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평화와 이데올로기_이문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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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평화와 이데올로기

이문식 목사/ 경기중노회

Ⅰ. 들어가는 말
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 또다시 보수·진보의 이념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먼
저, 사회운동 부분에서는 올해 3·1절날 시청 앞에서 모인 우익 세력의 3·1
절 국민대회 및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생긴 인공기 방화사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제도 정치권에서는 지난 5년 간 DJ정권 하에서 진행
된 햇볕정책과 대북지원으로 인해 야기된 대북 송금 특검 문제로 인해 이념 
공방이 더욱 치열해졌다. 
또 국민의식의 부분에서는 정몽헌 현대 회장의 자살 사건과 최근 송두율 교
수 처리 문제 등이 한국 사회의 큰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우리 사회 내부의 경직성이 얼마나 심하며 그 갈등이 어떤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처럼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더욱 깊이 고착시킬 뿐만 아니라, 남남 갈등
까지 거세게 불러일으키며 우리 내부의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현재의 ‘이데

로기 논쟁’에 대하여 우리 한국 교회는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다
시 한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어지는 과정에서 우리 한국 교회가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현안(Issue)이기 때문이다.

Ⅱ. 이데올로기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이해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계몽주의 시대
에 지어진 것이다. 그 당시 혁명이론가들은 자기들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혁
명적 세계상을 묘사하는 용어로서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따라
서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어떤 철학적인 ‘사상의 틀'(a framework of thought)
이라는 의미 이상의 뜻을 갖게 되었으며, ‘어떤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
여 도구로 사용되는 가치, 개념, 신념 및 규범의 전체 체계’를 의미하는 것
이 되었다. 이데올로기는, 철학이 ‘비판(critic)’보다는 ‘헌신
(Commitment)’을 요구하는 자리로 올라섰을 때 나오는 것으로서 일종의 ‘철학
의 종교화 현상’이다. 
그래서 화란의 기독교 철학자 하웃즈바르트(Goudzwa
ard)는 ‘이데올로기는 
종교의 대체물이며, 그 시작부터 마귀적인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렇다
면 이 이데올로기는 언제 그 우상적 성격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가? 하웃
즈바르트는 ‘이데올로기가 추구하는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며 합법적
인 권력을 부여할 때 곧 우상이 된다’라고 하였다. 
하웃즈바르트(Goudzwaard)는 ‘현대의 이데올로기들 – 혁명 이데올로기, 민
족주의 이데올로기, 물질적 번영의 이데올로기, 안보 이데올로기 – 이 다음
과 같은 5가지 특징을 갖고 있으면 완성된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한다.
1. 세워 놓은 목표가 비상한 중요성을 갖는다.
2. 수단은 전혀 제약 없이 활동한다.
3. 목적이 참된 가치 기준과 규범을 왜곡시킨다.
4, 목적은 새로운 수단들이 제시하는 법률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5. 목적이 자체의 거짓 원수 – 속죄양 – 들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것에 대
한 전투 적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절대적인 가치와 힘을 부여
하기를 거부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작업 – 
즉 ‘이데올로기 
비신화화 작업’을 철저히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
여 인간의 모든 사상과 이념을 상대화시키고, 비신화화 시키며, 그 노예적 예
속 상태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복음의 역동적인 초월인 것이다. 
이 초월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뜨인 돌이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을 무너뜨리
는 방식으로 인간 역사 속에서 임하는 것이다.

