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결국을 들었으니_김성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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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전도서 12:12-14

김성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 원고는 2003년 총회교직자수련회 첫째 날 김성수 교수의 강설을 최덕수 
목사(중서울노회)가 입력, 정리한 것으로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편집했다. 
이 강설은 이 시대의 목회 방향과 교회가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
시한 내용으로 김 교수의 양해 아래 전문을 게재한다. 혹 입력 과정과 편집 
과정에서 원 강설의 취지를 모호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이것은 전적으로 편집자의 불찰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편집자 주>

흔히 말하기를 세대 차를 느끼기 시작하면 늙어 가는 증거라 말한다. 나이 들
어서 적응 능력을 상실한 탓에 사회 큰 흐름에 동승하지 못하고 뒤쳐지기 시
작하는 증거라는 뜻이다. 넓게 보면 사람이 무리 지어 살면서부터 각 세대마
다 체험해 온 일을 ‘나도 이제야 듣는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요
즘 세태에서 느끼는 단절과 불안감은 단순히 나
이 들어 뒤쳐지게 된 오십대
의 푸념 석인 불평으로 넘길 만한 것이 아니다. 
세계나 사회가 온통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고 규범이 없다. 그런데다가 자신감
이 넘친 탓인지, 자기 방어를 위해 그런 것인지 공격적이 되어 남을 깔아뭉개
기가 예사다. 너무 거칠고 살벌해서 위축되고 겁을 먹게 된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온 규범과 질서가 존중되고 사람
은 그것에 순응한다. 그러나 이것이 무너지면 사회는 급격한 변화와 불안을 
겪게 되고 혼란과 무질서와 살벌한 경쟁과 다툼이 이뤄지는 가운데, 새로운 
질서와 틀이 마련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옛 틀이 무너지고 새 틀을 모색하는 전환기에 서 있
지 않나 싶다. 공산권을 가리켜 철의 장막이라 부르면서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 같은 반세대의 이념 갈등이 종식되었다. 서로 상대방을 절대 악이라 비난
하면서 맞서왔지만, 한 쪽이 무너지면서 이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다. 우리 
사회와 같이 아직도 이 문제가 매듭짓지 못한 경우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이
념이라고 하는 것, 좌우 이념이 시들해졌다. 

새 틀을 모색하는 전환기처럼 보이는 ‘지금’

이것과 함께 이념이라고 하는 거창한 가면 뒤에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이 좀
더 실제적이면서 치사한 갈등과 이유와 원인이 나라와 나라, 개인과 개인 사
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작게는 각양 사회집단의 몰염치한 이권다툼, 겉
으로 표방하는 고상한 이상과는 거리가 먼 주도권 다툼, 민족 차원의 패권을 
노리는 정쟁, 이권 분쟁, 등을 날마다 보고 있다. 
군부독재와 이에 저항하는 세력 사이에 갈등을 두고 보아온 우리사회도 그 근
본은 비슷하다. 어느 한 편이 정의롭고 한 편이 악의 화신처럼 여겨졌지만, 
이런 구분이 얼마나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양상은 다르
지만, 여전히 비리와 회의가 만연하고, 개선되는지 악화되는지 혼란스러울 
때, 인간은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느낀다. 
3공이 무너진 직후 보수 교단에서 시작된 일환으로 합동신학교가 세워졌지
만, 지금 형편에서 우리의 지나온 족적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과연 앞서 말한 
시대와 사회와 다른 모습으로 옳은 길을 따라 흔들림 없이 걸어가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이념도 사라지고 도덕도 사라져 퇴폐와 환멸로 끝나고 한 마디
로 사람들은 거창하고 
고상한 것을 추구할 이유를 상실한 채, 쾌락과 환란과 
퇴폐 문화의 수렁에 날마다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지금의 쾌락 추구의 정도나 수단과 방법이 이미 정상의 범
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건실한 직업 윤리와, 올바르게 살려는 의식을 지탱
할 도덕 윤리 기반이 무너진 지 오래다. 
비록 이것이 삶의 최선의 목표라고 말하지는 않으나 가장 강력하게 사람을 사
로잡은 목표가 돈이 되어 버렸다. 건전한 투자의 한계를 벗어나 증권 투기, 
부동산 투기, 각종 오락 등으로 도박판이 되어 버렸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심각한 것은 건전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땀 흘려 일하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좌
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건전하게 살고자 하는 생각이 설자리를 잃고 비현실
적인 꿈이 바램이 되고 있다. 

