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시편송의 위치_배현주 강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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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시편송의 위치

배현주 강도사/ 소식교회

역사적 개혁 교회가 예배시(禮拜時)에 찬송의 규범으로 삼았던 시편송
(Psalter)을 부르는 정신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 교회에서는 찾아보기
가 상당하게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 다양하게 변해 버린 교파(敎派) 교회적
(敎會的) 현실 속에서 우리 장로 교회는 역사적 개혁 교회의 유산에 대한 심
중한 숙고를 간과(pass over)하고 시대에 발 맞추어 가기에 급급하고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오히려 역사적으로 개혁 교회가 찬송(Hymnal)의 규
범으로 삼고 노래하였던 ‘시편송’을 부르는 그 정신을 살피는 것은 시대가 바
뀌어도 바뀔 수 없는 진리가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에 
맞는 예배의 찬송을 늘 고민하고 연구하여 갈 때, 개혁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
들은 역사적인 개혁 교회의 유산들을 좀더 심도 있게 살펴야할 것이다. 
그 중에서 역사적 개혁 교회가 즐겨 불렀던 ‘시편송’
에 대한 논의(論議)를 하
는 것은 급변하는 시대에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자(者)로서 교회가 예배의 찬송으로서 사려 해야할 중요한 사안이다.

I. 초대 교회에 있어서 ‘시편송’의 역사적 위치
새 언약 아래에서 교회가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받
은 진리를 드러내며 하나님을 온전히 찬송하고자 사도와 선지자들이 의하여
서 제정되어 새 언약 아래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
는 영적 제사 이다. 언약의 경륜은 바뀌었지만 그 언약의 백성들에게 말씀하
시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은 변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새 언약 아래에
서 예배는 제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그 정신이 사라진 것이 아니
고 여전히 사도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구약을 계승하고 구약의 제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 예배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송은 아주 중요한 가치와 의의를 가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의 방식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찬송
을 부르는 방식에 대하여서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기
초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초대 교회가 불렀을 찬송이 무엇인가를 살
피는 것은 아주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역사적으로 초대 교회의 음악이 무엇인
지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는 거의 없다. 즉 남아있는 초대 교회 시대의 자
료로서 주후 1세기에서 주후 3세기까지의 음악의 악보라든가 음악에 관련된 
자료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주후 5세기쯤에 신학자 보에티우스가 교
회의 음악에 대해 언급한 것이 가장 최고(最古)의 교회 음악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러 역사적 문헌을 통하여서 알게되는 것은 주후 3세기까지는 ‘시편
송’ 만을 부르는 것이 교회의 전통으로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후 4
세기 이후 교회가 로마 제국에 흡수되어 국교화가 진행되면서 점차적으로 교
회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교회의 예배가 세속화되었고 그 이후로는 점차적으
로 ‘시편송’을 부르는 전통이 사라진 것으로 아려졌다. 그리고 주후 7세기쯤
에 오면 교회 음악이 점차적으로 세속화되어서 비록 그 음악성에 있어서 고
대 교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할지라도 ‘시편송’을 부르는 정신은 희미
하여지고 사라지기 시작했
다.

결국 ‘시편송’을 부르는 정신이 사라지자 교회는 점차적으로 그 ‘시편송’을 
부르기에 합당한 곡조와 가락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것이 중세 교회의 음악
의 역사이다. 주후 11세기가 되면 당대의 유럽 세속 음악가들에 의해 불렸
던 ‘관능적이고 부패한 음악들’이 교회의 음악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 대
표적인 음악은 프랑스의 세속 음악가들의 음악인 투르바두르와 투르베르이
다. 이 음악들은 12세기와 13세기를 거쳐서 로마 교회의 중요한 미사곡으로 
들어오게 되고 교회의 음악은 중세가 되면서 더욱 심각하게 부패하게된다. 그
렇게 부패하게된 교회의 음악은 르네상스 시기가 되면서 ‘아르스 노바’라고 
하는 새로운 음악 정신에 의해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이 전반적으로 혼합되
어 버린다.

II. 개혁 교회에 있어서 시편송의 역사적 위치
종교 개혁 이후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그런 로마 교회의 종교 음악을 거
부하고 초대 교회의 전통에 기초한 새로운 교회 음악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것은 초대 교회가 전통으로 삼고 불렀던 ‘시편송’을 다시 부르는 것이었다. 
이 결실은 요
한 칼빈과 그가 목회한 제네바 교회에서 보게 되었다. 그것이 바
로 칼빈의 제네바 교회가 편찬한 제네바 시편가이다(Geneva Psalter). 이 제
네바 시편가는 후대에 여러 판을 거듭하면서 개혁 교회 안에서 중요한 찬송가
로 사용되었다. 비록 다른 개혁 교회들인 영국이나 스코틀랜드 그리고 미국에
서도 자체적인 ‘시편가’를 편찬하여서 불렀을지라도 ‘제네바 시편가’는 개혁 
교회의 ‘시편가’의 역사(歷史)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가 사
용하는 찬송가 1장이 바로 ‘제네바 시편가’의 가락으로 부르는 찬송이다.

