간이니 그럴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부부 사이는 칼이 물을 베어 가르지 못하듯 그 사이는 순간적으로 멀어졌다가 곧 제자리로 돌아온다. 가끔 다툰 일이 있다고 해서 아버지를 상습구타자로 몰고 가는 것은 악의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혜란이 그의 남편에 대해 그린 화상은 참으로 가관이다. 그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마음에 맞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여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이혼을 생각했다고 하며, 남편이 가진 결점을 하나하나 들춰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만하게 보이기까지 한 그의 자존심이 아버지가 강요한다고 자기가 싫어한 남자와 결혼할 분은 전혀 아니다. 자기가 좋아 결혼하고 뒤에 마음에 차지 않으니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아무튼, 그는 결혼하여 4남매를 두고 일곱 손자녀까지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칠순을 넘어 할머니가 된 그가 결혼생활이 불행하였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현재 살아있는 남편의 결점을 낱낱이 들추어 활자화하여 온 세상에 공포하였다. 이런 아내, 이런 여자가 세상에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이를 볼 때에도 그가 그의 아버지에 대해 그려 놓은 회화가 조작이요, 악의에 찬 소설임이 분명하다.
혜란은 현재 그 남편과 같이 살고 있는지, 그 남편은 아내가 쓴 책을 읽고 어떤 독후감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목사의 안수를 받은 여목사 혜란의 행태는 정말 주의 이름에 큰 욕을 돌리고 있다.
그리스도인 가정생활 윤리에 대한 기본도 갖추지 못한 그가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설교하고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 박윤선의 빠른 재혼에 대한 불만
1954년 3월 김알렌(金愛蘭) 사모가 불의의 차 사고로 돌아가셨다. 당시 집에는 요한, 혜란, 은란, 단열 사 남매 중 요한은 곧 도미하고 어린 삼 남매가 남았다. 박윤선은 그의 아내에 대한 비보를 받고 유학 중에 있던 네덜란드에서 바로 귀국했다.
그는 정말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신념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가르치는 분이지 가정을 다스리고 돌볼 수 있는 자상한 아버지는 못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황한 나머지 집안이 정리되는 동안 얼마 동안 아이들을 혹 합당한 고아원에 맡길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한 것이다.
혜란이 뒤에 이를 알았을 때 충격을 받았을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장성한 그로서는 당시의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를 하고 동정심을 가졌어야 한다.
당시 학생들인 우리들도 어린 아이들만 남은 그 가정의 형편을 알고 안타까워했다. 그 형편을 잘 아는 신학교 이사들과 교계 지도자들은 박윤선 교장의 가정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문제 해결의 길은 좀 무리가 되지만 가능한 한 빨리 재혼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처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10월) 재혼을 성사시켰다. 재혼 상대는 6・25 전쟁 시 북한에서 혼자 피난 왔다가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여 1952년에 졸업하고 교회를 봉사하고 있던 이화주 전도사였다. 상처 후 상당히 빠른 재혼이었다. 그러나 당시 어려운 그 가정 문제의 해결은 이 길밖에 없었다.
물론 박윤선 목사도 이를 원하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자녀들인 혜란, 은란, 단열을 위한 일이었다. 혜란은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과 의논 없이 일찍 재혼한 것만을 탓하고 있다. 어릴 때는 이해를 못 했어도 장성해서는 이를 이해하고 오히려 감사해야 했다.
- 박혜란의 편향된 신학
박혜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자들을 만나 사랑이 지배하는 가장 좋은 신학을 했다고 하며, 사랑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행복해한다. 이 좋은 신학이 “목사의 딸”을 쓰게 한 것으로 보인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 모든 가능한 힘을 동원하여 아버지 박윤선의 신학을 폄하하도록 만든 신학이 결코 좋은 신학일 수 없다. 역설적으로 그가 강조하는 사랑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신학이 하나님의 사랑에 편중될 때 하나님의 공의, 죄와 회개는 무시하게 된다. 오늘 죄를 경시하는 교회 생활이 여기에서 왔다. 칼빈주의 신학은 언약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인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면서 순종의 의무를 요구하신다.
