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뭉클했던 크리스마스 전야(前夜) _박상준 목사

0
17

가슴 뭉클했던 크리스마스 전야(前夜)

박상준 목사<개금교회 부목사>

강원도에서 나서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나
는 서울에서 주로 생활을 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만 3년 만에 신학대학
에 입학하게 된 뒤부터였다. 그렇게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느 교회에 다
녀야 할 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춘천에서 만나 알게 
된 한 목사로부터 자신의 형이 목회하는 아주 작은 교회에서 사경회(査經會)
를 인도한다고 하여 물어 물어 찾아 간 교회가 곧바로 출석교회가 되고 말았
다. 

당시 그 교회의 이름은 보훈(寶訓)교회였다. 보배로운 교훈이 있는 교회라는 
뜻이다. 서울 사당동에 있는 정금마을 입구의 상가 지하에 위치한 개척교회였
다. 신학대학생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인지라 그 교회의 목사
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당신의 교회에 붙잡아두려 한 것은 당연지사. 요즘
같이 통풍도 잘 되고 볕도 잘 드는 그런 지하가 아니라 환풍
기를 통해 강제 
환기를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곳이었고, 빛도 전혀 들어오지 않는 그
런 교회였다. 밖에 있다 들어가면 늘 퀴퀴한 냄새가 나곤 했었다. 그래도 뭔
가에 의해서(지금 생각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음을 확신하지만) 꾸역꾸역 
그 교회에 다니며 어린 주일학생들을 부지런히 가르쳤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
는다. 

대학생활 거의 내내 그 교회에만 다녔다. 그러다가 4학년 1학기를 마칠 무
렵, 비로소 그 교회를 벗어나고픈 마음이 들었다. 단지 큰 교회에 가서 좀 
더 배우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과감히 그 교회보다 몇 십 배, 아니 백 배 이
상 큰 근처 다른 교회 대학부에 등록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
다. 만나는 사람의 얼굴과 분위기도 영 딴 판이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전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주일 오후와 저녁 내내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기 일쑤였던 것도 생각난다. 누구를 가르치는 일도 전
혀 하지 않게 되다보니 주일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고, 그만큼 주일에 대한 기
대감도 없었다. 자연히 지난 3년 반 동안 몸으로 부대끼며 가족처럼 지내왔
던 ‘내 교회’에 대
한 향수(鄕愁)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학 졸업식을 앞두고 잠시 강원도에 내려와 있었지만, 마음 정하고 갈만한 
교회가 없었다. 마침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크리스마스마저 그렇게 의미 
없이 보내서야 되겠는가 싶어서 얼마 되지 않은 여비를 얻어 가지고 서울 가
는 기차를 탔다. 이미 서울 거리가 낯이 익은 상태인지라 오히려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나의 발걸음은 아주 설레는 마음으로 내가 떠난 지 6개월쯤 되는 그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가
득했다. 손에는 따뜻한 군밤 한 봉지와 호떡 한 봉지가 들려 있었고, 눈빛은 
마치 옛 애인을 만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 사이 교회는 근처 다른 
곳으로 이전을 했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다행히도 전화번호
는 그대로여서 가까이 가서 전화를 했더니 내가 대학 시절 내내 가르쳤던 김
성준이란 학생이 크리스마스 이브 행사를 준비하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그리
고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이내 좇아 나와 나를 아주 뜨겁게 맞아 들였다. 내
가 가지고 간 따뜻한 호떡보다 훨씬 더 뜨거운 사랑이 나와 그 
교회의 어린 
식구들 사이에 오갔다. 

나를 더 눈물나게 했던 것은 나의 전화를 받고 달려나와 마중을 했던 그 학생
이 말하기를, 내가 떠난 후에 아무 지도 교사 없이 예배를 드려왔을 뿐만 아
니라 조촐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자기네들끼리 열심히 준비하였노라고 자랑스
럽게 말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이었다. 와락 눈물이 속에서 솟구쳤다. 담임 목
사는 그대로 계셨지만, 어린 학생들에게는 목자 없는 양이나 다름없었던 것이
다. 그네들이 목자 없는 양임에도 불구하고 흩어지지 않고 잘 모이고 있으
며, 나름대로 성탄을 준비했노라는 말을 들을 때, 나의 마음은 내가 너무 이
기적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떠났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들이 살아 있
었구나, 살아서 내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구나 하는 마
음이 그대로 전달되면서 나의 눈물샘을 크게 자극시켰던 것이다. 

이내 담임 목사를 찾아간 나는 지체 없이 다시 와서 봉사하겠노라고 아주 확
신 있게 말씀을 드렸다. 그로부터 8년을 그 교회에서 더 섬기며 나의 청춘을 
온통 그 교회에 쏟아 붓게 되었다. 지금도 그 교회가 그립다. 해마다 성탄절
이 다
가오면 가슴 뭉클했던 그 해 크리스마스 전야(前夜)의 추억이 내 마음 
속에 한 폭의 명화(名畵)처럼 남아있음을 되새기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