쾌락 추구의 정도, 이미 정상 범위 넘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고상한 이상에 도취해서 순수한 열정을 쏟아 붓게 할만한 것
은 정치 사회적 변화에서 일어난 것만도 아니다. 이는 학문세계도 마찬가지
다. 인류에게 거창한 실현을 제시하는 학문적 이상은 학자들 스스로가 포기
해 버렸다. 전체를 아우르는 견실한 이론
과 설명 대신에 지엽적이고 감각적
인 것, 막연한 느낌만으로 이것저것 외쳐대는, 목소리 큰 사람이 설쳐대는 시
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혼란스러운 현상의 배후를 들여다보면 결국 인간 스스로가 자신
의 능력의 한계, 이성의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다르게 말하
면 현실 세계는 인간의 자기 이성으로 그 본질과 비밀을 꿰뚫어 볼만한 정도
로 만만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포스터 모더니즘, 계몽주의 이후 한 동한 신뢰해 온 이성에 대한 냉소적 분위
기가 감지된다. 견실한 이론, 거창한 담론들, 그리고 학문 세계가 제시한 실
천 방안이 실제로는 확실한 진리도 아니고 정확한 사실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모든 분야에서 귄위는 사라지고 실험정신이 대두되어 거리낌 없이 괴팍
한 것도 내뱉게 되었다. 학문 세계에서도 무모하기만 할 뿐이고 무책임한 벤
처 이론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그들의 변은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느냐, 왜 그
래야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어떤 견실한 이론으로 귀착
이 될는지, 어떤 확실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인지 아무도 예측 불가능하다. 

이성의 한계에 직면해 있
는 인간

그러나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가 점점 와해되어 지난 세기에도 여전히 눈부
신 발전이 된 분야는 자연과학이다. 꿈만 같았던 달 여행, 행성 여행은 과거
지사가 되었다. 책상 위에 놓여진 컴퓨터로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 작업으로 
하면 몇 백 년 걸릴 일을 수 십 분에 한다. 정보 처리 능력, 정밀한 기계작
업, 수행 능력이 학문실행분야에서 실행된다. 우주항공, 군사, 기업, 특수 기
업 분야의 대규모 프로젝트는 물론 컴퓨터의 도움 없이는 추진 불가능하다. 
컴퓨터가 주도하는 가상 현실은 현실이 되었다. 가상현실, 사이버 세계라고 
하는 것은 어쨌든 경험하는 현실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인터넷, 온라인게
임, 온라인 쇼핑 등은 일상생활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로서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변화는 의학 분야에서 일어나는 혁명이라 생각된다. 게놈 지도를 통
해 단순한 질병 치료 목적을 넘어서서 인간의 생로병사의 전 과정의 비밀을 
풀기 위해 부단히 연구하고, 그간의 성과에 근거해서 장담하기를, 완전한 해
결은 아니나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 조정할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r
이런 것이 목사에게 직접적인 영향과 충격을 주는 것이 의학계가 다루고 있
는 대상이 인간의 생명이나, 출생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생명윤리에 대해 심
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고, 더욱이 인지 분야에 있어서 두뇌의 물리적 구조와 
성질에 대한 연구를 넘어서서 사고나 감정, 정신 영역까지 취급범위를 급속
히 확대한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과 관계된 모든 것을 자연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삼고 그 
비밀을 파헤치려고 하고 있다. 그 결과 신령하고 영적인 것들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물질에 수반하는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거의 모든 정
신 내지 영적 현상은 물질차원의 것으로 환원되었다. 사람의 물질적인 부분, 
육신에 국한했던 자연과학의 관심이 영적 영역도 침범하였다. 