우리가 약속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에 따른 순종의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기에 우리는 거듭 회개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기 때문이다.
헤란은 그의 아버지를 유교적 칼빈주의자라고 하며, 그의 신학이 남존여비, 충효 사상에 영향을 받은 신학이라고 하며 배척한다. 그는 가능한 한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그의 아버지의 신학을 폄하하고 있다. 거기에는 극한 자만과 여자로서 목사 안수 받은 여권에 대한 자기 변호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신학이 영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신학이라고도 한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부르짖었다. 바울이 그의 몸을 사망의 몸이라고 할 때 그는 이원론자였는가? 물론 아니다.
혜란은 그의 아버지가 늘 죄인임을 고백하고, 죽기 살기로 기도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의 복음이 ‘다른 복음’이라고 하며 정죄한다. 우리는 의인이면서 죄인이기에 항상 죄를 회개하고, 죽기 살기로 기도하고, 죽기 살기로 봉사하기 원한다.
특별히 1950년대에 살던 우리는 더욱 그러했다. 오늘 우리가 그렇게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공덕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고, 주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칼빈주의이다.
혜란은 그의 아버지의 주석이 “참고할만한 것이 없고 빈곤하다”라고 하며 폄하한다. 모든 주석은 제각기 특징이 있다. 박윤선의 주석은 특별히 설교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쓴 칼빈주의 신학에 입각한 실용적인 귀한 주석이다. 지난날 수만 명의 설교자가 도움을 받아 왔고 지금도 도움을 얻고 있다. 혜란은 이 책들을 폄하하고 송두리째 땅속에 묻어버리기를 원한다. 고약한 심술이다.
나아가, 딸 혜란은 “한국교회가 이렇게 큰 결함이 있는 분을 칼빈주의 대학자로 숭상하는 것이 안타깝다”라고 하며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그는 세상에서 박윤선의 이름이 지워지기를 원한다. 사랑을 말하는 그가 이미 하늘나라에 간 그의 아버지를 향해 살인적인 독을 뿜어내고 있다.
빗나간 딸이 폄하하고 정죄한다고 해서 박윤선의 신학이 세상에서 결코 무시를 당하거나 정죄 되거나 묻히지는 않을 것이다. 혜란은 하나님이 반세기 동안 그의 아버지 박윤선을 들어 쓰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항의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실 일이 아니고 복 받들 일이 아니다.
마치는 말
할 말이 더 많으나 이것으로 마치려 한다. 박혜란은 이 책을 성령의 인도로 쓴 것이 아니고, ‘다른 영’의 지배를 받아 쓴 것이 분명하다. 언제나 주의 교회에 해독을 끼치고 무너뜨리려는 영 말이다.
주의 교회에 백해무익한 이 책을 목회자들, 신학생들, 교회지도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라고 책머리에서 추천한 분들로 마찬가지로 보인다.
< 허순길 목사, 전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
“혜란이 말한 것 가운데 혹 어떤 것은 사실일 수 있다. 목사요, 신학자 박윤선이라고 무흠할 수 없다. ‘이 생애에서 우리의 최상의 선행조차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 하지만 주님은 이런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교회건설을 위해 써 주심에 감사한다”
“헤란은 그의 아버지를 유교적 칼빈주의자라고 하며, 그의 신학이 남존여비, 충효 사상에 영향을 받은 신학이라고 하며 배척한다. 그는 가능한 한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그의 아버지의 신학을 폄하하고 있다. 거기에는 극한 자만과 여자로서 목사 안수 받은 여권에 대한 자기 변호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칠순을 넘어 할머니가 된 그가 결혼생활이 불행하였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현재 살아있는 남편의 결점을 낱낱이 들추어 활자화하여 온 세상에 공포하였다. 이런 아내, 이런 여자가 세상에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이를 볼 때에도 그가 그의 아버지에 대해 그려 놓은 회화가 조작이요, 악의에 찬 소설임이 분명하다”
시작하는 말
나는 최근에야 박혜란이 쓴 “목사의 딸”이란 책을 접했다. 그동안 이 책을 읽은 분들은 딸이 그의 아버지 박윤선 목사에 관해 쓴 글이기에 놀랐을 줄 안다. 내가 놀란 것은 그 책에서 보여준 그의 자만한 품격과 내용 대부분이 허구이기 때문이다.
