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세속적 오해들_이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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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세속적 오해들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미래에 대해 정신적 
불안을 느끼며,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종교적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
들은 미래학이나 매스컴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자신의 안전보장을 위한 대책
을 세우면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래의 운수를 점치는 미신이 번창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뜻
과 그의 인도하심을 추구하여 왔으나, 현대에 이르러 기독교 신앙의 세속화
와 현대적 정황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많은 세속적 오해들
이 보편화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빙자한 죄악들이 범람하
고 있는 실정이다.

자기정당화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 듣기 Hearing God: Developing a 
Conversational Relationship with God>에서 현대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는 주장은 넘치지만 올바른 경
우는 별로 없는 역설적 상황을 지적하였
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의 인생이 이미 헌신되었고 예수께서 
자기 인생의 주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론
적 전제가 있어서 중요한 방향 설정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만, 많
은 사람들은 사실상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거의 결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형
식적으로 구해보는 절차를 따르기 때문이다. 목회자에게 결혼상담을 하는 경
우 이미 자기가 선호하는 결혼 상대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태에서 오기 때문
에 심지어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에도 이를 막기 어렵다. 그들은 단지 자기
의 선택에 대해 목사의 축복을 원할 뿐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개입될 수 있는 그릇된 세속적 동기들
에 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
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
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
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왜냐하면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며 새사람과 옛사람이 공존하
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속적 욕망은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 아닐 수 없
으며, 특히 물질주의와 향락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문화를 살아가는 현대 그
리스도인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린다면 미리 결정하거나 선호하지 말아야 한
다. 그러나, 그 사안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거기에 대
해 많이 생각했다는 말이며, 그것은 이미 우리의 가치관이 작용하여 상당히 
마음속의 논의가 진행된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데도 포기
되지 않는 선택을 고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칼빈은 자기 부인(self-
denial)을 성화의 기본적 원리로 가르쳤는데, 자기 의지(self-will)가 엄
연히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을 빈 마음으로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 마음속에서 항상 두 개의 원리, 즉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또
는 성령의 인도와 육체의 욕심이 서로 투쟁하고 있다고 가르쳤다(롬 7.15-
25, 갈 5.13-24). 이와 같은 투쟁은 우리의 모든 선택과 결정에서 발생하

며, 중요한 결정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새로운 임지를 
정할 때 조건이 좋은 쪽으로 이미 마음이 기우는데도 기도해 보고 결정하겠다
고 말하는데, 이런 경우 대개는 기도가 형식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전에 세속적 욕심이 작용하지 않았는지 철저
한 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죄악의 본질이 자기중심적 사고, 이기주의, 집단적 이기
주의, 세속적 허영, 평안의 추구 등 세속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처음부터 
한 방향으로 마음이 기운 상태에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죄성의 치밀하고 간
교한 무의식적 요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경건한 형식을 취하는 경우
가 허다하다. 이런 경우, 주관적 느낌이나 확신을 절대화하는데, 사실은 그
런 주관적 경향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오기보다 자기의 감추어진 욕심의 소리
인 경우가 많다.