생명윤리에 대해 심대한 영향 끼친 자연과학

목사가 과연 설자리가 어딘가 자문해 본다. 요즘 들어서 목회 사역이 본래 관
심 영역인 영혼의 문제에서, 즉 영원하고 가장 근본적이 문제에서 점차 밀려
나고 있다는 증후가 보인다. 물론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레포츠 교회니, 목
사는 광대가 되어야 한다니 하면서 목회사역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엔터테이
너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런 자질은 아무나 갖지 못한
다. 문제는 그들이 주는 즐거움이 어떤 즐거움인가 하는 것이다. 신령한 기쁨
이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그런 즐거움인지, 또 어떤 방법으로 즐겁게 하는가
가 문제이다. 
일상적 생활영역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구별 짓는 기본적인 포괄적인 틀인 남
녀 질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남녀관계에 대한 종래의 통
념이 무너지고 새로운 주장이 제기된다. 그 변화의 흐름이 너무 급변해서 웬
만한 남성은 적응할 자신을 잃어버린다. 
부모 자식간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난다. 부모에 대한 공경, 순종을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자식들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많고 
당당한지, 모두가 제 권리는 찾고 의무는 저버린다. 자식을 응석받이로 키운 
가정교육 탓도 있지만, 이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라고 심
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견고히 섰던 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변화가 있으나 문제는 앞으로 초
래될 결과에 대해 낙관하기가 어렵다. 어디까지 어떻게 변하게 될는지 
예측 
불가능하다. 그것이 긍정적일 것이라는 기대가 어렵다. 오히려 염려와 불안
과 걱정이 앞선다. 나야 나이 들어 어차피 서산에 걸린 해요, 살만큼 살았다 
해도 이런 현실과 맞닥뜨린 자식 세대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생각하
면 암담하다.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사회나 가정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모습
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면 지금은 정상의 범위를 넘어 광기에 가깝
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의 사회나 세계를 바라보면서 때로는 거대한 정신병
자 수용소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도, 감당할 수
도 없는 거대한 변화 앞에서 망연자실해 하고 체념하면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이, 나오는 것이 탄식이요, 한 세월 이렇게 지내는가 보다고 여기는 것이 보
통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전대미문의 상황이요, 이런 유사이래 없었
던 일이요, 말세지말이라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다
른 시각에서 바라 볼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의 변화는 정도의 범위를 넘어 광기에 가깝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말씀이다. 물론 끊임
없이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한다. 전
도서가 기록되던 시절도 변화무쌍한 시대였다. 전도자가 살던 시대뿐만 아니
라, 어느 세대도 변화무쌍한 시대였다. 매일 뜨고 지기를 반복하는 해의 운
행, 동서남북 제 마음대로 방향을 잡아 흐르는 바람의 종잡을 수 없는 움직
임, 수많은 시내와 강들이 바다로만 흐르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이것도 해 아
래서 일어나는 한 예일 뿐이고…… 전도자는 쉴 사이 없이 바삐 움직이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고, 눈으로 보아
도 차지 않는다고 말했다. 해 아래서 일어나는 일은 복잡하게 움직이고 끊임
없이 변한다. 그러나 이렇게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시대에 대한 전도자의 결론
은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한다. 
해 아래서는 새것이 없으니 무엇을 가리켜 “보라, 새것이라” 할 것인가? 오
래 전 세대도 이미 있었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후세대
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유사이래 이런 것은 처음이라 외쳐도 실제
로 그것
은 언제나 있었던 일이요, 후세대가 기억하지 못해서 하는 말뿐이다. 
전도자는 이처럼 복잡한 세계임에도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어떤 시대나 어느 때나 변하지 않는 것,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로 들어 말한다. 
끊임없이 세대가 오며 가지만 땅은 언제까지나 있다. 해는 매일 뜨고 지기를 
반복하지만, 동에서 뜨고 서로 진다. 바람이 이리 저리 불어도 어떤 한 길을 
반복할 뿐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좁은 공간을 왔다 갔다 할 뿐이다. 모든 물
이 바다를 넘치게 하지 못한다. 여전히 바다는 받아드릴 여력이 있다. 변하
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 인 것이다. 
이런 종류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엔 다른 형태로도 발견
된다. 인간은 피조계의 가장 탁월한 존재이나 그 한계가 빤하며 어느 시대나 
인간은 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 전도자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하
늘 아래 행하는 일을 살핀즉 수고하게 하신 것이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
자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써서 하였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지혜가 많은즉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면 근심을 더하느
니라.” 