혜란은 파격적인 자기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예순아홉 살’이 되던 2009년 4월에 “김상복 목사의 권유로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KALCAM)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라고 자랑한다.
그는 미국 시민권소유자이다. 거기에선 65세가 되면 일반적으로 은퇴한다. 하지만 ‘예순아홉 살’에 목사 안수를 받고 “비로소 내가 서야할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교회 역사상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일로 보인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이런 문제를 거론하려는데 있지 않다. 책의 내용 대부분이 허구요, 이것이 주님의 교회에 큰 해악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50년대 박윤선과 그 가정을 조금은 알고 있다. 1954년 고려신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7년을 고려신학교 경내에서 지냈다. 대학부(칼빈학원) 4학년 때 박윤선의 셋째 딸 은란의 과외교사로 한 학기 동안 그의 집에서 밥을 먹고 지냈고, 이어 신학교 본과에 들어서면서 그의 조교로서 졸업 때(1959)까지 3년 동안 풀타임으로 그의 주석 원고를 정리하고 도왔다. 이때 박혜란은 경남여고를 다녔고 이어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박혜란은 한국 교회가 자기 아버지의 신학과 생활을 바로 판단하도록 글을 쓴다고 했다. 그 책의 핵심 내용은 그의 아버지 박윤선의 신학이 바르지 못하고 그의 생활도 잘못되었다고 아버지를 비하(卑下)하며, 이제 그가 남긴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 그 이름을 잊어버리자는 요구이다.
그의 아버지 박윤선은 50대 전후 생의 황금기 13년 동안 고신의 개혁주의 신학을 주조했고, 만년에 합신에서 개혁신학교육에 봉사함으로써 평생을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건설에 헌신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 종이었다.
혜란이 말한 것 가운데 혹 어떤 것은 사실일 수 있다. 목사요, 신학자 박윤선이라고 무흠할 수 없다. “이 생애에서 우리의 최상의 선행조차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 하지만 주님은 이런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교회건설을 위해 써 주심에 감사한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그의 아버지 박윤선을 단순히 변호하려는데 있지 않다. 혜란이 아버지가 전처 자식들에게 무관심하고 새어머니가 그들을 홀대했다는 데 대한 증오로 허구한 화상을 그려 주님의 교회에 무서운 해악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잠잠할 수 없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 사랑을 말하지만 용서 없는 그의 위선
어머니를 잃고 계모를 갖는다는 것은 큰 불행이다. 계모가 아무리 전처의 자녀들에게 잘해도 칭찬을 듣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이화주 사모는 체격이 크고 외모가 여성보다 남성스럽게 보이는 분이다. 그래서 어린 전처 자녀들에게 섬세함이나 온화함을 느끼게 하는 데에는 결핍할 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혜란이 말한 대로 그가 항상 전처 자녀들에게 ‘배은망덕한 전처 자식’이라고 하며 박해를 가할 분은 전혀 아니었다. 그런 분이었다면 전처 딸 은란이를 위해 어떻게 과외교사를 둘 수 있으며, 서울대학에 입학한 혜란의 등록금을 댈 수 있었겠는가?
박윤선 교장은 정말 돈도, 살림도 모르는 분이었다. 혜란은 이화주 어머니의 배려를 고마워했어야 한다. 이화주 사모는 등록금을 보내고 나서 월급날을 기다릴 수 없어 돈을 빌리러 부산 중구 남포동에서 외국 잡지 노점상을 하는 혜란의 큰아버지에게 나를 보낸 적이 두 번 있었다.
