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Augustine)의 눈으로 본 교회의 연합
이홍년 목사/ 광양산수교회
우리 교단의 오랜 준비와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모든 이해 타산의 벽을 넘
어 장신교단과 우리 교단이 하나가 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생명에 연결된 모든 교회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직 하나의 교회이며, 통일
된 한 생명체인 까닭에 서로 연합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 교단은 향후에도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으로 보이
고 또 마땅히 그리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반드시 신
앙고백의 동질성과 교리적 일치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
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됨”(엡 4:13) 이 교회가 표방해야 할 진정한
하나됨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어거스틴(Augustine)의 행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
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들과 맹렬히 싸웠다. 그들은 완전주의 교회관을 내세
우면서 자신들만의 세례가
유효하고, 그들의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여
교회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분파주의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지상의 교회는 그
자체에 가라지와 알곡을 함께 담고 있는 까닭에 결코 완전할 수 없으며, 세례
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친히 베푸시는 까닭에 그 자체로 유효하다는 영
적인 깊은 통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오직 분파주의자들과만 싸운 것은 아니다. 그는 한편으로
는 도나티스트들을 경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이단들을 대항하여
쉼 없이 싸웠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이다. 도나티스
트가 완전주의 교회관을 주장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부정한 반면, 펠라기우
스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의 절대성을 공격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더 강조하고 악
을 행할 자유와 선을 행할 자유가 동등하니 인간은 얼마든지 선을 행함으로
써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그의 가르침은 자연히 인간의
자유에 절대 의존적이 되었고, 반대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이 크게
침해를 받았다. 따라서 복음
의 도리를 밝히 깨달았던 어거스틴은 이 또한 맹
렬히 싸워야할 대상으로 지목하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예정)
과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결코 완전주의 교회관을 갖지는 않았지만 교회를 교리적으로 순결
하게 보존하려는 노력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만약 이 때 어거스틴이 이
러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았다면 향후 기독교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
을까? 도나티스트들을 경계하여 교회는 화해와 일치의 길로 갈 수는 있었겠지
만, 복음의 순수성은 깨뜨려지고, 교회의 순결은 파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갈
라디아 교회들에 유대주의의 망령이 들었을 때, 이에 대항하여 맹렬히 싸웠
던 사도 바울의 눈물겨운 투쟁이 없었다면 그 때 이미 기독교는 유대주의의
한 분파로 전락하고 말 뻔하였듯이, 펠라기우스에 대항한 어거스틴의 도전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에 끌려 다니는 보통 신(神)으로, 기독교는 인
간의 부름과 요청에 부응하는 보통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뜻을 결집하고 교단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맹렬한 기세로 달려가더라도 잠깐의
여유와 자성(自省)이 필요한 이유가 바
로 여기에 있다. 오늘 우리에게 어거스틴의 균형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현상
적인 결과에만 의존하여 평가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교회를 비로
소 교회 되게 하는지 심사숙고하는 노력이 아쉽다. 믿음을 가졌으되 인간이
연약하여 넘어진 형제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동시에 교회를 진리
안에서 순결하게 보존하고자 애썼던 큰 스승의 흔적이 그래서 이 시대에 더
크게 남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