Ⅲ. 한국교회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반공주의 신앙의식의 형성과정 
한국 교회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조우를 시작한 것은 3·1운동 이후였
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초대 교회의 청년층도 사회주
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초기 조선 사회주의의 
두 거두였던 이동휘나 여운형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한때 평양신학교까지 
다녔으며 전도사 직분까지 받았던 이들이다. 그러나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1925년 조선 공산당을 결성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개신교에 대한 비판을 시작
하였다. 이들은 ‘반(反)기독교 대강연회’를 개최하거나 12월 25일을 ‘반(反)
기독교의 날’로 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반(反)기독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양 진영의 갈등의 과정에서 1927년 창설된 신간회 운동(회장 이상재)
은 개신교와 사회주의 사이에 민족 독립을 위한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 최초
의 운동이었으나 일제의 방해 공작과 사회주의 진영의 태도 변화로 인해 창
립 4년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그 후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더욱 첨예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 결
과 1930년대의 기독교 지도자였던 길선주 목사는 공산주의자들을 ‘말세의 징
조’, 혹은 ‘사탄’으로 규정하는 설교를 행하였다. 그리고 1932년 장로교와 감
리교의 연합 기구인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가 채택한 사회 신조는 ‘일체
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 개조와 변증적 
탄압에 반대한다’고 하는 조항을 명기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이데올
로기에 반대하는 노선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반공주의의 단초는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출현하여 친일 
세력의 청산과 농지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생겨
났다. 주로 토지 개혁으로 자신들의 물적 기반을 빼앗기고 신앙 활동의 자유
마저도 잃게 된 이북 기독교인
들이 윤하영 목사와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
로 ‘기독교 사회 민주당’을 결성하여 저항하다가 결국 와해되고, 대거 월남
한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남한 단독 정부인 이승만 정권이 자신의 취약한 정권의 기반을 강화
하고, 민족주의 진영을 견제하기 위하여 먼저 과거 친일 세력을 본격적으로 
정부 내에 수용하였고, 또 당시의 전후 냉전 체제의 편성과정에서 자유민주주
의 진영에 편입키로 국가 정책을 수립하였다. 그러자 이미 월남한 이북 기독
교인들은 대부분 이승만 정권을 전폭 지지하며 반공의식을 깊이 내면화시키
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국 전쟁’의 발발은 공산주의에 대한 남한 기독교의 적대적 태도와 
증오심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부산에서 열린 「구국신도대회」에서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에 보내기로 채택
한 성명서이다.
북한 공산주의와의 타협을 반대하는 한국 교회의 신학적 입장은 ‘사탄론’으
로 요약된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설복될 수 없는 마귀”, “영구히 회개할 수 
없는 마귀”로 단죄하였으며, 요한계시록의 ‘붉은 
말’을 탄 자나 ‘적그리스
도'(Anti-Christ)와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국 교회의 반공의식은 공
산주의 이론에 대한 철학적 학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피부에 찔린 총검’에
서, 그리고 “눈앞에서 목도한 살상과 동족 간의 불신”에서 체험적으로 형성
된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상처와 체험은 공산주
의에 대한 증오를 ‘정치적·시대적 증오’가 아니라 일종의 ‘종말론적 증
오’로 영화(Spritualization)시켰다. 
해방 후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던 김재준 목사의 경우가 이러한 분위기
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해방 직후 새 정부의 수립을 구상하면서 공산주의
에 대하여 우려하면서도 만일 사상과 종교 등의 자유만 보장한다면 공산주의
자들과의 합작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을 겪
은 후에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교회의 반공주의는 월남 기독교인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고착되었
다. 일제하 개신교는 서북 지방에 교세가 편중되어 있었는데 한국 전쟁을 전
후하여 개신교인의 1/3정도가 월남한 것으
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공산당의 
탄압을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에 반공 의식이 어느 사회 집단보다 강렬했다. 
그리고 이들이 한국 교회에서 공고한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반공
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반공·친미 의식을 깊이 내재화시키
고, 그 정서를 지난 50년 간 유지해 온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반미’, ‘주한미군 철수’같은 진보 진영의 구호에 한국 
기독교가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이
제 한국 사회 속에서 올해 3·1절 구국대회 같은 반공 집회를 주도할 수 있
는 유일한 세력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 전쟁을 거치고, 그 후 군사 독재 시절을 거치면서도 한
결같이 “공산당보다는 군사독재가 낫다”는 선택을 해 온 독특한 보수적 신앙 
공동체이다. 그 결과, 군사 독재 시절에는 저항 세력이었으나, 이제 문민정
부 이후의 민주화 시대에는 새로운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이른바 ‘민주
화 세대’로부터, 한국 교회는 반(反)민주적이고, 반(反)인권적이
며, 분단 고
착을 지향하는 냉전적 사고를 가진 수구 보수 집단, 심지어 반(反)통일세력으
로까지 백안시당하는 상황에 몰려있는 것이다. 
지난 50년간의 독특한 냉전적 상황에서 한국 보수 기독교는 반공주의를 거
의 신앙의 수준으로까지 내면화시켜왔다. 그런데 지난 90년대의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시작된 새로운 냉전 해체 상황과, 그로 말미암은 민족주의의 부활
에 따른 변화, 즉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남북 재통합논의는 한국 보수 교회
의 입장에서 볼 때 지극히 적응하기 어려운 새로운 상황인 것이다. 
한국 보수 기독교는 「평화 통일」보다는 「멸공 통일」에 더 익숙하고, 
「평화 공존」보다는 「흡수 통일」을 더 선호하며, 「화해 협력」보다는 
「고립 붕괴」를 무의식적으로 희망하는 경향을 갖는 「전투적 유신론에 입각
한 기독교 승리주의」, 「힘에 의한 통일론」, 혹은 「증오의 영성」에 더 깊
이 고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년에 부시 미 행정부의 북핵 시설 폭격 등의 대북 강경 정책에 대
해 일부 기독교 인사들은 이를 드러내놓고 기뻐하며, 동시에 남한이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지극히 이율
배반적이고도, 비현실적인 환상
을 품는 이중적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00년 6·15 남북 공동 성명 이후에 형성된 새 기류, 즉
「반북주의」와 「반공주의」가 분리되기 시작한 새로운 역사의 흐름에 제대
로 반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북한 주민에 대해서는 민족애에 
기초하여 우호적이며 인도적인 정책을 쓰며, 과거의 무조건적인 「반북주의」
를 극복해 나가는 이른바 ‘민족 공조적 정책’을 수립하며, 장기적으로는「북
한의 공산주의 체제」를 변화·유도하여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주선하고, 본
격적인 개혁 개방에 나서게 함으로써, 중국식 사회주의 혹은 자본주의화된 사
회주의, 혹은 서구 자본주의 체제로의 재편으로까지 나가게 하는 단계적 정책
(Soft or Hard landing)에 한국 교회는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한국 교회는 한국 전쟁이라는 과거의 특수 경험에 기초한 냉전시
대의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점차 상대화시키야 할 변화의 시점에 와 있
다. 역사적 증오를 종말론적 증오로까지 끌어 올렸던 과거의 극우적 신앙에
서, 점차 새로이 전개되는 민족 재통합의 역사
적 과정에서, 새롭게 민족 화해
의 신앙으로 변화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 기
독교가 과거의 역사 경험을 아가페의 복음으로 초월적으로 극복하여 새 시대
에 맞는 새 부대를 갖춘 공동체로 거듭남으로써 민족 화해와 통일 한국의 새 
시대를 능동적으로 준비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한다.