혜란이와 남매들이 새어머니로부터 좀 홀대를 받고 심적으로 박해를 받았다고 인정하자. 그도 분명 새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간혹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아무튼, 오랜 세월 후에 모두 미국에 살면서 서로 만나 “어머니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했고, 이화주 어머니도 “피차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함으로 서로 용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 L.A.에 있는 새어머니를 방문하여 한 방에 같이 자게 된 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처음 한 방에 같이 자면서 지나온 삶을 자유롭게 말씀드릴 수 있었다. 새어머니는 당신의 침대를 내게 주시고 당신은 방바닥에서 주무셨는데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라고 했다(p.161). 모녀가 서로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으므로 어두운 지난날을 다 청산했다.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혜란은 새어머니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았다. 지난날의 일들을 잊거나 버리지 않았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기억하여 글로 옮기고 그의 새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곧 기다린 듯이 세상에 책으로 펴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신다”(시103:12, 사38:17)라고 하며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라고도 했다(미7:19). 주님의 자녀인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는 용서를 말하면서 용서하지 않았다. 무서운 위선자이다. 글로 사랑을 말하면서 마음에는 미움의 독을 그대로 간직해 왔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 박윤선의 자녀로 누린 특권을 외면
혜란은 그의 아버지가 전처 자녀들에게 무관심하여 큰아들 춘호, 미국에 간 춘자와 요한을 돕지 않았다고 원망했다. 6.25 전쟁 직후 우리 모두가 끼니를 채우지 못하던 어려운 1950년대에 그는 훌륭한 아버지 덕에 남들이 꿈도 꾸지 못한 특권을 누린 사실을 전혀 잊고 있다.
춘호는 1953년에 결혼하여 가정을 이뤘다. 혜란이 말한 대로 그는 영어도 잘하고 똑똑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가정을 외면하고 술을 마시고 방탕한 길에 들어섰다. 성년이 되어 가정을 가졌으면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가정을 돌봐야 했다.
그 시절에는 정말 죽기 살기로 일해야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그는 늘 술에 취하고 방탕한 생활을 계속했다. 혜란도 그의 방탕한 생활을 언급은 했다. 그러나 춘호가 부모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었는지는 말하지 않고 숨겼다. 단지 부모가 그를 도와주지 않은 것만을 원망했다.
그는 종종 밤에 만취되어 아버지 집에 찾아와 돈을 요구하고 문을 부수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니 부모로서도 그가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혜란은 자기 오빠가 아침에 밖에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부모로서 만취해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기에 학생들을 시켜 그렇게까지 하였겠으며, “모든 것을 다 접고 시골에 가서 글이나 써야겠다”라고 말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그 어려운 현장의 목격자이기도 하다. 혜란은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않고, 독자를 오도하고 그의 아버지를 잔인한 분으로만 부각시키고 있다. 정직하지 못하다.
그리고 미국에 유학 간 춘자와 요한이 아버지에게서 어떤 경제적인 도움도 받지 못한 것을 원망했다. 1950년대에 외국에 유학한다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우리 같은 평범한 가정의 자녀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미국에 특별한 인연을 가진 분이 없는 한, 혹은 선교사들의 도움이 없는 한 미국에 갈 수 없었다.
춘자는 그의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된 한 미국 가정의 호의로 고등학교를 마친 후 바로 1953년에 미국 유학을 할 수 있었다. 누구든 미국에 가면 장학금을 받아도 일하여 고학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시간을 내어 남의 집 정원에 풀을 깎거나, 집이나 사무실 청소를 하거나, 식당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어 공부했다. 한국은 당시 보내줄 외화도 없었고 돈이 있어도 보내 줄 길이 없었다. 그런데 혜란은 그의 언니 춘자가 돈이 없어 석사 논문을 쓰지 못했다면서 아버지를 원망한다.