전도자의 결론은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는 것

어느 시대 그 누구보다 뛰어난 전대미문의 지혜와 지식으로 만물의 본질을 파
악하려 했고, 그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려 하였지만, 다 실패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전도자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다 시험했으나 결국 그것은 만물
의 본질과 의미를 파악하는데 무력함을 발견하였다. 한 걸음 양보해서 어떤 
것이 참된 지식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인가 연구했으나 그것도 
실패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성의 근본적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인간이 소유한 가장 강력한 힘, 가장 신뢰하고 자랑하는 이성이 사물에 대한 
궁극적 지식을 깨닫게 되는 삶의 지침을 얻는데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역으
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는 인간의 이성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만
만한 것이 아니다. 그 본질과 모든 비밀을 인간의 이성에게 쉽게 열어 보일 
만큼 세계와 현실은 단순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아무리 궁구하여도 다함이 없을 만큼 깊고 신비하
고 복잡하다. 
이성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 대한 말씀이다. 어느 시대 어떤 사
람이든지 사람은 이런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항상 이런 
한계 내에서 존재하고 살아간다. 이렇게 본다고 하면 어떤 의미에서 전도자야
말로 포스터 모던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의 한계와 무능함을 절감한 사람이 어찌 전도자 한 사람
이 뿐이랴. 그전에도 그 후에도 수많은 사람이 인간 이성의 한계 앞에서 허망
해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요즘 그처럼 떠드는 포스트 모던이 결코 새로
운 것이 아니며, 유사이래 수없이 반복된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쾌락 추구의 현상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전도자 자신이 낙을 누림으로써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다 해봄으로 해 아래 인생의 의미를 재어보려고 하였다. 
술독에 빠지는 일에서부터, 온갖 사업을 크게 벌이고 성취해보는 기쁨에 이르
기까지, 그가 맛보고 시험해 보지 않은 즐거움이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말하려고 했지만, 삶의 목적과 가치를 쾌락에
서 찾으려고 한 것은 낮선 일이 아니다. 정도와 모양은 다르지만,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있었다. 어느 시대도 포기하지 
않고 집착한 것이 쾌락과 즐거움
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이런 인생이 동물과 다를 게 뭐냐? 과연 인간의 
고귀함과 탁월함을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까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는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이나 묻게 되는 새로운 질문이 아니다. 사람의 조
상, 원숭이가 진화했다는 것은 사람과 동물 사이의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
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니 사람이 뭐가 다른가?”라고 전도자가 말하
고 있다.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간다고 하면서 
인간의 영적 구분과 탁월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유사이래 수없이 반복된 현상에 불과 

요즘 자연과학에 의해서 제기된 문제는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옳고 바
르게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에게 깊이 좌절하고 절망하게 하는 사회적 부조리
의 문제도 오늘과 전혀 다르지 않다. 전도자는 옳고 그름을 밝히는 재판정에
서 부조리를 보았다. 힘있는 자에게 학대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가난한 자
의 슬픔을 보고서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났다고 말한다. 남보다 한 가
지 더 가지고 더 높아지기 위해서 아둥바둥 거리며 치열하게 
경쟁하는 삶을 
보면서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차라리 제 살 먹고 굶는 것이 나은 것 같
다. 
그러나 진지하게 사는 삶을 예찬하다가 탐학이 지혜자를 망치게 하며, 학자
적 양심이 무너지고 곡학아세하는 일, 돈 몇 푼에 양심을 파는 일을 보고서 
또 다시 허망해 한다. 아무리 지혜롭고 명철하다 해도 알고 보니 그저 그렇더
라,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 그 정도임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은 거기서 거기
다. 부패한 인생을 한 마디로 인생이 마음의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
을 품다가 후에 죽은 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무엇보다 인생에는 확실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자연과학이 그처럼 매력적이
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결과를 예측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로는 그렇지 않다. 세상사는 그렇게 예측할 수 없다. 인생 자체가 불확실한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자기 세계에 대해서 확실히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
다. 
그래서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될 가능성을 생각하고 식물을 물 위에 던지
는 일을 한다.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런 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잃
을 것을 각오하고 수 만금 투자하듯이, 앞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에 일곱 가지, 여덟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대
책을 세운다. 전도자는 풀이 죽는다. 