운명론적 회피책

클라우스 보크뮤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듣기 Listening to the God 
Who Speaks>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는 두 가지 형태로서 하나님의 결
정 이전에 자기가 결정하는 능동주의(activism)와 성화를 위해 아무 
것도 
노력하지 않는 수동주의(passivism)를 들었다. 자기 정당화의 문제가 지나
치게 강한 자아에 있다면, 그 반대는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하
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수용함으로서 자기 행위를 무조건 정당화하는데 있
다. 
운명론(fatalism)은 분명히 기독교 사상이 아니며, 우리는 현실을 비판적으
로 직시하고 평가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허용적 작정 혹은 주권적 뜻이라
는 신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참새 한 마리의 죽음과 같이 사소한 사건을 포함
하여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다고 보지만, 그 말이 결코 세상
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거룩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의미는 아니
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섭리론을 오해하여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의 뜻이며 그의 인도하심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공부를 게을리 하고 놀
다가 입학시험에 떨어진다든지 절제하지 못하여 건강을 잃고서도, 그것을 하
나님의 뜻이라고 미화하는 잘못을 범한다. 그 결과, 자기의 나태나 무절제
를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하면서 자기를 위로하는 이중의 잘못을 범하
게 된다. 물론, 은혜로운 하나님은 악
을 선으로 바꾸고 우리의 실패를 좋은 
계기로 만들지만, 우리가 범한 죄악과 하나님의 선한 간섭은 철저히 구별되
어야 한다. 가룟 유다의 행위를 하나님이 긍정적으로 이용하였다고 하여 그
의 죄악적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더욱이, 학교나 직장이나 배우자의 선택을 하는 경우 마치 궁합이나 점을 치
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안전 보장을 구하
는 것이며, 자기의 선택에 자기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회피 심리와 함께 
그러한 선택을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경시하는 비윤리적 사고
가 도사리고 있다. 어떤 배우자의 선택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행
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도는 오
랜 만에 특별한 때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행하며 사소한 일이
든 중요한 일이든 모두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모든 삶과 매 순간
의 선택을 외면 한 채 이따금 중요한 선택만을 의지하는 것은 전적 헌신의 부
족을 스스로 드러내며 책임있는 삶을 회피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게리 프리슨은 <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 Decision Making & the 
Will 
of God: A Biblical Alternative to the Traditional View>에서 중요
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로 나누는 줄긋기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이와 같
은 이분법적 논리는 성경적이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
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기를 원한다. 적은 일에도 충성하여
야 하며, 소자를 무시해서도 안 되고, 달란트가 적다고 무관심해서도 안 된
다. 
우리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적인 일들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
지 않고 단지 몇몇 중대사에만, 그리고 그것도 선택 자체만을 문의하는 일
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지 모른다. 제럴드 싯서도 <삶의 방식으로
서의 하나님의 뜻 The Will of God as a Way of Life: Finding and 
Following the Will of God>에서 미래의 중요한 결정에만 관심을 가지는 
동안 현재의 순종에 무관심한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일상적인 것이 
중요하다(The ordinary is extraordinary!)”고 강조하였다.

계시된 뜻의 외면

프레데릭 마이어는 “만일 당신의 마음이 잠잠히 기다리며 당신의 관심이 집
중된다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 확
실하게 당신에게 전달되는 전화선
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추구하는 많은 그리스도인
들은 성경에서 그의 뜻을 찾으려 하기보다 직접적인 음성을 듣기 원한다. 하
나님의 뜻은 이미 오랜 세월동안 충분히 계시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에
서 직면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그의 뜻은 이미 성경 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성경에 그 해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에
서, 혹자는 성경에 있는 대답 그 이상의 대답을 얻기 위해서 직접적인 지시
를 기다리는데, 이는 둘 다 계시된 뜻을 외면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
다. 마치 자세히 써서 보낸 편지는 읽지 않고 전화를 해서 물어야 직성이 풀
리는 사람처럼,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사람과 같이 전화를 통해 분명한 답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
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경우 먼저 계시된 뜻을 자세히 살펴야 하며, 그래
도 불확실한 경우 성경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에게 문의해야 한다. 자기가 발
견하지 못한 경우에도 전문가는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는 수많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만, 전문적 해석의 과정과 신학적 추론을 거쳐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뜻도 
많이 있다. 현대에 발생하는 많은 이슈들이나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들은 이
런 과정이 필요하다. 노예 해방이나 여성 안수가 하나님의 뜻인지, 혹은 어
떤 결혼 상대나 교회의 선택이 하나님의 뜻인지와 같은 질문은 간접적 추론
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고대에 특정한 상황과 대상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기 때
문에 해석과 상황화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되는 작업
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왕정의 폐지나 노예해방 문제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였으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성경에
는 초시간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이 중심적이지만, 그것도 성령의 감동
으로 개인적인 뜻이 되며, 베드로의 길과 요한의 길이 다르듯이 하나님의 뜻
은 보편적인 뜻의 한계 내에서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이 중세의 신비주의를 경계하여 강조한 대
로, 성경과 성령의 인도는 분리될 수 없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

