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3: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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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3:10-17 

<이 원고는 2003년 총회교직자수련회 둘째 날 김성수 교수의 강설을 최덕수 
목사(중서울노회)가 입력, 정리한 것으로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편집했다. 
이 강설은 이 시대의 목회 방향과 교회가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
시한 내용으로 김 교수의 양해 아래 게재한다. 혹 입력 과정과 편집 과정에
서 원 강설의 취지를 모호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이것
은 전적으로 편집자의 불찰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편집자 주>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교회
를 세우는 일은 목회자에게 있어 가장 깊은 관심사요, 또 변함없는 관심사가 
되는 것은 목회자의 사역이 교회를 세우는 일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생각의 표면에 드러나거나 입 밖으로 말로 되어지지 않아도 우리들의 마
음 한 편을 차지하고 있어서, 은근히 우리 마음을 짓누르는 짐과 같은 것이
요 마음에
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바로 교회당 건축이다. 목회를 시작한 후 
교회당 건축까지 성공하신 분은 교회 건축과 관련해서 한, 두 가지 사연이 
다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든지, 참 보람과 기쁨이 되는 사연이
든지 말이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교회 건축은 대부분의 교회나 목회자가 관심
과 열의를 보이는 일반적 교회건축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르기를 내가 그 터를 닦았다고 하는 그 교회는 나무나 돌로 짓는 건물이 아
니다. 혹시 바울이 고린도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 건물을 매입하거나 건
축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하지만, 적어도 여기서 교회건축은 건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말한 다음 이어서 “내가 지혜로
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말하니 그것은 ‘너희’라고 불리는 고
린도 교회 신자들이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
님의 집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교회는 농부가 일꾼들을 거느리고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김
을 매고 돌보고 기른 곡식 추수를 하듯이, 
하나님이 친히 일하시고 수고의 결
실을 얻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터와 같은 곳이다. 
말씀의 일꾼들을 통하여 뿌려진 씨를 친히 싹트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공급
되는 말씀의 생수로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밭을 
가리키고자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밭이라” 하였다. 또한 사람이 거
처하는 집을 짓듯이 하나님이 친히 지으시고 그 안에 거하고자 하시는 곳을 
그의 성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돈을 대고 기술자를 불러서 아름답
게 짓는 건물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시되 사람들로, 영혼들로 지으시
는 신령한 집이다. 교회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여기에 원론적으로는 찬성하지만 실제로는 다급한 현실적 
일들 때문에 밀려나 외면당하고 무관심 속에 잊혀진다. 그런 만큼 교회의 신
령한 본질과 거룩한 영광에 대하여 일깨우는 그런 말씀을 접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 마음에 그 뜻을 깊이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신령한 밭이요, 그의 일터요, 그가 친히 지으시고 그 안에 거
하고자 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시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거듭 
확인하고 새겨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로 지어진 신령한 집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신령한 밭과 그가 거하실 거룩한 집으로서 교회를 세
우는 일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터를 닦아 토대를 마련하는 
것과 마련된 토대 위에 건물을 짓는 두 부분의 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첫 번째 일인 교회의 토대에 대해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바
울은 이 터를 자신이 닦아 두었다고 말한다. 내가 닦아 둔 터 외에 다른 터
를 닦아 둔 자가 없다고 할 때, 바울이 전체 보편교회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고린도 개 교회만을 염두에 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경우든지 결
국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개 교회든, 전체 교회의 유일한 토대는 예
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이 교회의 토대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터는 그리스도”라고 할 때, 이 말
은 별 의미 없이 한마디 던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말해
온 내용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다. 전후 내용과의 관계를 의식하면서 그 속
에 많은 내용과 의미를 담아서 한 말이다. 
고린도전서 1장부터 지금까지 전체가 바로 교회의 토대이신 그리
스도에 관한 
말씀이요, 교회가 무엇 위에 세워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비록 지도자들
을 둘러싼 파당형성과 분쟁이 이런 내용을 기록하게 된 직접적 계기였지만, 
오히려 이런 문제 발생이 바울로 하여금 교회의 진정한 토대와 기반이 무엇인
지 밝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서 있는 기반과 토대를 망각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파당을 형성하여 득
세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
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고전 
1:13)라고 힐책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7-18)고 한 바울의 그 유명한 
선언은 바로 교회의 독특한 기반과 토대가 무엇임을 밝히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바울이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 하였을 때 그는 바로 십자
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너희 중에서 예
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
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함으로 고린도 교회를 세운 바울의 사역이 
결국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일이었음을 밝힌다. 
또한 “내가 이미 그 터를 닦아 두었다”고 했을 때 이런 자신의 사역, 곧 지금
까지 십자가의 도를 전한 일을 염두에 두었다. 고린도 교회를 위한 사역이든
지 넓은 의미에서 전체교회를 위한 사도로서의 사역이든지, 십자가의 도를 전
한 것이 교회를 터를 닦는 일이었다. 