요한을 양자로 보낸 것도 미국에서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아버지의 목적이었다. 당시에는 어떤 길이라도 미국에 가는 것이 모든 젊은이의 소원이었다.
혜란은 자기들이 아버지, 박윤선의 자녀이기 때문에 남다른 특권을 누려온 사실을 조금도 생각지 않고 그의 아버지와 계모 이화주가 전처 자식에게 무관심해 도와주지 않았다고만 원망한다. 칠순이 지난 딸, 혜란의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는 것이 안타깝다.
- 아버지의 딸, 한 남편의 아내로서의 행태
혜란은 거의 30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 박윤선에 대해 가능한 극단적인 모든 표현을 동원하여 매장하려 한다. 그의 아버지를 의처증을 가진 분이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손찌검까지 한 적이 많다고 하다가, 점점 강도를 높여 마침내는 “상습적으로 구타했다”라고 한다.
물론 부부가 다투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잉꼬부부라 해도 서로 자란 배경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므로 가끔 서로 다툴 수 있고, 밀고 당기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목사 박윤선도 인간이니 그럴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부부 사이는 칼이 물을 베어 가르지 못하듯 그 사이는 순간적으로 멀어졌다가 곧 제자리로 돌아온다. 가끔 다툰 일이 있다고 해서 아버지를 상습구타자로 몰고 가는 것은 악의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혜란이 그의 남편에 대해 그린 화상은 참으로 가관이다. 그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마음에 맞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여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이혼을 생각했다고 하며, 남편이 가진 결점을 하나하나 들춰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만하게 보이기까지 한 그의 자존심이 아버지가 강요한다고 자기가 싫어한 남자와 결혼할 분은 전혀 아니다. 자기가 좋아 결혼하고 뒤에 마음에 차지 않으니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아무튼, 그는 결혼하여 4남매를 두고 일곱 손자녀까지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칠순을 넘어 할머니가 된 그가 결혼생활이 불행하였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현재 살아있는 남편의 결점을 낱낱이 들추어 활자화하여 온 세상에 공포하였다. 이런 아내, 이런 여자가 세상에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이를 볼 때에도 그가 그의 아버지에 대해 그려 놓은 회화가 조작이요, 악의에 찬 소설임이 분명하다.
혜란은 현재 그 남편과 같이 살고 있는지, 그 남편은 아내가 쓴 책을 읽고 어떤 독후감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목사의 안수를 받은 여목사 혜란의 행태는 정말 주의 이름에 큰 욕을 돌리고 있다.
그리스도인 가정생활 윤리에 대한 기본도 갖추지 못한 그가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설교하고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 박윤선의 빠른 재혼에 대한 불만
1954년 3월 김알렌(金愛蘭) 사모가 불의의 차 사고로 돌아가셨다. 당시 집에는 요한, 혜란, 은란, 단열 사 남매 중 요한은 곧 도미하고 어린 삼 남매가 남았다. 박윤선은 그의 아내에 대한 비보를 받고 유학 중에 있던 네덜란드에서 바로 귀국했다.
그는 정말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신념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가르치는 분이지 가정을 다스리고 돌볼 수 있는 자상한 아버지는 못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황한 나머지 집안이 정리되는 동안 얼마 동안 아이들을 혹 합당한 고아원에 맡길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한 것이다.
혜란이 뒤에 이를 알았을 때 충격을 받았을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장성한 그로서는 당시의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를 하고 동정심을 가졌어야 한다.
당시 학생들인 우리들도 어린 아이들만 남은 그 가정의 형편을 알고 안타까워했다. 그 형편을 잘 아는 신학교 이사들과 교계 지도자들은 박윤선 교장의 가정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문제 해결의 길은 좀 무리가 되지만 가능한 한 빨리 재혼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처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10월) 재혼을 성사시켰다. 재혼 상대는 6・25 전쟁 시 북한에서 혼자 피난 왔다가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여 1952년에 졸업하고 교회를 봉사하고 있던 이화주 전도사였다. 상처 후 상당히 빠른 재혼이었다. 그러나 당시 어려운 그 가정 문제의 해결은 이 길밖에 없었다.