며,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서로 대립된 의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
서, 계시된 뜻을 외면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론적 결정론의 위험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아는 ‘세 가지 빛(three lights)’으로 주변
상황, 성령의 감동,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을 의지하며, 주변 상황이 성령의 
감동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과 합치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 들였
다. 물론, 이 방법은 상당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으나 위험도 적지 않다. 
‘열린 문’의 방법을 사용하며, 하나님이 막지 않고 길이 순조롭게 열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라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적지 않
은 경우 고난과 십자가의 길일 수 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깊은 뜻은 외
면 한 채 현실주의나 기회주의와 같은 상황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하나
님의 뜻을 거스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기독교는 고행주의가 아니며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지만, 그리스도
의 제자도는 원칙적으로 십자가와 고난의 길이다.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선택
이 결코 세속적 형통의 기준에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고후 4-5장은 우리의 판단이 결코 보이는 
현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
리를 가르쳐 준다. 세속적 형통과 조건을 추구하면 원칙에 의한 삶보다 기회
주의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열린 문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때를 얻든
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은 고난이 예고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명에 의한 판단과 결정이 요구되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문이 열렸지만, 
그것을 단순히 탈출하라는 지시로 보지 않았다. 상황은 우리의 결정에 중요
한 고려대상이 되지만, 상황이 우리를 결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인격
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
과 헌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어려운 상황을 주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과 인간이 창조하는 하나님의 나라

과연 하나님이 개인의 모든 선택과 결정에 대해 구체적이고 단일한 뜻을 가지
고 있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견의 불일치가 있다. 거의 운명론과 구별하기 어

울 정도로 가게에 가서 물건을 선택하는 것부터 결혼 상대의 선택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으로부터 성경의 보편적인 뜻 이외에는 
하나님이 모두 우리 자유에 맡기며 하나님의 특별한 의사가 없다는 주장에 이
르기까지 다양하다. 사사건건마다 하나님의 단일한 뜻이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된다는 전통적 견해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특히, 제럴드 싯서는 자기의 경험을 술회하며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만일 우리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간에 하나님의 단일한 절
대적 뜻을 따르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를 질문한다. 예를 들어,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천생연분으로 예정된 배필이 있는데, 그와 결혼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이후의 모든 인생은 하나님과 무관
하고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채 잘못된 인생을 살
게 되는가? 그는 이 주제와 관련된 성경을 자세히 연구한 결과, “만일 우리
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그것이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
님의 뜻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우리가 미래를 향해 선택한 것이 바로 우
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고 결론 내린다. 
물론, 이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성경을 보면 어떤 경우에는 개인에게
도 하나님이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기도 하며, 인류의 역사는 구속사적 
성취를 향해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설령 하나님이 정한 배필이 있다 할지라
도, 그런데 그를 선택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를 거부하지 않으며,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
침에 따라 사랑하고 순종하는 일이다. 성경에는 천직의 개념이 없다. 물론 
직업을 선택할 때에는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직업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지만, 일단 
선택을 한 다음에는 성실히 노력하여 훌륭한 직업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천생연분이나 천직을 핑계로 배우자나 직업을 자주 바꾸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면서 가진 뜻은 비록 악령과 악인의 저항에도 불구
하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보수적인 신정론을 고백하는 
웨스
트민스터 신앙고백도 하나님의 예정이 결코 “피조물의 의지를 침해하거
나 제 2원인의 자유와 우연성이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확립한다”고 이해한
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부름 받았으므로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으로서 우리의 자유가 허용되는 부분에서는 분명한 책임
을 묻는다. 자유가 없는데 책임을 묻는다면 하나님은 정의롭지 못하게 된
다. 하나님은 세계의 주관자로서 모든 개인과 집단과 세계에 대하여 그의 목
적을 가지고 있으며 섭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모든 과정을 일거수 
일투족 미리 정했다는 생각은 운명론을 결과할 뿐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총
체적인 계획과 목표와 구도를 설정하고 제 2원인인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며 
함께 상호작용 속에서 미래를 창조해 나감으로서 그의 뜻을 궁극적으로 성취
해 나간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저항이나 오해가 발생하면 창조적으로 지혜롭게 대처함으
로서 문제를 해소해 나간다.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을 믿고 자기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는 인생과 세계에 대해 항상 하나님의 나
라를 추구하며 창조적으로 대처하는 유연한 자세
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