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넝쿨장미가 아닌가?_ 이정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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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넝쿨장미가 아닌가?

이정우 목사_기쁨의교회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다. 조이스라는 사람 얘기인데 참 감동적이다. 얘
기는 대략 이렇다. 몇 해 전에 이 사람은 정원 모퉁이에 넝쿨장미를 심었단
다. 온 정원에 노란 꽃이 만발할 것을 기대하며 …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꽃 한 송이 피지 않더란다. 이유가 궁금했던 그는 원예사를 찾아갔다. “기름
진 흙도 깔아주고 물도 충분히 주는 등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무성하게 키웠
는데, 이상하게 꽃이 피지 않아 이렇게 찾아왔소.”
원예사는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런 정성 때문에 꽃이 피지 않
은 겁니다.” “예?…” 멍하니 서 있는 조이스에게 원예사는 이렇게 조언해 
주더란다. “이 장미는 기름진 땅에 두면 안 됩니다. 모래흙이 제일 좋고 비
료를 줘서는 절대 안 됩니다. 대신 자갈 섞인 거친 흙을 넣어주십시오. 그리
고 불필요한 가지를 사정없이 잘라버리세요, 그러면 꽃이 필 것입니다.” 조
이스는 시키는 대로했다. 
그랬더니 정말 다음 해에 장미꽃들이 정원을 아름답
게 장식하더란다. 이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를 끝낸다. “노란 넝쿨장미는 어
쩌면 인간과 그렇게 같을까!”

이 이야기를 읽으며 옛 고향집에서 키웠던 닭들이 생각났다. 당시 우리 집에
서 키우던 닭들은 한결같이 알을 낳지 못했다. 참 궁금했다. 심지어 몇 마리 
키우는 염소들도 새끼를 배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너무 잘 먹
고 편하게 지내서 그렇단다. 잘 먹고 편안하게 사는 것, 이것은 존재하는 것
들이 한결같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신의 존재다움을 상실
한다는 역설은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평안하게 걷기를 좋아한다. 부드럽고 화려한 양탄자로 장식된 고통 
없는 길을 걷고 싶어한다. 웅덩이는 피해가고 험산준령은 돌아간다. 가는 길
에 비바람을 만나면 불운을 느끼고 발목이 아리고 물집이 생기면 사고로 여기
며 폭풍우에 막히면 실패라며 좌절한다. 거의 예외 없이 이 개똥철학을 신봉
하는 게 우리들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존재일까. 혹
시 우리에게 넝쿨장미의 환경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낚시질하는 
어부는 해초를 피하고자 한다. 해초가 많으면 고기를 잡는 데 방
해가 된다며 투덜거린다. 그러나 어부가 그렇게 잡으려고 노력하는 고기가 바
로 그 해초에서 태어나 산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생도 마찬
가지가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싶어하는 참되고 고결한 인생도 고
통과 눈물의 해초를 씹으며 빚어지는 게 사실이 아닐까. 
이런 면에서 에덴동산 얘기는 참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동
산에서 내어쫓으시면서 고난을 주셨다. 남자는 벌어먹고 사는 게 힘들도록, 
여자는 수고하며 애 낳아 키우고 남편 때문에 속 썩도록 만드셨다. 사랑의 하
나님이 복수에 불타서일까. 아니다. 그분의 속내는 아주 옛날부터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스며들어 있다. 
고대인들에겐 ‘트리불룸(tribulum)’이라는 이상한 소도구가 있었다. 곡식
의 낱알을 때려 껍질을 벗기는데 사용되었다는데, 이것으로 두들겨서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얻었단다. 영어의 ‘고난(tribulation)’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단다. 고난이란 무엇인가. 두들겨서 껍질을 벗기는 것이다. 
두들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참 자아의 밭이 조성
되어야 진리의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한 수도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
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늙은 수도사가 이렇게 말
했다. “이 단단한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도사가 물을 부
었다. 그러나 물은 옆으로 다 흘러내리고 말았다. 
그러자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로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다. 그
는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한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했
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은 잘 뭉쳐졌다. 나이든 수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
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 역시 깨어져야 해.” 
교만한 마음에는 진실이 뿌려질 수 없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깨
뜨리신다. 망치로 부수신다. 
또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을 전혀 지켜주지 못할 것에 의지하여 행복의 보금자
리를 만들려고 애쓴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인기와 같은 허망한 줄기에 자
신과 가족의 보금자리를 만들려고 버둥댄다.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내버려두겠

는가. 그렇다. 하나님은 망치로 부수신다. 
어미새 한 마리가 알을 낳기 위해 썩은 나뭇가지 위에다 둥지를 틀었다. 마
침 이를 본 농부는 그 둥지를 헐어버렸다. 새는 다음날 똑같은 자리에 다시 
둥지를 짓기 시작했지만 농부는 그것도 헐어냈다. 그러기를 수 차례, 마침내 
새는 그 가지를 버리고 다른 가지로 옮겨 둥지를 짓기 시작했다. 새가 안전
한 나뭇가지에 둥지를 트는 것을 보며 비로소 농부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카터 대통령은 에모리 대학에서 아놀드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
게 역설하였다. “역사상 문명이 최고로 발전했던 시기는 평탄할 때가 아니
라 고통스러운 때였습니다 … 위기는 각성을 낳고, 각성은 참신하고 창조적
인 생각을 낳습니다.” 
이 과정에서 삼중불구였던 헬렌켈러가 역사의 스승이 되었고, 소경이었던 존 
밀턴이 <실락원>을 저술하여 위대한 문호가 되었다. 존 번연은 옥중에서 망치
로 맞으면서 <천로역정>을 저술하였고,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수가 되어 깨어지
면서 <죄와 벌>을 탄생시켰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베토벤의 <운명>이 태어났
으며, 13년의 병고 속에서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이 빚어졌고
, 아내와 자식
을 잃은 베르디의 고통속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창조된 것이다.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그러했다면, 우리 같은 사람이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사람은 다 부서져야 하다. 깨어져야 한다. 나의 마음의 밭은 기경되어야 하
고 쟁기로 갈아주어야 한다. 그런 후에 참된 내가 심겨질 수 있다. 당신은 당
신의 고통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느끼는가. 당신의 농토에서 자라난 가라지
와 엉겅퀴를 보면서 무엇을 깨닫는가. 오늘, 혹시 당신은 넝쿨장미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