물론 박윤선 목사도 이를 원하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자녀들인 혜란, 은란, 단열을 위한 일이었다. 혜란은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과 의논 없이 일찍 재혼한 것만을 탓하고 있다. 어릴 때는 이해를 못 했어도 장성해서는 이를 이해하고 오히려 감사해야 했다.
- 박혜란의 편향된 신학
박혜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자들을 만나 사랑이 지배하는 가장 좋은 신학을 했다고 하며, 사랑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행복해한다. 이 좋은 신학이 “목사의 딸”을 쓰게 한 것으로 보인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 모든 가능한 힘을 동원하여 아버지 박윤선의 신학을 폄하하도록 만든 신학이 결코 좋은 신학일 수 없다. 역설적으로 그가 강조하는 사랑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신학이 하나님의 사랑에 편중될 때 하나님의 공의, 죄와 회개는 무시하게 된다. 오늘 죄를 경시하는 교회 생활이 여기에서 왔다. 칼빈주의 신학은 언약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인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면서 순종의 의무를 요구하신다.
우리가 약속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에 따른 순종의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기에 우리는 거듭 회개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기 때문이다.
헤란은 그의 아버지를 유교적 칼빈주의자라고 하며, 그의 신학이 남존여비, 충효 사상에 영향을 받은 신학이라고 하며 배척한다. 그는 가능한 한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그의 아버지의 신학을 폄하하고 있다. 거기에는 극한 자만과 여자로서 목사 안수 받은 여권에 대한 자기 변호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신학이 영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신학이라고도 한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부르짖었다. 바울이 그의 몸을 사망의 몸이라고 할 때 그는 이원론자였는가? 물론 아니다.
혜란은 그의 아버지가 늘 죄인임을 고백하고, 죽기 살기로 기도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의 복음이 ‘다른 복음’이라고 하며 정죄한다. 우리는 의인이면서 죄인이기에 항상 죄를 회개하고, 죽기 살기로 기도하고, 죽기 살기로 봉사하기 원한다.
특별히 1950년대에 살던 우리는 더욱 그러했다. 오늘 우리가 그렇게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공덕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고, 주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칼빈주의이다.
혜란은 그의 아버지의 주석이 “참고할만한 것이 없고 빈곤하다”라고 하며 폄하한다. 모든 주석은 제각기 특징이 있다. 박윤선의 주석은 특별히 설교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쓴 칼빈주의 신학에 입각한 실용적인 귀한 주석이다. 지난날 수만 명의 설교자가 도움을 받아 왔고 지금도 도움을 얻고 있다. 혜란은 이 책들을 폄하하고 송두리째 땅속에 묻어버리기를 원한다. 고약한 심술이다.
나아가, 딸 혜란은 “한국교회가 이렇게 큰 결함이 있는 분을 칼빈주의 대학자로 숭상하는 것이 안타깝다”라고 하며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그는 세상에서 박윤선의 이름이 지워지기를 원한다. 사랑을 말하는 그가 이미 하늘나라에 간 그의 아버지를 향해 살인적인 독을 뿜어내고 있다.
빗나간 딸이 폄하하고 정죄한다고 해서 박윤선의 신학이 세상에서 결코 무시를 당하거나 정죄 되거나 묻히지는 않을 것이다. 혜란은 하나님이 반세기 동안 그의 아버지 박윤선을 들어 쓰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항의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실 일이 아니고 복 받들 일이 아니다.
마치는 말
할 말이 더 많으나 이것으로 마치려 한다. 박혜란은 이 책을 성령의 인도로 쓴 것이 아니고, ‘다른 영’의 지배를 받아 쓴 것이 분명하다. 언제나 주의 교회에 해독을 끼치고 무너뜨리려는 영 말이다.
주의 교회에 백해무익한 이 책을 목회자들, 신학생들, 교회지도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라고 책머리에서 추천한 분들로 마찬가지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