‘제네바 시편가’의 정신은 후에 스코틀랜드에서도 자체적인 시편가를 편찬하
게 하였고 현재 스코틀랜드의 장로 교회의 음악 정신으로 여전히 보존되고 있
다. 미국에서는 순수한 장로 교회 시대에까지 시편송을 사용했다. 그러나 시
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대에 시편송을 다른 찬송과 대체하여 부르기 시
작했다. 

시편송에 다른 가사를 첨부하거나 시편송의 가사를 전부 삭제하고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으로 찬송을 지어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노래들은 후대
가 되면서 
새로운 찬송가 편집에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
물이 아이삭 왓츠이다. 이 사람은 18세기에 일어난 ‘유니테리언’ 운동의 영향
으로 ‘전적 타락’ 교리를 신봉하는 칼빈주의를 거부하였다. 그는 ‘제네바 시
편가’를 나름대로 작사하여 불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실험적인 가락을 넣어
서 흥겹게 찬송을 부르기도 하였다. 

이런 정신이 후대 미국 교회에 전해져서 찬송의 본래 정신인 장엄미와 엄숙함
과 거룩함과 정결함은 사라지고 조잡하며 조급하고 어수선한 노래들로 점차적
으로 교회 음악이 채워지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시편송의 부패의 역사는 후대에 무디와 그의 전도 팀의 일원이었던 생
키가 불렀던 복음송가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 찬송가에 담
겨있는 생키의 복음송가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일 예배에 부르기에 적합하
지 않은 노래들이다.

III. 시편송에 대한 성경적 근거
주후 1세기에 사도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에 시편송을 부르도록 하였
다. 그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서 찾
아 볼 수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의 생활에 대하여서 권면하면서 신자들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
라'(엡 5:19)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는 곧 시편(Psalter)을 의미하
는 것이다. 그리고 ‘찬미’는 초대 교회 시대에 ‘의식을 위하여서 불렀던 노
래'(The Liturgical Song)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에 합당한 노
래'(The Song for the Worship)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령한 노래’란 세속적인 가락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시편
송’을 부르기에 합당한 가락으로 부르는 노래를 의미한다. 사도 시대로 소급
하면 ‘신령한 노래’란 그 당시에 회당에서 불렀던 ‘시편가’를 의미하는 것으
로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당시의 여러 노래들 즉 세
속적인 노래들과 구별되는 교회의 예배에서 불렀던 신령한 노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편’을 가사로 하는 예배에 합당한 신령한 노래
라고 할 수 있다. 

결론
베토벤은 그의 저서에서 ‘노래
는 사상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도구’라고 하였
다.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가장 부패한 세속적인 사상
을 표현하는 가락을 넣어서 자기의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을 가사로 삼고 부른
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예배에 부적절한 노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제
사 제도를 더렵혔던 죄악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찬송은 가장 좋은 표본으로서 ‘시편’을 가지고 하나
님을 찬송하기에 가장 합당한 ‘가락’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우며 경건하고 엄
숙하고 장엄하게’ 불러야 하는 것이라고 사려된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는 바로 그의 진리를 따라 성령 안에서 드려지
는 예배이다(요 4:24). 진리와 성령은 불가분리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는 이 시대에서도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 드리는 자’를 찾으신다.
참으로 ‘성령’이 충만한 예배는 ‘진리’가 충만한 예배여야 하며 ‘진리’가 충
만한 예배가 ‘성령’이 충만한 예배인 것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신자

n들의 예배를 역사(役事)하시는 것은 오직 ‘성부와 성자로부터 받은 진리 안에
서’ 일뿐이다. 

‘진리’를 떠난 예배는 더 이상 예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잔치’일 뿐
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만을 따라 가고자 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다. 이것을 요한 칼빈은 ‘적정과 절도의 원리(Regula 
modestae et sobrietatis)’라고 하여서 그의 ‘성경 해석’과 그의 ‘생활의 실
천 원리’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지 않는 것은 행하지 않
으려고 하는 강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교회들이 춤추고 교제하는 교
회가 되어 가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리만의 ‘놀이’를 하고 싶은 우리
의 부패성의 표현일 뿐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시편송’은 다시 회복되어야 할 교회 예배 음악의 
중요한 내용이며 예배가 합당하게 드려지는 중요한 방식이다. 예배에서 합당
한 찬송을 폐기하고 하나님께 자의적으로 예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말씀의 
선포와 찬송은 예배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 중
에서 교회가 찬송을 부를 때에 ‘시편가’를 부르는 것은 찬송의 본질을 구성하
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가’를 부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
는 ‘찬송의 본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