십자가의 전파는 교회의 터를 닦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있어서, 전도자로서 겪은 전도로나 그 폭과 깊이
에 있어 바울을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복음은 이런 것이요 복음을 전하
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바울이다. 바울이 아니면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복음의 조직신학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가 바울에 의해서 기록된 것은 이상
한 일이 아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속된 표현을 빌리면, 바울은 복음전도
의 달인이라 할만한 
인물이다. 이런 바울이 평생 힘써온 복음 전도에 대해서 
이렇게 밝힌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복음의 능력이 자기를 통해서 역사하는 것을 누구보다 풍성하게 깊이 경험한 
바울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확인하게 된 한 가지 사실을 알리기를 “내
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들은 사람들이 다 믿는 것이 아니더라. 그 중에서 
믿고 영접하는 자도 있으나 아무리 열심과 성의를 다해서 전해도 끝까지 거부
하고 배척해서 멸망하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복음을 전하기
는 하지만 결과는 전도자 자신이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은 복음사역자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물론 바울이 지금 말한 내용
은 주의 계시를 기록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복음 전도자로서 그의 경험에서 
확인 된 것이다. 전도자의 전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믿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
만, 그럼에도 전도자의 노력과 열심이 사람으로 믿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실 때는 전도해도 성과가 없고 예
수의 영
이 허락지 않을 때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였다. 이것
은 하나님의 계시를 그 어느 누구보다 깊이 경험한 사도로서, 우리 같은 사람
은 감히 처다 볼 수 없는 특별한 인물로서 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우리와 
꼭 같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한 사람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바울은 그 이유를 밝히되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라”(고전 1:21)고 말한다.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말씀,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이 그것을 듣는다고 해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이해하고자 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요, 아무리 믿고자 한다고 해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과 증거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그들
을 믿게 하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보다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뿐이요, 정교하고 심오한 이론을 사랑하는 헬라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
일 뿐이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세상의 지혜나 지
력이나 지식과 
정신적 능력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전도자의 열심만으로는 부족해

인간의 무지와 무능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
되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부인하고 전도의 미련한 것을 사용하신 방법에 대
해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
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
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
려 하였노라”(고전 2:1-5)고 말한다. 
개역성경은 ‘하나님의 증거’라 읽은 사본을 따르지만, 중요사본들은 ‘하나님
의 신비, 비밀’이라 읽고 있기에, 무엇보다 전후 내용과 관련되면 후자를 따
르는 것이 옳다. 우선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한다. 신비나 비밀이란 말
은 통상적으로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의 능
력과 한계 밖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의 능력과 한계 밖에 있는 것으로서 사람으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비밀
과 신비를 자기 지혜로만 깨달을 수 없는 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책임 앞에
서 바울은 심히 떨었다. 문제가 어느 한 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복음
을 전할 그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나라도 그것을 설명
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 있다. 듣는 자와 깨닫는 자 모두 다 능력이 없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을 맡은 자가 전도자이다. 바울은 “심히 두
려워하고 떨었다”고 말한다. 이 일에 있어 자신은 지혜와 능력이 무용지물이
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에 지혜의 권하는 말, 
곧 사람들이 듣고서 수긍하는 것으로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성령의 능
력과 나타남으로 외쳐 선포하였다고 말한다. 

