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_이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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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이정석 목사(풀러신학교 교의학 교수)

최근 이단, 사이비 종교가 난무하고 심지어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는 
등의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팽배하고 있는 가운데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
의 요소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우리
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원고는 필자의 허락을 
받아 홈페이지(http://jsrhee.hihome.com)에서 가져왔다. 편집자 주.

현대의 지배적인 시대정신으로 군림한 상대주의 사상은 독선적 배타주의를 전
근대적 사고의 표본으로 멸시하며, 전쟁을 혐오하는 평화주의 사상은 종교간
의 평화를 강력히 요구한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발생한 종교 다원주
의(religious pluralism)는 구원이 기독교에만 있다는 전통적 사고에 도전하
면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
라”는 사도행전 4장 12절을 제시하며 논의를 거부한다. 과연 우리는 타종교
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며, 타종교에는 전혀 구원이 없는가?

종교와 구원

불교는 끝없는 고통을 야기하는 생의 윤회로부터 해방하고 탈출하는 해탈의 
구원을 추구하며, 해탈을 성취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주장된다. 따라서, 산을 
중심으로 발전한 불교는 어떤 길을 택하든지 정상에 도달하면 된다는 다원적 
입장을 취하였다. 
한국의 종교다원주의는 토착화신학과 민중신학, 그리고 과정신학에 의해 발생
하였는데, 특히 후자는 불교를 최고의 종교로 보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근거하여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와 융합을 추구한다. 따라서, 불교의 논리를 
내세우며 종교는 달라도 구원은 하나라고 주장한다.
한국의 종교 다원주의는 과정신학연구소가 있는 클레어몬트신학교에 유학 온 
변선환, 김경재 교수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변선환 교수는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여 감신대 학장직에서 해임되었으며, 김경재 교수는 대승기독교
를 주창하며 기독교와 불교의 접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어
떻게 기독교의 입장에서 타종교에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와 구원은 불가분리하기 때문에, 그들은 타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익명의 그리스도(anonymous Christ) 혹은 우주
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유대인에게는 예수 그리스
도가 보내졌듯이, 타민족과 타종교에는 다른 이름의 그리스도가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자의적이고 모호하다.

인격적 관계인가, 이념적 성취인가?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비인격화하려고 노력한다. 기독교를 기독론 중심에
서 신론 중심으로 전환하며, 신론에서도 여호와와 같은 고유명사 대신 신이
나 절대자와 같은 추상명사를 사용한다. 그러지 않으면 타종교를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익명화는 비인격화이며, 그리스도의 우주화는 추상화이다. 불교
나 유교는 해탈이나 군자와 같은 이념의 성취에 그 목적이 있으며, 공자나 석
가와의 인격적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격적 화해의 복음을 가르친다. 사랑은 추상적인 이념이 아
니라 하나님과 이웃과의 화해와 평
화를 묘사하는데 불과하다. 하나님과의 인
격적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는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삼위 하나님과
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며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따라서, 기
독교는 추상적인 사랑이나 정의를 실현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삼위 하나님
과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며 이웃들과의 인격적 관계를 수립하는데 그 목적
이 있다. 
그러므로, 익명의 그리스도와 같이 인격적 실체가 없는 구원자는 인정될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또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 있을 
수 없다.
바르트의 말대로,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유일한 존재이유(raison d’etre)로
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급격히 와해되고 쇠멸한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
교는 단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구체적으
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재 인물이 성취한 구원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그
가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개념
이나 이념이 아니라 우리를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인격적 존재
로서, 복음은 우리에게 그에 대한 보답적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구원은 종교
적 계율의 준수나 이념의 실현에 의해 획득되지 않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의 대속이라는 은총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타종교
에 구원이 있을 수 없다.

다원주의의 허구성

종교 다원주의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논리적 문제는 상대주의적 사
고의 허구성이다. 그들은 기독교가 독선적이며 타종교를 관용하지 못한다고 
포용정신의 결여를 비난한다. 모든 종교가 다 독특한 가치와 구원을 보유하
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
는 것처럼 자만해한다. 
그러나 보다 넓게 보면, 종교 다원주의는 다원주의라는 이름의 일원론이며, 
상대주의라는 이름의 절대론인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자는 다른 모든 생각을 
정죄하고 오로지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는 절대론을 고수한다. 엄격히 말하자
면, 다원주의나 상대주의는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의(ism)란 
모두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절대적 사고방식이다.

을 포함한 모든 것이 변하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하는 과정신학도 ‘과정이라
는 불변하는 원리(unchanging principles of process)’를 인정하듯이, 절대원
리가 없는 완전한 상대주의나 다원론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는 
사실상 자기종교를 중심으로한 형식적 포용주의이든지 종교적 진화이념을 추
종하여 미래의 통합종교를 추구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일 뿐이다. 
여러 종교를 포용한다는 말은 그것들을 통합하는 상위의 원리를 추종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가능하며, 상위의 종교원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추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는 신앙보다 이성에 근거하고 있는 자연종교 
또는 종교라는 이름의 이성주의에 불과하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는 신앙을 
상실한 종교학자들의 이성적 유희로서, 신에 대한 헌신이나 실제적 신앙생활
이 결여된 언어의 게임일 뿐이다.
원불교학자 김성곤 교수는 종교 다원주의가 시대에 적절한 현대인의 종교적 
태도이며 배울 것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종교의 본질은 유일하고 절대적
인 진리를 추구하며 절대자에게 헌신하는 것이므로 이와 모순되는 종교 다원
주의는 허구적이며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이문균 교수는 종교다원주의의 상대주의적인 주장들이 모두 가정에 불과
할 뿐이며, 사상구조에 있어서 실상 포스트모던적인 것이 아니라 모던시대의 
자유주의신학의 흐름 안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일반은총으로서의 종교

