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이 환영받으려면 _ 최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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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이 환영받으려면

 

 

< 최덕수 목사 · 현산교회 >

 

 

“성경적인 교회 모습 이루는 일에 우리의 총력 기울여야”

 

 

우리 주변에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거나,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문제를 지적하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에서는 매스와 같은 날카로운 말로 상대의 잘못을 질타하는 사람들이 환영받는다. 불평을 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통쾌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의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사람들의 역할은 그 사회의 타락상이 깊어질수록 더욱 돋보이는 법이다. 합신 교단이 태동될 때의 상황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운동권 학생들이 갖는 젊은 혈기나 현실에 대한 울분을 토해내는 방법으로는 부조리한 상황을 바꿀 수 없다.

 

개혁은 침묵하는 다수에 의해서도 이뤄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들을 향해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소위 ‘저격수’들에 의해서도 이뤄지지 않는다. 정치계에서나 교계에서 개혁이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 저격수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우리 교단 안에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개혁 자체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라기보다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총회나 교계에서 개혁 신학을 주장할 때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어느 청교도 목사가 한 말이다. “기도회에서는 거룩한 성자처럼 기도하며 일반적인 생활에서도 위대한 성자처럼 사는 자들이지만 교회 회의에서는 악마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목회자들이 설교하고 기도할 때는 청교도가 살아 나온 듯한 인상을 주는 분들이 회의석상이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거친 말과 쓴 소리를 쏟아 내어 받은 은혜를 다 쏟아 버리게 만드는 경우들이 없지 않다.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의 치부만을 드러내는 일만으로는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더불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진리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이들은 사실 진리를 알지도 못하며 진리대로 행치도 않는 사람이다.

 

진리는 언제나 사랑과 함께 일하고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일하는 법이다(고전 13:6). 사랑은 비록 그 말끝이 날카롭기는 하지만 부드러움을 준다. 사무엘 러더포드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서한집을 읽어보면 러더포드가 신학적으로는 매우 날카로우면서도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은 한없이 넓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독기 어린 눈초리로 말하지 않으며 판단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으로 말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말에 의해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통쾌해 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가슴으로 아파한다.

 

진리는 사랑과 우애의 펴진 손을 가진 마음으로 말해야지 주먹을 쥔 마음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가 우리들의 성화되지 못한 성품으로 인해 방해받지 않도록 사랑으로 말해야 한다. 또한 주장하고 가르치려들기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만을 겸손히 말해야 한다. 그럴 때 개혁신학이 사랑 받을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이 환영받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했던 사람들의 목회 현장의 초라함 내지 열매 없음 때문이다. 실제로 개혁주의 신학을 목회원리로 삼는 대부분의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신학교 다닐 때나 목회 초년생일 때 입만 열면 개혁신학을 외치던 사람들까지 개혁신학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배운 대로 해도 안되더라’는 말도 나오고, ‘30년 동안 바르게 한다고 해왔지만 교회적 상황을 볼 때 그 결과가 미미하니 바르게 한다는 말은 이제 하지 말자’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어떤 마음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는 일말 이해는 간다.

 

하지만 정말 바르게 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는지, 바르게 한다는 것을 구호로만 외쳤던 것은 아닌지 우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바르게 했는데 우리가 얻은 복이 얼마나 되는가?’라고 묻기보다 바르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임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에 따라 목회하는 목회현장이 얼마나 풍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가능하면 점진적인 양적 성장도 이루어야 하고, 양적 성장을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그럴 때 개혁신학의 대적자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이나 개혁주의 목회자들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공격하는 말이 ‘그렇게 성경적으로 한다고 하면서 목회 현장은 왜 그 모양이냐?’라는 말이다. 그런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성경구절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궁극적인 열매는 양적 열매가 아니라 주의 뜻에 얼마나 충실했느냐 하는 열매임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