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회 총회에 거는 기대와 소망
김병혁 목사_에드먼톤 갈보리 장로교회 협력목사
바야흐로 한국 교회에 총회의 계절이 다가왔다. 한국의 대부분의 보수교단들
은 올해를 90회 째를 맞는 총회로 규정하고 있지만 총회의 역사적 기원은 이
천 년의 시간을 소급하여 사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도행전 15장에 기
록된 예루살렘 공의회가 그것이다. 전국 교회의 대표자로 모인 사도와 장로
들은 이 회의를 통해 교회가 당면한 현실적인 난제(難題)들을 성령과 말씀으
로 함께 고민하고 해법을 찾았던 것이 오늘날까지 총회라는 이름으로 그 전
통이 계승되어 오고 있다.
장자(長子) 총회들의 슬픔
그런데 최근 들어 이토록 장구하고 아름다운 역사를 지닌 교회 전통이 심각
한 도전을 받고 있다. 새삼 충격적인 것은 이 전통을 훼손하는 주범이 다름
아닌 스스로를 한국 장로교회의 장자라고 연신 주장해오던 무리들에 의해서
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가리켜 정통보수의 보루요, 개혁주의 신학의
선봉인
장로교단이라고 주장하지만 최근 수년에 걸쳐 그들의 총회가 보여주
고 있는 한심스런 작태는 총회라는 낱말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물론
한국 교회에 대한 전체적인 불신과 실망과 분노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한국 교회를 호령하던 두 교단은 지금 총체적인 분열과 위기를 맞이하고 있
다. 총회철마다 터져 나오는 금권, 향응, 부정 선거는 더 이상 뉴스거리가
아니다. 총회의 무능과 부패를 지적하는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안팎에서
끊이지 않는데도 난국을 해결해야 할 총회가 오히려 의혹과 불신을 조장하
는 주역(?)이 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총회는 교회 정치 권력에 줄댄 이들
의 기득권 쟁탈장으로 변모하고, 총회와 교회와 신학교 사이에는 끊임없는
반목과 냉소의 전선이 흐르고, 교단의 설립 이념과 신학적 정체성과 같은 본
질적인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올 총회에는 「교회개혁실천연대」를 비롯한 13개 기독
단체에서 평신도들로 구성된 감시단을 각 총회에 파견하겠단다. 가장 성경적
인 동시에 개혁적이어야 할 장로교회의 총회가 자정 능력을 상실한 채 일반
인들에게까지 개혁의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다. 장자 교단의 슬픔인 동시에
한국 교회의 비극이다.
두 교단의 실패, 뼈아픈 교훈으로 삼 아야
이런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합신 교단의 위상은 더욱 빛을 발하는 듯 하
다.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와 무질서로부터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달려
온 24년이다. 숱한 어려움과 난관 속에서도 합신 교단은 한국 교회 역사에
있어서 가장 참신하고 역량 있는 교단 중 하나로 발돋움하였고 신학과 목회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라는 교단의 이념이 말해주듯이 합신
은 타락과 분열로 점철된 한국 장로 교회의 아픔을 끌어안고 개혁주의 신학
을 기초로 한 교회 개혁의 주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쳐왔다.
합동신학대학원의 대외적인 이미지만큼이나 합신 교단의 총회는 어느 교단에
서도 찾아보기 힘든 안정되고 질서 있는 모습으로 교단 내외적으로 높은 지
지와 평가를 받아왔다. 이것은 분명 합신의 자랑이며, 긍지이다.
그러나 자만(自慢)할 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두 교단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사반세기 역사나 내용이 합신
에 견주어 뒤떨어지지 않는 교단들임을
기억하자. 그들은 합신의 역사보다 갑절 이상의 세월을 지내왔고 오랜 세월
동안 표면상 한국의 정통 장로 교회를 이끄는 쌍두마차 역할을 감당해 왔으
며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또한 두 교단은 역
사적으로 합신과도 미묘하면서도 긴밀한 공적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오늘날 이런 지경에 처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한국 교
회의 장자로 인식하던 그들을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에서의 신세로 전
락시켰는가? 남의 일이 아니다. 손뼉 칠 일은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강 건
너 불구경할 일도 아니다. 부지부식간에라도 그들의 잘못된 전철을 밟고 있
지는 않은지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90회 총회 통해 반드시 생각해야 할 일들
총회는 산하 치리회들이 제출한 의제들을 처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다. 의제 하나, 하나가 지교회의 유익을 위한 일이고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
스러운 교회를 섬기는 일이기에 총대들은 교회의 대표자로 위임받은 역할에
충실하도록 총회 전반 업무에 신실함과 정직함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근래
들어 총회의 기능이 막강해지고 총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역할에 대
한 기대치가 높아지다 보니, 총회 임원을 선출하는 것을 총회의 하이라이트
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총회를 교회들의 최상(最上)의 통치 기관으로,
총회장을 교단의 최고(最高) 권력자와 동일시하는 풍조가 만연한 까닭이리
라. 하지만 이것은 총회를 둘러싼 끊임없는 잡음과 타락의 원흉임을 기억해
야 한다. 총회는 영속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며, 높은 것이 아니라 넓은 것이
며, 통치적이 아니라 봉사직이라는 박윤선 목사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
새길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총회에 대해 기대와 소망을 갖는 가장 적극적인
이유는 의제 처리와 임원 선출보다 훨씬 중요한 업무가 총회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총회는 일년에 한차례, 전국 교회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규모가 가
장 큰 연합 모임이다. 이것은 총회가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과 방향성을 제고
하고 숙의하는 동시에 그 내용에 맞게 교단내 교회들의 진정한 연합을 도모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합신 교단이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말로만 개혁주의를
부르짖던 교권주의 세
력에 대한 항거로부터 시작하여 참되고 바른 개혁주의 신학을 이 땅에 구현
하기 위한 거룩하고 치열한 몸부림이 있었다. 그러나 항간에는 합신 교단 내
에서조차 합신의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한
편, 합신의 이념인 개혁주의 신학의 균열화와 이탈 현상이 곳곳에서 목격되
고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실용주의적 복음주의와 교회성
장 지상주의와 반지성적 감정주의가 개혁주의의 기반(基盤)을 침식하고 있
다. 앞서 언급한 두 교단에 속한 양식 있는 교수들과 목회자들은 ‘개혁주
의 신학의 상실이 교단의 총체적 위기를 불러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귀담
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신학적 정체성 확인에 최선 다해야
교단의 교회내 연합은 신학적 일치라는 필연적인 전제를 요구하고 있다. 신
학적 일치는 교회간의 연합의 근거를 제공하고 교단과 목회자들에 대한 신뢰
와 믿음을 더욱 강화한다. 외국에서 경험하게 되는 전통적인 개혁교회나 장
로교회들의 경우, 교단의 신학적(사상적) 통일성을 확인하는 것을 총회의 최
고 목적으로 삼는다. 총대들은 총회를 통
해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재삼
확인하고 그 결정 사항을 지교회와 성도들에게 여과 없이 전달하면 교회들
과 성도들은 총회 결정을 신뢰하고 이에 순복한다. 지금껏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가 역사와 내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든든하게 서가는 단순하지만 명료한
방식이다.
바라건대, 금번 총회에서는 총회 회의에서든 또는 총대들의 개인석상에서든
합신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길 바
란다. 따라서 바른 개혁신학과 참된 신앙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의 합신으로
더욱 힘있게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