기독교신앙은 타종교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가 죄인이며 구원의 대상으로서, 
그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이해하며 전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종교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더욱이 일반은총
과 일반계시의 교리는 타종교에 대한 이해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계시론을 비판한 칼 바르트는 모든 타종교와 종교 일반의 가치
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모든 종교는 자기를 위한 신앙과 공로적 구원을 추구
하는 불신행위로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은혜의 복음과 완전히 상반되기 때
문이다. 모든 인간적 종교는 자기의 행복과 평안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적 기복
성을 본질로 하지만, 기독교는 그와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죽이며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타종교뿐 아니라 기독
교 안에 스며든 종교의 요소를 분석하
고 비판하는데 신학의 중요한 사명이 있으며, 이 작업의 성공 여하에 참된 기
독교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면, 타종교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가? 불교나 유교를 신봉하며 자기의 욕
심을 극복하고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신도 진리도 부정하며 불법
무도하게 사는 사람을 동일시할 것인가? 
칼빈은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
앗을 심어 놓았으며, 그 결과 참된 종교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양한 종
교적 형태를 통하여 종교성을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개혁파 신학에서는 종교도 이방인들에게도 주시는 햇빛이나 우로
와 같은 일반은총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헤르만 바빙크는 타종교에서도 성령의 역사와 일반은총이 관찰되고 있다고 언
급하면서, 타종교의 창시자들은 기만자나 사탄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들의 시
대와 민족을 위해서 종교적 소명을 성취하고 백성들의 생활에 적지 않게 좋
은 영향을 행사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하였다. 
비록 많은 오류와 혼합되었을지라도 상당한 종교적 요구들을 만
족시키고 생
의 아픔에 위로를 제공하였으며, 비록 부패하였지만 종교에 근본적인 신개
념, 죄의식, 구원에 대한 약속, 희생, 제사, 성전, 의식, 기도 등이 이방종
교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영역을 분명히 구별하여야 한다. 타종
교들에서도 일반은총이 발견되지만, 그것은 종교성이라는 보편적 본성의 추구
를 의미하며 결코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구원은 자연종교에서는 성취할 
수 없는 특별은총의 결과이기 때문에, 타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타종교의 가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신적 존재의 도움을 요청하며, 올바
른 삶을 가르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하려
는 처절한 몸부림도 있고, 하늘의 뜻을 추구하며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려는 
끈질긴 노력도 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율법적 구원을 추구하는 유대교와 유교나 이슬람교에 근
본적인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종교를 사용하여 인류의 급격한 부패를 방지하
는 하나님의 섭리와 일반은총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
기 이전의 오랜 세월동안 
아무 종교도 없었던 것과 종교들이 있었던 것 중에
서 어떤 것이 전반적으로 한국인의 인간성을 보존하는데 도움이 되었겠는가? 
이런 면에서 타종교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모든 종교는 기독교의 
준비이며 기독교는 종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진리와 윤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범람하고 있
는 오늘날, 기독교는 타종교와 협력할 일이 많다. 현대의 다종교사회에서 사
회적 타락을 방지하고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려는데 있어서 같은 의견과 목
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타종교인이기 때문에 협력을 거부한다면, 그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무신론이나 불가지론도 종교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면, 왜 타종교인에게는 거
부감을 가지면서 무신론자에게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가? 그것은 사실상 논
리나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다. 그러나 타종교인을 사랑하고 동
정하기보다 미움의 감정이 앞선다면, 그것은 모두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에도 위배된다. 실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타
종교인이었고, 현재의 타종교인 중에도 많은 미래의 그리스도인들
이 들어 있
다.

기독교의 종교성

바르트의 종교 비판을 극찬했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종교 없는 기독교
(religionless Christianity)’를 부르짖었다. 이 개념은 마치 본회퍼가 기독
교 없는 시대를 희망한 것으로 한국교회에서 흔히 오해되지만, 사실은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다. 
그는 유럽교회가 자연종교로 전락한 것을 비통해 하면서, 유럽교회의 살 길
은 하루 속히 기복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세속적인 자연종교를 탈피하고 십자
가와 고난을 이해하는 헌신된 신앙과 자기부인의 기독교로 회복되기를 외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비종교화란 타종교에도 공존하는 종교성의 제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반성하고 배워야 할 교훈이다.
그러나, 과연 종교성이 모두 정죄되어야 하는가? 교회 현장에서는 종교성이 
난무하여 목회자의 사역 대부분이 교인들의 평안과 복을 빌어주는 일인데, 일
부에서는 이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보다 고고한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의 
고난만을 주장하고 있는 현실은 무언가 심각한 괴리가 있다. 
과연 기독교는 종교성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할 것인가? 리차드 
마우
는 조심스럽게 종교성의 긍정적 수용을 권면한다. 우리는 종교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하는 일부로서 인간의 창조된 본성이므로, 비록 오염된 부분은 조
심하고 이기적 욕심은 배제하지만 인간의 종교적 필요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부단히 성화되고 성숙해야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도구로 사용되는 성도 자신의 건강과 행복도 포함되
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원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헌신을 가능하
게 하는 전인적 열정과 공동체적 평화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