자기 세계에 대해 확실히 말하는 것은 불가능 

오늘 말씀의 권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전도자
의 권면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종교적 이상가의 권면이 아니다. 세계와 인생
의 불가해한 것과 복잡다단함을 무시하고 철없는 어린 아이처럼 밀어붙이는 
순진한 이론이 아니다. 전도자의 권면은 해 아래서 일어나는 일을 깊이 체험
한 자요,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와 인생의 모든 부분을 속속들이 깨달은 자로
서 누구보다 현실을 깊이 아는 자로서 주는 권면이다. 
하나님 계명대로 살라 가르치면 어떤 이는 목사는 현실을 모른다고 말한다. 
목사는 현실을 모른다고 해도 전도자는 그렇지 않다. 그는 현실을 가장 깊이 
체험한 자다. 아무리 책을 지어보아야 끝이 없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은 대 학
자요, 아무리 공부하고 연구해도 몸만 피곤할 뿐, 궁극적인 한계를 체험한 지
혜자로서 주는 교훈이다. 최고의 권력자, 왕, 전대미문의 지혜를 갖춘 전도자
로서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난 다음에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변화무쌍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 있
었나 생각하면서 닥치는 일마다 일희일비하는 자들에게 해 아래는 새것이 없
다고 말한다.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해도 거기서 거기요, 그런 근본 한계와 틀
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신령한 지혜자로서 이런 깨달음을 입은 계시자로서 
주는 권면이다. 
해 아래서 진행되는 역사와 인생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희로애락의 변화가 
있어도 이런 자체로는 인생이 허무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면서, 그 누구라
도 자기 인생 그 자체만으로 허망할 수밖에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그
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허무를 넘어서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이 허무에서 벗어난 유일한 길로서 가르친 것이 오늘 말씀이다. “하나님을 경
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 이것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과 해 아래
서 삶의 허망을 느낀 모든 자들에게 주는 결론이다. 변화무쌍한 세계를 경험
하는 자들에게 변화할 수 없는 것, 결국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가장 
근본적이고 변함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사람의 본분을 일깨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계명을 지키고 그 복된 다스림에서 살아가는 것
이 인생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 인생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게 하는 것이
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라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화될 
수 없는 사람의 본문이 이런 것이라 가르친다. 인생이 무엇인지 세계가 무엇
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대답해 주지 않는 이성의 한계 앞에서 하나님의 계
명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참 본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공의와 불의가 뒤바뀐 부조리 앞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 되묻는 우리에게 하
나님의 계명이 확실하고 이것이 옳고 바른 것이라고 말한다. 해 아래 자행되
는 학대와 눈물 앞에 절망하는 자에게 언젠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에 따른 
공정한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한다. 우리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 감
당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일깨우길 지금은 참뜻이 숨기워
져 있으나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며, 궁극적 판단의 날에 모든 것이 그 참된 
가치와 의미를 평가받게 되리라고 일깨운다. 이것이 변화무
쌍한 세상에 여전
히 확고부동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붙잡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만물의 경배와 찬송
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인간의 본분 역
시 지금이나 어떤 시대 상황에서도 불변이라 말한다. 
물론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는 인생으로 거울을 통하여 보는 듯 막연한 불확
실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은 부조리와 무지와 불가해한 
것으로 인해 그 참된 의미가 숨겨져 있으나 언젠가 그 숨기운 것을 다 드러내
실 때, 그 참된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실 때, 진정한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
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그 날 앞에 책임 있게 사는 것이 진정한 지혜
자의 삶이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그 나라의 약속 앞에 책임 있게 사는 것이 
해 아래서 사는 인생에게 있어서 변함 없는 원칙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에 따른 공정한 심판이 있을 것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치시는 말씀에 나를 맡기며 사는 삶, 말씀으로 나를 통
치하시는 삶에 나를 부탁하는 삶이 복되고 의미 있다고 말씀하신다. 혈기방장
한 청년은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고 
부패한 것에서 돌이키라고 말한다. 짧은 
인생에서 남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므로, 시편기자는 “내 
소유는 이것이니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이것이 내 삶에서 가장 소중
한 것이니, 주의 법이 천천 금은 보다 승하다”고 노래한 것이다. 모든 것이 
끝이 있어도 주의 말씀이 심히 넓어 무한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해 아래에 새것이 없다고 하면 새로운 말씀도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있어도 
그 말씀 위에 다른 새로운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세계와 인간의 근본 
상황이 변함이 없다면 과거의 말씀이 오늘 시대에도 말씀하시고 그것으로 충
분하다. 다만 그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늘을 살아갈 그 말씀과 지혜대로 살아
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문제다. 주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것
이다. 마치 우물가에서 목말라 있음에도 왜 우리는 목이 갈한가? 왜 내 영혼
이 갈급한가? 왜 내 영혼이 타는가가 문제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명령하시며, “내가 세
상 끝날까지 함께 있으리라” 하신 주의 약속, 어느 시대나 변함 없는 이 말
씀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을 맡은 자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어느 시
대보다 이 말씀의 뜻을 새겨보아야 할 때가 오늘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