전도는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

어떤 이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라는 것을 이적적 표적으로 해석해서 복
음을 확증하는 이적적 표적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였다고 말하지만, 이렇게 좁
게 해석하는 것
은 전후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우선 십자가의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 전도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라고 말
한 것과 부합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도의 미련
한 방법이었다. 이것이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고 말했
다. 
그런데 바울이 가는 곳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했다고 하면 이런 전도
가 유대인에게 걸림돌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유대인들로 하여금 걸
려 넘어지게 한 것이 십자가의 복음 자체라고 보면 이런 해석을 배제하기는 
어려우나, 전체 글의 흐름을 보면 이런 해석은 부자연스럽다. 무엇보다 전도
의 목적은 결국 십자가의 복음을 믿어 구원을 이루게 하는 것인데, 그러나 믿
음을 표적만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하나님이 복음의 진리됨을 능력으로 표적을 확증하지만, 그러나 표적 그 차제
가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만일 표적 자체가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표적을 목격한 자들이 믿었어야 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하였고 표적보다 오히려 더 극렬히 반대하였다. 
우리로 하여
금 복음을 믿어 구원 얻게 하는 데는 표적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
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으로 친히 믿게 하시는 역사가 필요하다. 성령의 나타
남과 능력으로 전하였다는 말은 성령께서 그의 능력으로 증거하시는 은사를 
따라서 전도하였다는 뜻이요, 이런 성령의 증거하심에 따라 너희들이 복음을 
듣고 깨닫기를 구했다는 뜻이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였노라”는 뜻
은 이런 뜻이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로운 말, 심오하고 논리적인 이론
에 설득 당함으로 생긴 믿음, 인간의 지혜로 생긴 믿음으로 그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 성령께서 듣는 자의 마음 가운데 친히 증거하여 믿게 하시는 그 
믿음이 되기를, 그리하여 너희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겨난 믿음이기를 
기대하고 원하였다고 말씀하였다. 

전도는 성령님 임재의 방편

이런 내용을 정리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 관원의 지혜로
는 알 수 없는 것이라.” 사람들 가운데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사람들을 
이끌어 나가고 다스리게 될 지혜, 소위 이 세상의 엘리트들의 이론과 실천 능
력, 이런 
것들은 비록 세상 차원에서는 탁월한 자들의 지혜이지만 그런 것으
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비밀이다. 
바울은 이것을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
밀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창세로부터 감춰져 왔으나 성령으로 계시되었다고 
말한다. 성령으로 계시된 복음의 비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도 오직 성령으
로 가능하고, 이렇게 전해지는 복음을 믿는 것도 성령으로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복음이 그 능력을 나타내어 죄인으로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히 성령님의 역사가 개입되어야 한다. 신령한 것
은 오직 신령한 것과 결합되어야 한다. 복음이 전도자의 입을 통하여 외쳐지
고 사람들은 이런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에 이르지만, 성령께서 이 모든 과정
에 친히 개입하여 역사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복음을 참되게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의 논리와 이론에 설득 당해 믿는 것
일 뿐이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게 된 참 믿음이 아니다. 전도자를 통하여 
외쳐진 말씀과 함께 성령께서 친히 개입하셔야 만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믿어
지고, 그 결과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참으로 복음을 알리시고 깨닫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일이다. 이런 모든 과정을 가리켜서 즉 십자가
의 복음이 외쳐지고 그것이 믿어진 결과를 두고서 바울은 이르기를 “내가 그
리스도라 하는 터를 닦았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닦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리고 이렇게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밭이라 하나님께
서 농부처럼 밭 갈고 씨 뿌리고 가꾸는 신령한 밭이요 그 안에 거하려는 성전
이라” 말씀한다. 

성령님의 개입을 요청해야

이런 원칙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터 위에 계속 세워져 가는 것에 있어
서도 마찬가지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전 3:10)고 경계하는 말씀에 이어, “만일 누구든
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
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
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전 3:12-13)”고 말씀하였
다. 
믿는 자는 개인으로나 전체 교회로나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여 그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터요 신령한 밭이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안에 거하
시기 위해 지어져 가는 성전이다. 이처럼 교회는 그 토대를 그리스도 위에 두
면서 동시에 계속 그 위에 세워져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집을 지을 때 토대 
없이 짓는 경우도 있지만, 터를 닦고 건물을 짓게 되어 있다. 교회도 이와 마
찬가지로 그리스도라는 토대 위에 세워지고 그 위에 계속 지어 감으로 거룩
과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 
바울은 건축 비유를 들어 사역자 마다 그리스도의 토대 위에 교회를 세워가
되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워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
다. 각자가 각양의 재료로 사용해서 지어가되 그 재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
다. 금은과 같이 불타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것과 불타 없어질 나무나 풀로 
나눠진다. 불타 없어질 세상 것으로 짓거나 아니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신
령한 것으로 지어가거나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세상의 속된 것으로 세상의 지혜와 
원칙, 관행을 따라 지어갈 수도 있고, 영
원히 가치를 잃지 않는 신령한 것으로 지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아무
렇게나 지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를 시험하는 때가 온다고 말씀한
다.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날에 각 교회마다 그 세워진 결과의 본질과 성격
을 드러내실 것이다. 
세상의 속된 것으로 지은 것은 세상과 허망하게 끝날 것이다. 내 온 힘과 수
고를 다해도 그 모든 것이 불타 없어져 버림으로 그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될 것이다. 이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과 함께 불
타 없어지지 않을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지은 교회는 영원히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야