IV. 결 론 
우리의 신학은 소위 통일신학이 아니라 평화의 신학이어야 한다. 우리의 기
도가 이제는 통일보다는 평화를 앞세우는 바른 위치로 들어서야 한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한국 교회의 모든 평화운동 위에 하나님의 축복
이 임하여 통일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우리 민족 공동체에게 임하기를 기대
해야 한다.
통일이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
어지는 선물(Gift)이라는 겸허한 인식이 온 교회 위에 확산될 때만이 우리는 
더욱 겸손함으로 이 평화의 선물을 개혁과 통합의 정신으로 키워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먼저 십자가의 화해의 영성, 평화의 주님이
신 예수님의 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남·북한을 가
로막는 방벽이 어느 날 무너지고 남·북한의 주민들이 오고가
는 통일이 가시화될 때, 과연 한국 교회는 곳곳에서 생겨날 갈등과 오해, 그
리고 원한들을 끌어안고 함께 울며 진정으로 하나 되는 화해의 장을 마련해 
줄 수 있을까? 권력과 자본이 앞장서서 통일의 과정을 기득권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그 과정에서 자존심의 심각한 상처를 입고 뒤쳐지게 될 
많은 북한 사람들에게 교회는 새로운 희망과 안식, 그리고 평화의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아니면, 권력과 자본에 못지 않게 종교를 앞세운 영역확장의 욕심에 사로잡
힌 또 하나의 기득권 재생산 세력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은 아닐
까? 외국인 노동자들과 탈북자 선교에서 종종 보이는 이러한 자기중심적 태도
로부터 벗어나서 우리 한국 교회가 이웃 국가나 다른 민족들과의 평화를 위
한 누룩의 역할을 과연 수행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래서 우리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개혁에 성공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민족내부에서 먼저 실행할 때에 비로소 통일은 하나님의 평

를 가져오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
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먼저 ‘평화’라고 기도하자. 우리 한국 
교회가 북한의 김정일 정권에 대한 국내의 여러 이견과 갈등을 통합하고 개
혁 주도자로서의 기능을 선도하며 “화평케 하는 자”로 하나님과 민족 앞에 담
대히 서기를 더욱 간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