바울을 이 말씀에 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
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
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
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믿는 자는 개인으로서나 전체로서나 하
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거룩한 집이요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게 하시는 성
r
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곳이다. 
하나님의 임재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거룩해진 성전을 속된 것으로 더럽힌
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는 말씀이다. 참으로 두려운 경고
이다. 너희가 세상 것으로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멸하시리라는 말씀이
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니라. 하나님의 임재로 거룩해
진 너희 자신을 속된 것으로 더럽히지 말라. 오직 너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께서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세상에 불타 없어지질 것으로 교회를 세우지 말고, 영원하고 신령
한 것으로 교회를 지어가라는 것이라는 말씀 다음에 한 것이니, 결국 신령한 
것으로 교회를 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한 것이다. 한마디로 그 안에 거
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능력으로 인하여 날마다 성결하여지므로 우리 안에 거
하시는 성령처럼 그의 교회도 거룩함으로 계속 자라가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를 세우는 일은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하여 그 터를 닦
는 것이나, 성령의 내주하심과 능력으로 거룩한 아름다움과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나 일관되게 성령
의 역사로만 이루어진다. 성령의 역사를 떠나서는 교회
가 세워질 수 없다.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야

이런 말씀과 사실 앞에 복음전도자와 목회자로 일하는 저 같은 사람은 매우 
난감하다. 아무리 들어도 자기 재주와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는 사람에게, 온
갖 재주로 성의를 다해도 믿게 할 수 없는 내가 어쨌든 전도자의 위치에 서
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교회로 하여금 성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야 할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복음 전하는 사람이나 말씀을 전해 듣는 사람이나 다같이 자기 힘으로는, 사
람으로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서 오직 성령님의 역사만을 바
라보고 기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게 되었다. 이런 난감한 처지에서 성령
의 역사와 은혜에 대하여 점검할 때마다 곤혹스러운 이유는 우리 자신이 항
상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을 입술에 올리지만 그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치 못하는 우리의 위선 때문
이다. 비록 희미하고 막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없이 분명하게 
경험하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서도 말로 설명하고 증거하는 것은 여간 어렵

지 않다. 오히려 침묵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친히 저들에게 당신을 나타내주시
기를 구하고 기대하는 가운데, 잠잠히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의 형식을 부정하거나 이성의 활동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요 통상적으로는 이런 형식 가운데서 이성과 함께 
이성을 통해서 역사함으로써 어디까지가 성령의 역사이며 어디까지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인지 구별하기 매우 어렵다. 
때로는 자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무분별하게 성령의 것이라 우기는 신자나 
목회자를 발견한다. 반대로 통상적인 경험을 범위를 초월하는 신비하고 이적
적인 것만을 성령의 역사로 몰아가려고 하는 신비주의적 위협도 본다. 그러
나 이럼에도 이런 위험과 애매모호함과 막연함에도 이런 것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의지하는 것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이럴수록 오직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고 간절한 기도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
다. 날마다 그의 능력에 맡기는 가운데 그의 역사하심을 바라고 기대하는 믿
음으로 복음전도와 목회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모든 구원의 일이 성령의 역사
r
로 말미암은 것이기를 기도하고 바라고 또 실제로 경험하는 이 일에 온힘과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느냐 마느냐, 죽은 영혼
이 사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다. 
성령께서 역사해야 한다. 죄인의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언제나 
변치 않고 항상 그대로다. 죄인을 구원하는 유일한 구원의 능력과 근거도 다
르지 않다. 바로 이것을 언제까지 붙들어야 한다. 이는 어느 세대나 시대이든
지 가장 요긴하고 절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죽고 사는 것이 달린 일이다. 이런 사실과 진리를 듣든지 듣지 않든
지 전해야 한다. 복음 전도와 목회의 진정한 주체이신 성령의 역사를 따라 
이 일에 힘써야 한다. 아무리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여도 깨닫지도 믿지도, 
변하지도 않는 교인에게서 목사가 좌절하고 별로 거룩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
는 목회자에게서 절망하는 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도 다시 일어나 이 일
에 온 마음과 힘을 쏟아야 한다. 
우리를 통해 역사하지 아니하면 아무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복음 전하기를 10
년, 20년 해도 별 성과가 없을 때, 우리는 조용히 무릎 꿇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그 일을 내가 어찌 하오리이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령께
서 주의 말씀으로 역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아뢰고 간구하고 탄원하고 부르짖
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평생 10명 앞에서 
목회 할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일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를 
바로 보고 의지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